연단의 3대 요소 (잠 27:17-19)
한성진목사
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18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19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이 시간에 “연단의 3대 요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연단이란 신앙훈련이나 신앙연습을 말합니다.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전쟁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서기 1900년대 중국 청나라의 인구는 수억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벨기에 등 잘 훈련된 서양연합군 16,000명에게 당하여 수도인 베이징이 불바다가 되고 철저히 약탈당했으며 나라는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무얼 말해줄까요?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조선시대 우리 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군제는 번상병(番上兵)제도였는데 번상병제도란 생산에 종사하던 인력을 그대로 전투원으로 고용하는 것으로 잘 훈련된 병사가 없었습니다. 어느 부대는 매복하라고 산 속에 배치하니까 모두 탈영해서 그 지역을 적에게 고스란히 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에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이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늘 연습하고 훈련해야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훈련에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고난의 요소입니다.
인간이 완악해서 고난이 없으면 훈련이 안 됩니다. 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학자들은 이 구절을 부정과 긍정 두 가지 방향에서 해석해 왔는데, 70인역 성경에서는 칼에다 주안점을 두고 부정적으로 해석하여 “한 사람의 분노의 말은 또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학자들이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데 결론에 주안점을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란 똑똑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누구나 사회생활에서 맺는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을 받게 된다.”는 내용으로 해석했습니다.
천하의 명검이 나오기 위해서는 대장간에서 망치와 같은 강한 철이 철을 부딪히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어야 하듯이 사람은 사람 속에서 연단을 받을 때 똑똑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관계 속에서 희열 혹은 비애가 수없이 반복됩니다.
칼이라고 하면 일본도가 유명한데 한 개의 명검이 탄생하기 위해서 철판을 가열한 후 접고 두들기고 접고 다시 두드리고를 수없이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접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쇠와 무른 쇠를 사이사이에 여러 겹 덧대면서 연마하면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칼을 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연단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시66:10-12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했습니다.
요셉도 보세요. 혈육의 열두 형제들의 시기나 보디발의 아내 그리고 시위대 감옥에서 사람들의 연단 속에서 그 위대함이 만들어지잖아요. 사람 없는 연단은 거의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니엘이 던져졌던 사자굴의 사자의 현대적 의미도 사람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도 사울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런 연단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시 75:4에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게 고난을 통한 연단의 원리입니다. 세상의 문화와 문명도 서로 긴장하고 경쟁하면서 발전합니다. 과학도 무기를 만드는 치열한 군사과학 때문에 발전해왔습니다. 경제도 누가 살아남느냐 서로 잘 살기 위해서 경쟁하다가 발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 살아남느냐? 마귀가 이기냐? 그런 불 같은 연단 속에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대장간에서 철을 다루는 것과 같아요. 한 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욥23:10에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했습니다.
왜 고난 속에서 훈련하실까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왜 중요한지 뼈져리게 깨닫고 온전한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히5:8-10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 셨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고난 그 자체로는 연단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을 연단으로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깨닫고 여기서 합격하지 못하면 난 살아남지 못한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100점짜리 믿음 만들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끊어야 할 것이 있다면 끊어야 하고 행해야 할 것이 있다면 행하시기 바랍니다. 목숨 바쳐야 할 곳이 있다면 바치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성도 상호간에도 선의의 경쟁이 필요합니다. 누가 더 성경 많이 읽나 누가 더 기도하나, 누가 더 믿음이 좋은가? 누가 더 충성하는가? 누가 가장 많이 전도하는지 이런 선의의 경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서간 성도들의 본도 보고 서로 잘한 것, 못한 것도 보고 서로 잘하려고 경쟁한다면 더 빨리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2. 인내의 요소가 있습니다.
18절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얻느니라” 여기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란 그 나무가 잘 자라도록 보살피고 가꾸어 마침내 열매를 수확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화과란 처음 익은 봄 무화과를 말합니다.
이 처음 익은 무화과를 이스라엘에서는 ‘비쿠라’라고 합니다. 비쿠라는 여름무화과('테에님')와는 달리 겨울에 달려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봄에 결실하는 쭈글쭈글하고 크기도 작고 과즙이 그리 많지 않는 이른 무화과입니다. 이 무화과는 센 바람이 불면 떨어집니다. 그래서 계6:13에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더라 했던 바로 그 무화과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 농사를 짓는 농부는 노심초사 온갖 기술을 발휘하면서 무화과를 길러냅니다. 거름도 충분하고 미네랄 같은 미량요소도 부족하지 않게 염분을 조금씩 주며 관리하면 겨울에도 잘 견뎌낼 수 있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열매를 수확할 수 없습니다.
방울토마토도 잘 기르면 웬만한 추위에도 죽지 않고 열매를 맺는 걸 보았습니다. 감도 추워야 생식성장을 촉진하여 열매가 커지는데 영양이 부족하면 잎이 떨어져서 좋은 열매를 맺힐 수 없습니다. 무화과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농부를 가리켜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라는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주인의 모든 고난의 과정에서도 무화과의 어려운 때를 극복하듯 그렇게 시중을 들며 동참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주인에게는 순풍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울비도 오고 추운 대풍도 있습니다. 이 때 주인의 착한 종은 주인을 멸시하거나 떠나지 않고 그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는데 그렇게 할 때 장차 오는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주인은 예수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끝까지 참고 감사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날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딤후2:11-12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알려주는 연단의 요소가 바로 인내의 요소입니다. 인내는 계속하고 반복하는 연단의 요소 중 중요한 요소입니다. 훈련은 반복 가운데 얻어집니다. 그래서 롬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습니다. 인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단 말입니다. 훈련소에서 놀면서 훈련 받는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계속 힘쓰시고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 목숨 걸만큼 되어야 합니다. 기도생활 잘해야 합니다. 말씀과 찬송과 전도와 사랑도 그래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 주님을 섬기는 마음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진실한 믿음이 들어갔는지를 체크하십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믿음 지키고 핍박을 받아도 우리 주님과 상을 생각하며 기뻐하는지 보십니다.
마5:10-13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런 기쁨 속에서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만납니다(벧전4:14). 그러므로 인내로서 훈련에 잘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3. 계시와 조명의 요소가 있습니다.
19절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옛날에는 거울이 별로 발달하지 않아서 놋판을 광을 내서 놋거울을 썼거나, 그것도 없으면 그릇에 물을 떠놓고 얼굴을 거기 비쳐가며 보았습니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모습을 거기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비슷한 감정과 사고를 지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족들을 보세요. 자녀들의 모습이 바로 부모의 모습입니다. 부모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잘하거나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거기서 내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혹은 이웃들도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면 이웃도 열고, 내가 침울하면 이웃도 침울하게 대합니다. 내가 웃어야 남이 웃지 내가 냉엄하면 어떻게 나를 보고 웃어주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의 대하는 모습과 반응 속에서 나를 발견합니다. 내 믿음 상태를 발견합니다. 인격상태도 발견합니다. 사랑의 상태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인관계를 우리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밝은 거울이 있습니다. 말씀의 거울입니다. 우리 신앙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계시의 요소입니다. 이스라엘에 개혁자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여로보암의 죄가 왜 그렇게 오래 갔습니까? 율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니 바로 살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이 계시와 조명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서 약1:23-25에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서자로 보지 아니하시고 적자처럼 귀하게 여기시기에 오늘도 우리를 연단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상황을 훈련상황으로 생각하시고 힘써 복음의 진리를 배울 뿐 아니라 믿음을 연마함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반드시 필요한 고난의 요소, 인내의 요소, 계시의 요소를 깊이 깨달아 신앙훈련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