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외 4편
정구민
반만년 나라를 지켜온 산신
백두대간 어슬렁거리며
발톱 내보였다
헛기침하다가
뻣뻣하게 수염 세우며
낮잠 자다가
나라 협박받으면
입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위협하고
가난이 봄빛처럼 푸르르면
얼룩무늬 털을 뽑아
산빛 푸르게 물들이며
터줏대감으로 살았다
이제 땅에선 종을 이어가기 힘들어
하늘로 이주하려니
봄에는 큰곰
여름에는 돌고래
가을에는 조랑말
겨울에는 토끼
계절마다 동물들이 집을 다 차지해
빈집이 없다
눈이 부시도록 타오르는 눈빛
그냥 사라지기엔 억울하고
숲을 파랗게 키우려는
지구 전사 등에 태우고 으르렁으르렁 세계로 향해야지
생각을 탁본하는 밤
문어
정구민
물갈피에 글을 쓰는 선비
먹고
먹히는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홀소리와 닿소리
문어 발끝마다 흘러나오는 먹물냄새
행간에서 물비늘로 반짝인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글자들
누가 문어를 뼈 없는 동물이라 말했는가?
마르기도 전에 지워버리는 글이랑
한국에서 태어난 문어는
한글밖에 몰라
시를 번역하는 물고기를 만나지 못해
머리 가득 까만 먹물이 고인다
붓을 꺾어야 할까?
바다 환경 살리려 마지막 먹물까지 짜낸다
펄펄 끓는
기적의 도서관
흡반처럼 빼곡한 도서들
인류와 동행하는 문어文語
인류에 기록되어 문화유산으로 남을 문어의 생태시
시간을 방목하다
정구민
산문이 공중에 걸렸습니다
열리고 닫히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들고나는
바람 홰치는 소리
방목의 시간은 엉덩이 털이 뽑히는 시간
구름이 능선의 고삐를 몰아
펄펄 끓는 추위를 방목하면
갈기 눕힌 큰산맥
하얀바람 서걱이는 옥수수밭
수수수 날아오르는 가지런한 문장
허공문에 걸린 거미줄에도
생각뿔이 돋아
여름에 방목된 빗소리는 모두
어디서 젖고 있는지 안부가 궁금한 하얀겨울
곤두박질치던 세상 시름 하얗게 얼려 물소리 하얗고
허공도 날개도 다 얼려버린
아찔한 지구
신은 어쩌자고 시간을 방목해 두었을까요?
나비
정구민
사방 벽면 안팎이 숲속이다
계절을 접었다 폈다
시집 숲속에 금빛나비 한 마리
의지도 다 못 태우고
시집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고
상상 나래로
쉬다 뛰다
걷다 뛰다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라고 보폭이 저항하는 소리
활활 봄을 피워
푸른지조의 온기로 꽃을 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고요히 한숨을 펄럭이는 나비
도기
정구민
도기에는
푸른나무 숨소리에는
새 날갯짓 풀벌레 울음
구름 발자국 안개 냄새
도를 닦고 있다
천도를 넘는 발버둥
간장종지 속에서도
단맛 짠맛 떫은맛
저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도를 닦고
소태처럼 쓴맛은 입맛만 다신다
질그릇에는
계절과 우주가
함께 숨 쉬고 있다
흙으로 빚은 그릇
밥 담으면 밥그릇
꿀 담으면 꿀병
도기에 정신을 담으면 장인정신
백자 청자엔 장인정신이 반짝인다.
정구민 시인 약력
*충북 영동 출생
*이효석 백일장 최우수상
*남과 다른 시 쓰기 동인
*한국 방송통신 대학교 국문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