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소창다명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석야 신웅순
소창다명사아구좌
조그마한 창에 햇빛이 밝아 나를 오랫동안 앉아있게 한다
小窓多明 使我久坐
예서이면서 행서이다. 이 현판의 낙관은 ‘칠십이구초당 七十二鷗艸堂’으로 되어있다. 김정희의 명호는 알려진 것만도 300여개나 된다.
선생의 명호는 삶의 흔적이다. 당시의 상황과 처지를 은유하거나 상징하고 있어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은연중 드러내주고 있다. 글씨를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숫자 명호는 글과 글씨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선생은 금석학뿐만이 아니라 주역의 대가이기도 하다. 선생이 수를 쓸 때는 주역의 수 개념을 도입했다. 숫자와 관련된 또 하나의 명호가 있다. 삼십육구주이다.
추사 연구가 강희진은 이 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6이나 72는 많다는 의미도 함께 지니지만 모두 9의 배수이다. 따라서 36은 9 와 관련된 수이 다.9가 가지는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을 아홉으로 나누면 마지막 정리의 단계가 9이다. 주역에서 이 9를 경계하기를 나서지도 말 고, 벌리지도 말고, 대들지도 말기를 권한다. 부중부정(不中不正)하여 더 나갈 바가 없으니 나아가 면 뉘우침만 남는다. 9는 이런 항룡의 수이다.9란 수의 의미는 항룡으로 늙은 용은 힘을 쓸 수 없 는 의미로 회한을 나타냄으로써 여기서는 자조적인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강상시절의 강제된 은퇴를 에둘러 표현했다. 이 명호들은 한가함도 유유자적도 아닌 만년의 쓸쓸한 심경을 담고 있는 숫자이다.
선생의 ‘작은 창문에 많은 밝은 빛이 나를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한다’는 것은 왠지 편안해보이지는 않는다. 강상시절 여유과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역설적으로 나타낸 글귀가 아닌가 생각된다. 제주도의 유리안치는 아니더라도 당시의 강상시절은 선생에게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햇빛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때는 이런 명작도 나오게 하는가.
글자를 변형, 파격시켜 형상을 재해석하고 있다. 문자 하나하나 디자인하듯 썼다. 창(‘窓)자를 디자인한 것이나 명(明)자를 삐뚜루 쓴 것이나, 좌(坐)를 흙 토(土)위에 네모 두 개를 얹진 것 하며 무엇하나 제대로 쓴 것이 없다. 웃음이나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는 바보스러운 천지난만한 모습 같은 글씨체이다. 양감, 질감 같은 감각적 이미지도 글씨와 글에 묻어있는 것 같다.
키는 글씨 말고도 글의 뜻에도 있다. 띠풀로 엮은 집이기는 하나 작은 창하나 둔 마음에는 햇빛이 밝아 오랫동안 앉아있을 수 있다. 이것이 선생이 원하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일 것이다. 여유로운 듯 역설적인, 따뜻한 시 같기도 하고 심오한 철학 같기도 하다.
선생의 복잡한 심경이 당시의 이 글씨와 글 ‘소창다명사아구좌’에 서려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처연하게 만들고 있다.
주간한국문학신문,2016.4.13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평온한 휴일되세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