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32, 주간기독교 신문기자
한때 세칭 동방교가 위장간판으로 내 걸었던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에서는 ‘주간 기독교’라는 다블로이드판 주간지와 함께 월간지 ‘청해’라는 잡지를 발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중에 ‘주간 기독교’라는 주간지는 아직 발간되고 있다.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기위해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하여 '초량12교회'와 주학교회 전도사로 있을때 나는 ‘주간 기독교’ 신문의 부산 주재 기자이기도 했다.
(잡동사니 가방 속에서 당시의 기자 신분증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천방지축을 헤아리지 못하고 물불을 안 가리고 세칭 동방교에 충성하던 당시의 모습이 상기되어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과 함께 감회가 새롭다. 異端의 追憶 #142, 아주 오래된 추억 한줌 발견 중에서)
서울 본사에서 취재부 기자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는데 몇가지 뜻이 있었다. 비상시나 필요할 때 기자신분을 활용하라는 뜻이다. 또 부산 경남 지방에 산재해 있는 세칭 동방교의 지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할때는 즉각 달려가서 기자신분을 이용하여 사태를 수습하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비록 주간지 이기는 했지만 기자신분증은 꽤 유용하게 쓰일때가 많았다. 기차나 버스도 기자 신분증을 내보이며 취재중이라고 말하면 그냥 통과해주는 그런 어두운 시절이었다.
파출소에 들어가 ‘기잔데 뭐 좀 물어봅시다’ 하면서 시건방을 떨기도 했다. 한번은 서울 본사의 취재지시를 받고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을 찾아가 원장을 만나 그 병원의 설립취지와 배경, 봉사활동, 운영실태등을 상세히 취재하여 사진과 함께 올렸는데 다블로이드판 양면 가득 기사화 되어 실린적도 있었다. 아마 초창기의 발행 재고분을 찾아보면 내가 쓴 기사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멋모르고 설쳐대던 시건방은 한번 일을 치르고야 말았다. 김해 '대저5교회'에서 무슨 일을 보고 '초량12교회'로 돌아가려는데 밤 12시가 넘었다. 그때는 밤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통금에 걸린 것이다. 그냥 거기서 자고 와도 되는데 호기가 발동한 것이다.
어느 후배 남자 신도 한명과 같이 동행하고 있었는데 ‘나한테 기자 신분증이 있으니 그냥 가보자’라고 이야기 하고 대저 도로변에 나와 지나가는 트럭을 손을 흔들어 세웠다. 당시는 산업화정책 우선시대라 짐을 싣고 가는 트럭은 검문소에서 확인하고 통과할 수 있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통행금지 시간에 도로가에 두 사람이 서서 손을 흔드니 무슨 특별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한 기사가 차를 세우고 우리를 태워 주었다.
누구냐 물어서 시경에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얼버무렸다. 차가 구포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가는 검문소에 닿았다. 검문경찰관이 차를 세우고 검문을 했는데 내가 먼저 내려서 경찰관에게 다가가 기자 신분증을 내보이며 “기잔데 취재 나갔다가 늦어서 돌아가는데 좀 양해 해 주시오” 하니 알았다고 하면서 조심해 가라고 통과시켜 주었다. 기자 신분증이 먹혀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있었다. 차가 달려서 사상을 지나고 개금삼거리에 도착하니 도로 한 가운데 바리케이트를 치고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를 멈추고 경찰관이 다가와서 보니 기사 옆에 두 사람이 더 타고 있는것이 아닌가, 물어보기도 전에 운전수가 다짜고짜 “이분들 경찰이요 경찰” 한다. 대저 도로변에서 트럭을 세워서 탈 때 시경에 근무한다고 말했고 구포 검문소도 무사히 잘 통과하는것을 목도한 터라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검문경찰관이 우리를 보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기자 신분증을 내밀었다. 내리라고 한다. 관명사칭이라는 것이다. 파출소에 들어가 관명사칭 공무집행방해 조서를 작성했다. 큰일났다. 조서를 작성하던 경찰관이 동행하고 있는 후배 남자 신도의 주소를 보더니 “집이 개금이요?” 하고 묻는다.
그의 거주지 주소가 개금이고 실제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동네인 것이다. 그의 부친이 교사다. 내가 경찰관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다. “사실은 기잔데 운전수가 잘못알고 말한 것이니 사정 좀 봐 주시오”하니 바로 후배 남자 신도의 집에 전화를 걸어 신분을 확인하고는 자고 있는 그의 부친을 오시라고 해서 거주지가 확실하고 기자신분이므로 작성한 조서는 폐기하고 없던 일로 할터이니 신병을 인도해 가라고 한다.
한밤중에 홍두깨라, 그의 부친이 허겁지겁 파출소로 달려와 우리 둘을 데리고 집으로 가서 재웠다. 할말이 없었다. 자는둥 마는둥 이튿날 아침에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어쩔줄 몰라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부모님께 인사하고 집을 나와 '초량12교회'로 돌아왔다. 참으로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첫댓글 내 동생도 잠시 주간기독교 신문 기자를 했다고 누군가 말하더군요. 김동일(휘문?)씨의 오른팔로 일하다가 일방적인 결혼 명령으로 나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동방교에서 나간 후 KBS에 입사하여 국장으로 퇴직하였답니다. 동방교에 계속 있었다면 별 볼일 없는 인생으로 끝났을텐데, 잘 된 결말로 보입니다.
휘문? 본명은 휘배, 개명은 동일,
서울대 약대출신,
동방교내에서 좀 복잡한 인물이죠...
@하늘천 네. 휘배씨가 맞고요, 당시에는 최고의 권력을 누렸답니다. 임원수련회 때도 김동일씨가 설교를 할 때는 수도원 인원들 다 들어오라고 명령을 하더군요. 그리고 시달말씀 이라고 매주 마다 노영구를 빙자해서 지시 사항 및 여러가지 말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무릎을 꿇고 필기까지 하면서 경청했는데,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일반상식과 독후감, 자기 주장을 설파하는 정도였습니다.
이후 독일 유학파들이 국내에 돌아와서 실권을 잡고보니 설 자리도 마땅찮고, 재정에 빈 공간이 많아서 스스로 물러났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에는 그가 동방교의 똑똑하고 젊은 인재들을 외국이나 절로 보냄으로써 동방교의 퇴락을 앞당겼고, 그로인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누리고 거액의 돈도 착복할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