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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 중턱에 위치한 자재암 전경. 우측에 보이는 바위굴이 바로 ‘원효샘’이 있는 나한전이다. 대웅전에는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가 모셔져 있다. 나한전 우측으로는 작은 폭포와 계곡이 있어 도량 전체에 청량감을 준다. | 신라 선덕여왕 14년 원효 스님 창건 〈반야바라밀다심경〉 대웅전에 보관 폭포, 샘, 동굴 등 원효대사 흔적 곳곳에
‘천천히 생각하며 걷는다’는 뜻을 가진 소요산(逍遙山) 기슭. 이 곳에는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자재암(自在庵)이 있다. 원효 스님은 잘 알려진 것처럼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경지를 몸소 보여줬던 이다. 속세를 뒤로 하고 출가했던 원효 스님이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고는 또 다시 뜻을 세워 이곳 자재암에서 정진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파계승을 자처하며 거지 행세로 세상의 저잣거리를 구석구석 떠돌았다.
원효 스님은 세속의 더러움에 발 디디더라도 일미(一味)의 맑고 깨끗한 행을 잃지 않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처념상정(處染常淨)하는 연꽃처럼 사는 것이 힘든 세상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소요산을 자유롭게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듯 하다.
일주문에서 한참 들어가면 등산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부분에 원효폭포와 원효굴이 있다. ‘원효굴’은 원효 스님이 요석공주를 잊으려, 이 굴에서 참선을 하며 정진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작은 동굴 속에 모셔놓은 불상의 모습이 마치 당시 굳은 마음으로 가행정진했던 원효 스님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옆 ‘원효폭포’는 몇해 전까지만 해도 시원한 물줄기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곤 했는데, 지금은 물이 말라버려 냇물같이 가느다란 물줄기 만이 폭포였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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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스님이 정진했다는 원효굴과 원효폭포. | 원효굴서 자재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굴 옆으로 난 속리교(俗離橋)를 건너야 한다. 속리교는 다리를 건너면 속세를 떠나게 된다는 의미로 옛날에는 속세를 떠나는 큰 마음을 먹은 이들이 건넜을 법했다.
속리교를 지나 소요산 등산 안내판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소요산 전망대가 있는 공주봉, 왼쪽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자재암으로 갈 수 있다.
자재암으로 향하는 이 계단은 108계단이다. 매 계단을 디딜 때 마다 참회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깨끗이 하라는 이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계단을 모두 오르면 해탈문이 반긴다. 번뇌의 속박을 떠나 삼계(三界: 欲界·色界·無色界)를 탈각(脫却)해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며 문루에 달린 종을 쳐본다.
해탈문을 나오면 예전 조선 태조가 즐겨 찾았던 백운대(白雲臺)와 폐정(廢井)이 있고, 백운대 밑에 있는 폭포는 원효 스님이 노닐던 곳이라고 하여 원효대(元曉臺)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옛날 이곳에는 소요사(逍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원효 스님이 정진의 성과가 없자 죽을 각오를 했을 때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원효대에서 보이는 봉우리가 관음봉으로 불리는 것이 재미있다. 원효대에서 계속 산길을 걸으면 얼마 가지 않아, 백운암이 있다. 백운암은 추담대종사사리탑 위쪽에 자리한 건물로 자재암의 선방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높다란 석축 위에 지었다.
다소 가파른 계단을 계속 오르면 자재암이 길손을 반긴다.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년 원효 스님이 창건했고, 고려 광종 25년(974) 왕명으로 각규 대사가 중창했으며 의종 7년(1153)에 화재로 소실돼 이듬해 각령선사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중건했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칸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라 개칭하였다. 순종 융희 원년(1907) 의병들의 독립전쟁이 한창일 때, 근거지였던 이곳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그후 2년 뒤에 제암, 성파 양사가 복원하여 원래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됐다. 이후 1961년에 대웅전을, 1971년에는 동·서승방을, 1974년에는 포교당과 원효대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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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교를 지나 108계단을 오르면 해탈문이 나온다. 종을 치면 마치 고된 산행에서 해탈되는 듯 하다. | 자재암 인근에는 원효 스님이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 머물렀다는 요석공주 궁지와 사자암지, 소요사지, 현암지, 원효사지, 조선 태조 행궁지가 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현재 알 수 없다.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자재암에 요석궁(瑤石宮)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나중에 원효 스님은 이곳에서 설총(薛聰)을 길렀다고도 한다.
자재암 대웅전에는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 〈반야바라밀다심경〉 언해본이 있다. 대웅전의 석가모니 삼존불 옆에 고이 모셔져 있는 이 경전은 당나라 현장 스님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중희가 자신이 만든 〈현정기〉를 붙여 다시 편찬한 주석서다. 세조 10년(1464)에 〈금강경〉과 함께 간경도감에서 발간했다.
대웅전 오른편의 나한전에는 원효 스님이 마셨다는 ‘원효샘’이 유명하다. 원효 스님이 주석한 절터에는 꼭 약수가 나왔다고 하는데 그 중 자재암의 ‘원효샘’의 석간수는 찻물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수로 이름이 나있다. 높은 계단을 오르느라 송글송글 맺힌 땀과 열기가 석굴로 된 나한전의 시원한 기운과 상큼한 물맛에 저절로 달아난다.
자재암을 뒤로하고 돌아나오는 길, ‘극락교’라 이름 붙여진 작은 다리가 배웅을 하는 듯하다. 원효 스님이 정진했던 극락정토를 뒤로하고, 다시금 속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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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암 대웅전에 모셔진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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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얽힌 등산로 자재암 대웅전과 나한전 사이에 있는 가파른 계단길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소요산 산행이 시작된다. 경기지역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소요산은 그 멋스러운 산세만큼이나 다양한 루트를 통해 산행을 즐길 수 있다.소요산에는 청량폭포(淸凉瀑布)와 원효폭포가 있는데, 이 지대를 하백운대(下白雲臺, 500m)라고 한다. 그 오른쪽에 원효대(元曉臺)라 하며 옥로봉(玉露峰)을 넘어 북동쪽으로 나한대(羅漢臺, 510m)·의상대·비룡폭포가 나온다. 또 원효대에서 약 30m쯤 되는 절벽 위를 상(上)백운대라고 하며, 그 밑으로 선녀탕(仙女湯)을 볼 수 있다. 소요산 정상은 의상대로 그 옆에는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두고 이름을 지었다는 공주봉이 있다. 산중턱에는 자연석굴인 금송굴도 있다. 산 입구에는 구한말에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홍덕문의 추모비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코스는 자재암에서 하·중백운대와 선녀탕을 거쳐 다시 자재암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하지만 중백운대에서 선녀탕을 거치지 않고 상백운대와 나한대 그리고 의상대를 두루 거치는 완주코스를 선택할 경우에는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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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스님 대중포교 원력 이어갈 것” 자재암 주지 혜만 스님
원효 스님이 수행정진한 소요산 자재암에는 현재 독특한 기도법회가 진행된다. 바로 자비수참기도다. 매달 셋째 금요일 오후 8시, 자재암 나한전에서 열리는 자비수참 기도는 주지 혜만 스님이 부임하며 도입됐다. 혜만 스님은 “기존의 자비도량참법은 양이 많고 현시대와 동떨어진 부분이 있어, 해인사 율원에서 보다 쉽게 바꾼 것을 활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재암에서는 이외에도 다양한 기도로서 원효 스님이 정진했던 그 가풍을 잇고 있다.
꾸준한 기도정진과 함께 자재암은 포교활동에도 열심이다. 특히 혜만 스님은 동두천 자재암 주지로 부임한 이후 동두천사암연합회장과 동두천경찰서 경승실장, 경찰청 경승, 경희의료원 지도법사, 태릉선수촌 지도법사, 의정부교도소 교정위원 등을 맡으며 신도들과 함께 활발한 포교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원효 스님이 무애자재함을 보인 것은 결국 이 세상을 극락정토로 하기 위한 서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스님과 같이 대중포교에 매진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미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