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일지1)에 기록된 1919년 3.1만세 시위, 독살된 고종 황제 그리고 일본 경찰의 잔인한 폭력
23년 정초 첫 날 새벽부터 매티노블의 ⌜노블일지⌟를 계속해서 읽었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최고의 자부심으로 헌법에도 명시된 3•1만세시위에 대하여 우리는 역사가들이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으로 교육을 받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3•1절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청년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약소민족 후원약속과 고종의 독살설에 대한 민족적인 의분으로 어느 때보다 독립에의 희망과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먼저 2.8만세 사건을 일으켰고 그 영향으로 국내의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 대표 33인이 만세시위거사에 합의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고 공약삼장은 한용운이 썼다. 천도교가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비밀리 인쇄하고 경비를 지원하였다. 33인은 고종의 장례식 하루 전으로 잡힌 거사 일을 잡고 각기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들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33인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생 지도부에 연락도 하지 않고 일정을 변경하였다. 손병희가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최린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인 안순환을 시켜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여 경찰서에 자진하여 잡혀 들어갔다. 학생들과 군중들은 민족대표를 기다리다 지쳐서 오후 2시가 넘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덕수궁을 향해서 물밀 듯이 밀려나갔다. 그 후 만세시위의 열풍이 1년 동안 한반도를 휩쓸었다.
그러나 한 꺼풀 더 깊이 들어가면 3.1만세시위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약소민족 후원약속에 독립에의 희망을 가지게 된 신한청년단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신한청년단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한국 독립청원을 위해 영어에 능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송하였다. 그는 떠나면서 일본이 막강한 외교로 ‘조선인은 독립을 원하지 않고 일본의 통치하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다’고 세계에 선전•홍보하고 있으므로 강화회의 동맹국들이 자신을 조선 대표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선 세계를 향해 조선인들이 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각인시켜달라고 당부하였다.
일본제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파리강화회의로 떠나는 김규식의 제안대로 신한청년단은 여운형을 러시아 연해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과 김철, 서병호 등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장덕수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촉발시켰고 국내로 들어온 선우혁은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3•1운동의 분위기를 만들었고 여운형의 노령 방문 또한 3•13만세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의 무저항비폭력 독립운동인 3•1만세시위가 화산처럼 폭발하게 되었다.
매티 노블은 28년째 조선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로서 자신이 체험하고 목격한 3•1만세 시위를 일지로 기록하였는데 아래는 그의 ⌜노블일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919.3.1. 한국의 위대한 날
오늘은 한국의 위대한 날이다. 한국인들의 기쁨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오후 2시, 중학교를 비롯한 각 급 학교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였고, 거리로 나가 양손을 위로 올리고 모자를 흔들며‘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사람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했고, 도시 전역에 기쁨의 외침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나는 긴 행렬 하나가 궁궐 담장의 모서리를 지나는 광경을 우리집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관립 여학교2)학생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화학당 앞을 지나던 한 무리의 남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몰려가 이화학당의 학생들에게 나오라고 해다.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기모노 차림을 한 월터 양이 달려와 대문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을 저지했다. 테일러 씨3)와 아펜젤러 씨4)가 월터 양을 도와 학생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학생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몇몇 남학생들은 몹시 화를 냈으나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종황제가 일본의 한국 통치가 부당함을 알리는 친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종 황제를 시해했다는 내용의 전단들이 오늘 길거리에 뿌려졌다. 오후 2시부터 ‘한국은 해방됐다’는 게시문들로 거리는 홍수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믿고 기뻐하고 있다.
또한 같은 시각, 교회의 목사들은 한국이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에 서명하여 보냈으며, 오을 벌어지고 있는 시위는 그것이 파리 평화회의 앞으로 전달도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오늘의 일을 알리기 위해 한국과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파리 평화회의장으로 사람들을 보냈는데, 나라 전체가 그들과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파견된 이들이 동맹국 대표들에게 하는 말레 무게를 실어줄 것이라고 기대된다.
후략…(노블일지 228,229쪽)
1919.3.2. 독살된 고종 황제
한국이 일본과 동등한 주권을 지녔음을 주장하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목사들은 긍지를 가지고서 조용히 그들의 몫을 한 것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및 조합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불교계와 천도교계의 인사까지 모두 서른세 명이 서명을 했다. 이들은 모두 수감됐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던 남학생들도 수감됐다. 가엾은 사람들, 이들은 그저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고종 황제는 3월 2일 밤에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그의 새로운 능에 묻혔다.
매일 전단들이 거리에 뿌려지고 있다. 초기에 뿌려진 전단을 보면 이들의 시위에 폭력적인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폭력적인 행위는 한국의 자유를 늦어지게 할 수 있으므로, 폭력적인 행위를 일절 금할 것을 모든 단체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함께 움직일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으며,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문서에 거의 강제적으로 서명이 이우러졌다. 고종 황제가 격노하며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강제적으로 서명을 받아낸 이들은 그에 따른 파장이 두려워 고종 황제를 독살하고 궁녀들도 살해했다. 바로 윤덕영과 호상학(당시 전의였던 안상호)의 짓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담은 문서에 이완용, 조중응, 김윤식, 송병준, 임태영, 신흥우가 서명을 했고 그 내용을 담은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노블일지 229,230쪽)
1919.3.5. 일본 경찰의 잔인한 폭력
오늘 아침 9시에 남녀 학생들은 인파가 모여 있던 남대문 역전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해방가5)를 불렀다.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는 제지를 받지 않았지만, 학생들이 이동을 하여 덕수궁 앞에 다다르자 경찰들이 진압에 들어갔고, 사복 차림의 이들이 가게에서 쏟아져 나와서는 몽둥이로 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들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이화학당의 한 여학생이 등을 몽둥이로 맞는 것을 보고 우리 비서인 김봉율 군이 다가가 이를 말리려 했다. 그러자 신분을 위장한 경찰로 의심되는 사복 차림의 일본인들이 김봉율 군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를 때린 몽둥이가 세 동강으로 부러지자 그들은 그의 목을 주먹으로 때리고 고개를 뒤로 꺾어서는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들은 학생들을 끌고 가서 밧줄로 묶고 다시 온몸을 칭칭 감아 포승을 지웠다. 기마경찰들을 비롯한 경찰들도 학생들을 때렸지만 사복 입은 무리들만큼 잔인하게 때리지는 않았다. 한국인 경찰들은 이를 제지하려 했지만 그럴만한 힘이 이들에게 없었다. 일본 경찰은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고 휘휘 돌리더니 여학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우리 아들 헤럴드가 위에서 이 모든 광경들을 목격했다. 이화학당의 교사들은 학생들은 나가지 못하게 했으나 20여 명이 밖으로 빠져나갔다.(노블일지 230,2311쪽)
그의 목격은 3•1 만세시위의 빙산에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목격자의 기록이기에 귀하며 사료적 가치가 있다. 그가 3•1 만세시위의 주목적이 파리강화회의 앞으로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한 것을 통해 우리는 3•1만세시위의 배경과 동기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그의 기록을 통해서 유관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상징인 이화학당이 3•1만세시위 당일에 불참한 것을 알 수 있고, 3월 5일 시위에는 20여 명 정도만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아들 헤럴드가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목격했다"는 글귀에서 일제 탄압에 대한 그의 말없는 분노와 저항의식을 느낀다. 자기의 비서가 일경에게 구타당하고 구속되는 과정을 멀쩡한 눈으로 바라보며 분노의 파란 빛을 쏟았을 그의 고통과 아픔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는다.
그러나 역사교과서는 그 많은 기록 중에서 그 기록을 하는 집단에게 유리한 자료를 취사선택해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는 끊임없이 논란이 일어날 여지가 있다.
본대로 들은 대로 3•1만세시위의 기록을 담백하게 남겨준 매티 노블 선교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23.1.1. 주일에
우담초라하니
각주
1) 노블 일지 - 1892년에 남편 아서 노블 선교사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매티 윌콕스 노블이 목격한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 42년간의 기록에서 발췌하여 강선미와 이양준이 번역, 이마고에서 펴낸 책이다.
2) 관립학교 : 경기여중고 전신
3) 테일러 : 위의 기록만으로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 감리교 선교사로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시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아펜젤러 :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1902년 사망하였고 여기에 나오는 아펜젤러는 그의 장남 헨리 아펜젤러이다.
5) 해방가 : 1919년 3월 5일 서울 거리에서 학생들이 부른 노래.
내용은 불쌍한 조선 백성들 죽음의 장소에서 당신의 정의로운 손으로 구해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