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서부 전선과 베티고지,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9)
그 대표적 예가 바로 계웅산이다.
계웅산은 철책이 앞으로 당겨지기 전에는 GP였다,
그러다 지금은 일반전초 초소로 되어 그 곳에 올라서면 북쪽의 오성산이 잘 관찰된다.
이 계웅산은 우리 국군 2사단의 좌측에 미 25사단이 우측에는 미25사단 국군 6사단이 진출하는 김화-금성진격 작전으로 계웅산은 미 25사단이 진출하다 돈좌되어 우리 국군 9사단 1개연대가 들어와 계웅산을 탈취하여 넘겨주고 본대로 합류하게 된다.
국군 9사단은 '51.6월초까지 서쪽의 보개산 고대산을 공격하여 탈환하여 와이오밍선으로 진출후 작전지역을 캐나다 25여단에 인계하고 김화로 이동하였다.
사단은 '51.6월19일 미 제25사단의 계웅산 지역을 인수받아 터키여단 진지를 초월전진하여 계웅산을 탈환후에 미 제25사단에게 인계하고 '51.8월2일부터 포천 광천리에서 10월12일까지 8주간 부대훈련및 정비를 마친후 다시 철원으로 이동하여 미 제3사단진지를 인수받아 '52.10월의 백마고지 쟁탈전을 하여 승리한후 10월말에 다시 미 제3사단에 인계후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를 하게 되며 이때 30연대는 바로 국군 제2사단의 저격능선전투에 참여하고 본대는 11월25일 저격능선 진지를 인수받게 된다.
이 작전은 국군 2사단이 '51년 10월초순 미 제9군단의 중앙 좌익사단으로 김화 동쪽 송동으로부터 바조봉-승암고개-적근산 서쪽 두목에 이르는 주저항선을 형성 하고 있었다.
사단은 지난 6월 중순 이곳으로 진출한 이후 8월에 중공군이 점령한 734고지를 공격하여 탈취하고 9월초에는 이들의 공격을 격퇴한 바 있다.
그러니 여기서 앞서 말한 2사단의 공격속도에 대한 시기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출이 완료된 싯점은 6월중순이 아니고 6월말 즉 학도병 용사님들이 '95년도에 증언한 내용에 더 무게가 실린다는 나의 판단이다.
"전적비에서 만난 9사단 전우회 회장님"
계웅산은 그러니 미군이 터어키군이 그리고 우리 9사단이 전투하여 최종적으로 탈취한 곳이다.
2000년도에 강인원 9사단 참전전우회 회장님(지금은 작고)을 모시고 계웅산에 올랐다.
용사님을 만난 것은 백마고지 전적비에서다.
철원 대마리에 있는 백마고지 전적비에 올라서면 백마고지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1년에 적어도 4~6회는 현장에 가곤하는데 어느날 용사님 일행을 만났다.
용사님 증언은 고대산에서 1개중대가 거의 전멸했고 오르기전 지장봉 일대에서도 많은 피해를 봤다고 한다
그러다 명에 이거 이곳 계웅산지역으로 들어와 미군과 터어키군을 대신하여 공격하여 탈취하게 되는데 중공군이 계웅산 정상에 토치카를 구축하고 방어하여 육탄공격으로 이곳을 3~4회의 반복 공격끝에 탈환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미군에게 진지를 넘기고 백마고지로 가서 백마고지를 사수하고 또 다시 이곳에 들어와 그당시 국군 2사단과 임무 교대를 하여 저격능선 쟁탈전을 휴전때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 B고지 밑에 평지가 있고 내가 대대장 당번을 하면서 너무 많은 유해를 목격 했어요."
B고지란 지금 계웅산고지에서는 보이지않고 15사단 승리전망대에 가면 보인다. 그 이유는 당시 전투가 남대천을 연하여 공격 개시선이 있는 사선형 전투를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죽어서 내려오는지 그 좌측에서는 미군이 삼각고지 전투를 하고 있으면서 미군 포크레인이 한 대 들어와 대대장 지휘소 뒤에 임시 가매장 장소를 정해놓고 한열을 파서 묻고 다음에는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흙을 덮는 방식으로 유해를 묻었단다.
그러니 언젠가 말한적 있지만 시계가 없어 몇시인지 잘 모르는 판에 이곳 시체 더미에서 기어나오는 벌레들을 보면 시간을 알 수 있었다 한다.
그때가 '51.10월 중순이니 아침 저녁으로는 그래도 쌀쌀한 편이라 그 벌레들이 10시경 기어나왔다가 오후 4시경이 되면 들어가 보이질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펑펑 우셨다.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하신다. 그리고 얼마 안계서 운명 하셨다.
어떤 때는 방어선이 무너져 이곳 계웅산까지도 일시적으로 피탈 되었다가 ㅜ복하기도 했다.
그러니 유해가 산 정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르기 7~8부능선에도 많이 있다고 하셨다.
이때 이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부대의 한 부사관이 정상부근에 기관총진지같은 곳에 과거에 철책을 옮기면서 나온 유해를 가매장 했다는 증언을 듣고 현장을 확인하게 되었다.
용사님 증언으로는 산을 탈취하고 몇번의 중공군의 역습을 무리쳤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을 2001년도에 발굴하여 5구의 유해를 수습하였고 만년필 탄피 파편등의 유품을 동시에 수습했다.
하지만 아직 계웅산 7~8부 능선은 발굴 하지 못하고 있다. 그당시 철조마이 지나던 곳으로 미확인 지뢰지대라 하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다만 산 남쪽에서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는 산길이 있는데 우리는 철책을 따라 이동하여 내려서다 바로 길 안쪽에 개인호같은 것이 보여 흙을 긁어 내린 결과 정말 금방이라도 일어서 달려 나갈 것같은 용사님을 발굴했다.
옹벽같은 빗면에 기대어 수통도 그대로고 판쵸우의도 차고 탄티도 그대로 였다.
어느날인가는 철책보수 작전간에 유해가 노출 되었다고 해서 들어가 보니 민간인 무덤같은 모양이 있어 발굴을 보류하였는데 이 지역이 민간인 무덤들이 많아 보인다.
그리고 암정리, 계웅산 하단부 동쪽 지역에서 부대 진입로 공사간 유해식별로 현장을 발굴하여 '01년도에 3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천불산 동쪽 용양리에서 진지 공사간 유해가 노출 되었다하여 현장 확인 결과 주변에 오래된 관의 잔해들이 보여 정밀조사로 민간인 유해로 처리하였는데 이곳 일대가 산이 좋아서 그런지 옛날부터 묘자리가 많아 보인다.
부대에서 신고가 들어와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철책까지 가서 당시 개인호나 교통호를 실제 목격하고 탐사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주변에 그 오래된 왕묘같은 것들이 주변에 있어 건드리지 말도록 권고하고 철수한 적도 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계웅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다 무명용사의 비가 서 있고 이곳 병사들이 이곳을 지날때마다 섬짓하다 하여 내가 직접 발굴 했다.
2001년도 10월경인가 기억되는데 무슨 창고가 뒤에 있고 조그만 무덤이 있었다.
혹시라도 불발탄등의 위험이 있기에 병력을 산개 시키고 직접 삽을 들고 굴토해 들어가는데 정말 놀랐다.
"업드렷!"
나도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엎드려 귀와 코을 막았다.
그런데 아무런 굉음이 나질 않아 눈을 뜨고 살며시 내부를 바라보니 금빛으로 빛나던 것이 녹슬지 않은 실탄 그대로 였다.
한통은 탄통에 그대로 있고 한통은 개봉하여 있는데 자동화기진지로 2명이 근무를 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전사하여 유해도 그대로 있다.
자동화기는 보호 장갑판이 있는데 그 철판이 공요롭게 진지가 무너지면서 자연스레 덮어주는 효과가 있어 실탄이 하나도 녹슬지 않고 그대로 있다가 햇빛을 보니 번쩍 했던 것이다.
유해도 하나도 손상이 없이 백골이 되어 수습되었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지름길로 일제시대부터 전기철도가 개설되어 운용되었다.
근북면 유곡리 앞으로 해서 지나가는 철로가 지금은 폐쇠되어 운용하지 못하지만 그때는 교통이 아주 좋았던 곳이였다.
앞에는 오성산이 있고 반대로 남쪽에는 안암산등 산이 우뚝 솟아있어 아군의 감제관측에 불리했기 때문에 바로 유곡리에 임시 포로 수용소가 있었고 이곳에서 미군등 많은 인원이 수용도중에 전사하여 주변에 매장 되어 일부는 종전 후에 발굴도 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 갔다.
"유곡리에서 포로로 잡혀있던 참전용사님을 만났다."
이 분은 홍천에 살고 계셨는데 사실 탈북하여 내려와 외롭게 작은 집에서 보조금으로 살고 계셨는데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탐문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곡리라는 것을 알고 해가 바뀌어 봄이 오면은 함께 가기로 했으나 봄이 되어 찾아가니 운명하시어 버렸다.
지금 유곡리는 전후 반공마을이 되어 전역한 부사곤들중 일부를 선정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정확한 내력을 아는 분이 없다.
다만 소문과 일부 미군들이 들어와 유해를 발굴한다는 사실에서 내려온 이야기수준인데 바로 마을 서쪽에 있는 공동묘지같은 곳에 당시 괴질과 부상후휴증으로 포로분이 죽게 되면 옮기어 묻었다는 것인데 참 안타깝게 모든 묘를 파묘해 볼 수도 없고... .
지금 생창리 읍내리란 곳이 6.25전쟁 전에는 김화군 읍소재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6.25전쟁이후 별도 주민통제 계획에 의거 사라호 태풍의 피해받은 분들을 이주시킨 곳으로 토박이 분이 안계신다.
사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북한군이 밀려 올라갈 때 수많은 반공포로들을 데리고 가다 이곳 생창리 야산 굴(일제시대부터 반공호로 굴토함)에 집어넣고 집단학살하고 도망간 곳이라 아군이 진주하여 수많은 인원을 굴속에서 거내어 유족을 찾기도 했지만 또 많은 인원이 북한군을 따라 월북 하였기에 유가족이 없는 유해도 많아서 마을 입구 공동묘지에 집단 매장 되었다 한다.
현재도 그 굴이 존재하고 있다.
"삼각고지전투와 계웅산-오성산 전투간에 전사한 인원중 일부가 이곳으로 노무자들에 의해 운구되어 일부는 화장 되어 가기도 하고 일부는 그 공동묘지에 가매장 되는데 종전후에 미군들이 들어와 일부 미군을 찾는다고 했으나 아군을 발굴하는 행위는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이곳을 통과하며 혹시라도 그 유해를 찾으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어느날에 마을 입구 진입로를 확장한다 하여 현장에 가서 확인했으나 파편이나 일부 전투화 잔해는 발견했지만 참전용사라 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를 찾지 못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발굴 사상 최초로 방송사에 공개한 비무장 지대 유해 봉송 작전."
물론 이보다 더 먼저 21사지역 백석산 전방에서 "이태윤상병"의 유해발굴이 춘천 MBC에 의해 공개 되었지만 이는 방송국 인원이 카메라 줌으로 끌여당기고 우리가 촬영한 영상자료를 방영한 것이고 실제 허가된 곳은 이곳 통문이었다.
이 방송은 서울 MBC에서 외주업체에 용역을 주어 촬영되는데 매복 지점에 유해가 나온다 하여 나는 3명의 인원을 데리고 GP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전방에 적 오성산이고 삼각고지가 우뚝 솟아 우리를 감제관측하고 있다.
설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복잡한 심정이야 말 할 길 없다.
개활지에서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가운데 발굴이 시작 되었는데 나침판과 쌍안경 시계 그리고 m1틴피와 탄창등 수많은 유품과 2구의 유해가 나왔다.
이곳도 자동화기 진지로 판단된다.
짚차에 지피출입 깃발을 부착하고 철모에 방탄조끼를 입고 연대 수색대의 경계속에 발굴을 종료하여 나오는 순간은 너무도 짜릿했다.
그런데 이곳은 현재 북한군이 땅굴을 파고 있는 곳으로 추정하여 관심지역으로 분류하여 통제 되고 있는데 이 출입 통문에서 한 500m진출하여 우측으로는 미군비행기가 추락하여 조종사가 죽어 묻혀 있다는 제보도 있다.
가평 승안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분이 바로 이곳에서 살다 넘어온 분이 계셨다.
어린 마음에 비행기가 불에 붙어 떨어지니 달려가 보았는데 중공군이 달라붙어 조종사의 옷부터 시계 계급장등 모든 것을 선착순으로 가져가고 연이어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너무 냄새가 심하여 동네 사람들이 그 위치에 가매장 했다는 증언 이었다.
우린 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통문 입구까지 와서 지피 내부을 관찰하여 대략적 위치만 확인 하고 말았다.
전쟁동안에 이곳에 미군 지휘소와 보급시설이 들어와 장기간 있었다는 제보도 이어졌다.
전방 삼각고지에서 약간 차폐가 되는 곳인데 도로 개설과 땅굴 시추 작업을 위해 장비의 이동을 원활히 하려 도로 확장 공사를 하는데 엄청난 유품들이 쏟어졌다.
차량 크랭크축이며 박격포탄 박스며 별별 유품들이 땅속에서 나오고 뼈 조각들이 굴러다녀 실제 최초 이 도로 개설간에도 많은 유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되어 주변을 확대하여 탐사하였다.
그런데 거대한 마을 공동묘지로써 무덤이 큰 것도 존재하고 일대가 다 무덤 군이다.
드디어 길 옹벽에서 많은 유해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당시 발굴과장이고 좃팀에서 발굴하라는 참고보고가 왔는데 내가 직접 현장에 들어가 확인하게 되었다.
땅벌들이 난리치고 숲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지만 칡순을 거둬내고 보니 무슨 구멍같은 것이 보여 계단을 만들어 올라서 보니 통나무 관이 있다.
나는 술한잔을 따라서 올리고 흙으로 나머지 부분을 덮어 드렸다.
리 민간인 유해지만 전쟁의 상처속에 그 후속조치를 위한 공사에 노출된 것인데 그냥 말 수는없는 것이다.
"무명용사의 비"
바로 계웅산 전사면추진 철책 부근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나무로 "무명용사의 비'라고 씌여 있어서 우린 다시 발굴 팀을 투입하여 발굴작전을 실시 했다.
이곳에서 우로 돌아가면 바로 국군 2사단이 진격한 저격능선이 바로 나온다.
진출로 추가설치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열심히 발굴 하였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다.
아마도 이부근 어디에선가 유해가 노출되어 누가 이곳에 옮기어 매장한 것으로 판단 되는데 유해란 한번 매장된 곳에서 밖으로 나오게 되면 일반적으로 산소 흡입률이 빨라져 쉽게 부식해 버린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로써는 안타까움만 남기고 오성산과 저격능선 삼각고지를 바라보며 숨져간 용사님의 명복을 빌며 지피 밖으로 나와야 했다.
유곡리에서 안암산으로 철책 통로를 따라 오르다 순찰로 상에 유해가 노출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또한 유곡리 들어가는 입구 좌측산에도 많은 개인호가 있다고 지역 주민이 알려 주었다.
우린 일단 마을 입구 야산을 확인해 본 결과 많은 개인호와 교통호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지만 결정적인 흔적을 찾지 못하여 발굴작전은 보류되고 안암산 전방만 발굴을 개시 하였다.
철책이 연하는 곳에 개인호가 즐비하게 이어지고 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파보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식별된 유해는 여름철 비온 뒤에 경사면 한쪽이 무너지면서 노출된 것으로 우린 온전하게 수습하였다.
한편 미 제9군단의 우측방에는 국군 6사단이 진격하고 있었다."
사단의좌측에서 진출하는 미 제7사단이 화천-김화 도로를 따라 공격하고 작전지역의 일부를 국군 6사단에게 인계하였다.
사단의 7연대는 신읍리 643고지로부터 887고지 997거지 취봉 수리봉 방향으로 공격하고 19연대는 화천저수지에서 재안산을 넘어 당거리 방향으로 공격을 하게 된다.
"그 유명한 643고지 전투와 887고지 전투"
13번도로와 7번도로 좌우측으로 진격하게 된 6사단은 신읍의 643고지에서 미 제 7사단 17연대로부터 본인들이 3일간의 공격에도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측방으로 포위공격을 하였다.
지금 이 전투의 생생한 증언자가 화천읍에 거주하는 김달욱 전우회장으로 생존('19. 1현재)해 계시는데 몇번에 걸쳐 대면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여 현장 조사를 하였다.
지금 구만리 발전소 옆에 643고지 전투 전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만큼 치렬한 전투를 했다는 곳인데 우리는 탐사간 특별한 것을 찾지는 못했다.
물론 고지 정상은 개인호와 교통호로 전체가 덮혀 있지만 고지 전면에서는 전사자의 유무는 확인하지 못했다.
새덕이라는 곳으로 진입하여 주로 643고지 전방 종격실 능선에서 20여구 그리고 새덕이 일대에서 5구를 수습하였다.
여기서 우린 중요한 단서를 하나 간과 해서는 안되었다.
통상 우리는 유해발굴을 능선이나 고지를 연하는 곳의 개인호와 교통호에서 발굴 했지만 여기는 진격하는 기동로상에 갱니호나 교통호에서 발굴을 발굴 하였다.
그 이유는 참전용사님의 증언이 노무자들이 진격에 맞추어 들어가 전사자를 운구하거나 부상병을 후송하게 되는데 워낙 산이 촘촘이 계곡으로 둘러쌓여 있어 퇴각하는 적이 후퇴하면서 매복을 하다 기습하여 시신을 그자리에 놓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유해발굴을 능선이나 고지위로로만 할 것이 아니라 저변을 확대하여 발굴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대구에서 이곳 전투에 참가한 정시채 상사로부터 1개분대 매장한 곳이 있다는 제보다."
우리는 이분을 KTX로 서울역까지 오시게 하여 모시고 현장에 갔다.
887고지 바로 후사면이라 한다.
올라가 보니 수많은 개인호가 있고 약간 넓은 평탄한 지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곳은 이미 우리가 발굴하여 3구의 유해를 발굴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곳보다 좀더 낮은 곳이라 한다.
3일간 이곳 일대를 용사님을 모시고 탐사를 했으나 그 위치는 우리는 찾지 못했다.
지금은 887고지와 992고지 사이에 신병교육대에서 넘어오는 길이 개통되었다 수해로 엉망이 되어 차가 넘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 992고지에서 수리봉으로 수리봉에서 백암산으로 달리는 지름길 능선이다.
전사 책에는 바로 887고지에서 몇번의 주인이 바뀌는 전투를 실시하고 있을때에 우측의 19연대가 당거리로 진출하여 포위될 염려에 직면한 중공군이 백암산으로 후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0년도에 행정고시 합격한 정부 5급공무원의 현장 페험을 이곳 새덕이로 모셔 현장을 보여주고 공무원이 되어서 어느 부처에 근무하더라도 이 모습을 잊지말고 이 숭고한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리는 풍산리 우장동에 귀신산이 있다하여 현장 확인에 나갔다. 그리고 15번 도로를 따라 동촌리에도 들어갔다.
사실 이곳은 '51년도 중공군 4월공세 당시에 우리 해병대가 점령을 했던 곳으로 아마도 미군 폭격기에 의해 아니면 포병화력으로 508고지 일대 계곡으로 은신한 중공군이 죽었던지 아니면 중공군 5월공세를 물리친 6사단이 진격하여 화천댐을 점령하고 재안산으로 진출시 중공군이 죽었다던지 하는 곳으로 추정되어 더 이상 조사를 보류하였다.
국군6사단 포병이었던 참전용사 한상훈님의 증언에 의하면 6사단이 화천댐을 점령하고 북으로 진출하는데 중공군이 얼마나 죽어 있는지 길이고 논밭이고 동해안의 도루목이 밀물에 밀려와 해안가에 널려 있는 것처럼 있었다 한다.
그러니 그 위로 트럭들이 그냥 지나가고 포차도 그저 아무런 죄책감없이 무심코 지나다녔단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증오심이 지배하여 보이는 것은 죽여햐 하는 적의 모습만 보이는 법이란다.
한용사님은 그로부터 우리 전사자를 포차에 실어 이곳 풍산리 계곡으로 실고 들어오면 이미 노무자들이 나무를 해놓고 기다리며 시신을 내리기가 무섭게 불은 올라가고 주변에는 목함이 즐비하게 준비 되어 있었다 한다.
여기서 용화산에 대한 웃기는 설화를 하나 소개 하고자 한다.
용화산은 화천과 춘천을 구분하는 가장 높은 산으로 878m가 되는데 그 수직암벽의 높이가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길곳으로 알고 있다.
이곳은 삼한시대에 예맥족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며 이곳에 올라서면 팔방이 훤히 다 뚫려 있다.
난ㄴ 이곳에서 대대장을 할 때에 마음이 심난하면 이곳을 오르고 하여 3년이란 시간에 열번 이상을 오른 것 같다.
꼭대기에 올라서면 할매바위가 있는데 마치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모양으로 바위가 홈이 생겨 있다.
이 모습을 후세에 사람들이 전하길 할매신이 가끔씩 내려와 소변을 보다 보니 생겼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이곳을 넘으면 용호리 오음리일대로 월남전 참전용사님 훈련소가 나온다.
"중공군 주화 획득하여 돈으로 바꾼 아저씨."
이 용화산이 전쟁터란 것은 나도 유해발굴 업무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용화산을 깃점으로 서쪽으로는 부다리고개를 지나 575고지에서 470고지 모래재로 올라 내려서면 바로 100여구의 엄청난 유해를 발굴한 원천리 건는들이 나온다.
이 575고지 일대는 국군 5사단이 1.4후퇴 당시 35연대가 방어를 하던 곳인데 지명상으로는 춘천시 사북면 송암리다.
그런데 이 지역분들이 마을회관에서 들려는 이야기가 이 고지일대에 비행기가 아군을 폭격하여 많은 피해가 났다고 소문이 이어진다고 한다.
우린 그곳 일대를 탐사했지만 중대규모로 점령할 고지가 이니고 그렇게 많은 개인호도 발견되지 않아 1차 탐사시에는 크게 고려하지 못했다.
그런데 5사단 참전용사님이 실제 이곳에서 비행기 오폭으로 동료들이 다 죽었다하여 재 조사를 실시하여 '12년도에 발굴 결과 6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대부분 유해가 산산조각이 나버려 개체분류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것은 비행기 폭격으로 너무 큰 충격으로 유해가 조각조각나 주변에 흩어지나 보니 개인호나 교통호와는 무관하였으며 솟아오는 흙으로 덮혀 있다보니 우리도 찾기가 싶지 않았다.
용화산에서 진지 공사간에 유해를 목격했다는 당시 근무한 제대인원의 제보로 1구를 발굴했다.
계속되는 이곳 간동 오음리지역의 탐사및 탐문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우선 월남 파병의 장소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한 때는 남부러워 할 것이 없는 부촌이기도 했단다.
대한민국의 떠돌이 장사꾼은 다 이것에 모여들었다 해도 고언이 아니란다.
60년대 중반에 우리사회의 실상은 지금 북한과 같은 수준이었다.
보따리 장사로 부터 술집이며 아가씨만도 많은 숫자가 이곳에 몰려들어 생계를 이어갔던 뼈아픈 추억의 장소다.
전시에는 이곳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중공군의 지휘소가 있었다.
용화산 오봉산 죽엽산 병풍산등 800고지대의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나름 먹고 살기에는 평화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이 나고 어수선해진 마을에 중공군이 진을 치고 대부분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 몇이 남지도 안했는데 중공군이 길을 모르니 길을 알려주어야 하는 역활을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해야 했다.
"엉터리 길을 알려주고 도망친 소년!"
양아저씨는 그 당시 16살이었다.
그런데 체구가 작아 14살이라 하고 집에 남아 있는데 하루는 인민군이 중공군을 데리고 나타나 오늘밤에 할 일이 있다는 곳이다.
"동무, 오늘밤에 이 사람들을 안내해서 홍천까지 함께 가기요."
"홍천을 모르는데 어떻게 가는지 알려 주세요."
"동무가 알아서 하기요, 잘못되면 죽는다는 것만 알기요."
그러니 어떻하겠나 명령에 따라야 했다.
밤이 찾아와 앞장을 서서 배후령을 넘어춘천 동면 지내리로 해서 느랏재 고개방향으로 산길을 이용하여 걸어간다.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라 몇명의 안내원이 함께 가기에 나름 이야기도 주고 받으며 걷는데 도저히 발이 아파 걷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 산골로 들어서서 그만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를 달려 되돌아 보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산속으로부터 아침시간을 이용하여 밖으로 나와 다시 오음리로 돌아와 몇알을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 산에서 숨어지내다 집으로 들어와 재대로 먹을 것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다시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고 공포심이 넘치는데 이번에는 중공군의 짐을 지고 백치고개 우측 부용산(882m)으로 갔다.
오봉산 부용산 종로봉으로 거의 횡격실 능선으로 이어지는 이곳이 중공군의 마지막 방어진지 였다고 한다.
지금은 소양댐이 있지만 그때는 소양강으로 여름이 아니면 도섭이 가능한 곳으로 중공군이 앞에 있는 홍천 북방의 가리산일대 전투를 하다 바로 밀려 올라와 방어를 한 곳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산들이 38도선에 있던 산으로 최초 전투에서도 이곳을 방어하던 국군 6사단과 북한군 간에 전투가 있었고 1.4후퇴시에는 소양강 남쪽에서 우리 국군 8사단이나 3사단이 반격하여 일시적으로 오항리와 추전리일대를 점령도 한 곳이기도 하다.
추전리 662고지에 올라서면 지금도 38도선 최초의 철조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내평리에 경찰지서가 있었고 우체국도 있었다 한다.
그래서 해방이후에 남북으로 갈라져 왕래가 곤란할 때는 우체부가 이곳 철조망에 편지를 꽂아두면 북쪽에 일가들이 살며시 내려와 편지를 가져가기도 하고 애경사때는 왕래도 어떻게든 이루어졌다고 하니 참 재미있는 곳이다.
우리는 간동 오음리일대에서 '07년도 부터 발굴작전을 실시하였다.
최초의 제보가 바로 중공군을 엉터리 길로 알려주고 도망친 분이 직접 본인의 집터에 죽어간 유해를 묻었다 해서 시작 되었다.
'51.4월 어느날 도저히 살기 힘들 것 같아서 아버지와 식구들이 모두 피난을 떠나 제천까지 걸어서 갔다가 '51년 6월에 다시 들어 왔다고 한다.
들어와 보니 집이 완전히 폭격에 불타버리고 반만 남았는데 들어가 보니 집안에 군인들이 수없이 죽어있어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신을 아버지와 힘을 합쳐 지게에 지고 바로 산밑의 조그만 개울이 흘러 가는데 그곳 너머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죽은 인원들이 바지도 입고 있고 어떤 이는 군화를 신고 죽기도 했는데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중국 은화가 50여개가 넘어서 그걸 나중에 돈으로 바꾸어 땅도 사고 집도 다시 건축하는데 사용했다고 하며 시신이 묻혀진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런데 아저씨 손이 조금 어색해서 사연을 들어 보았다.
"탄피도 캐고 돈벌이 하려 산을 돌아다니다 불발탄이 터져 그만 왼손가락을 잃었다."
그 당시는 돈벌이 하는 것이 별로 없고 식구는 많은데 그래서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않고 달려 들었는데 많은 인원이 불구가 되기도 했단다.
손이 그렇게 되어 군대도 못가고 집에서 지게지고 일밖에 할 거시 없는데 전쟁의 상처가 너무 커서 시집장가를 들었으나 얘를 낳지 못하는 인원들이 많이 생기어 소문으로 사람의 해골을 고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에 실제 두개골을 파서 돈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아저씨 이야기로는 본인은 옆에서 지켜봤으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은화 5개와 5구의 유해를 발굴 하다."
우린 아저씨기 시신을 묻었다고 하는 산비탈을 야간에 라이트까지 밝혀놓고 발굴 작전을 했다.
우기철이라 파다가 그만두면 혹시라도 수해에 밀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촌리 마을회관에 들어가 주민간담회를 하는데 간동중고교 입구가 당시 많은 전사자들이 모여 있었다는 증언과 유촌교 바로 건너 우측 밭둑에 학도병들이 죽어서 군인들이 매장하고 갔다는 이야기를 입수 하였다.
"일렬로 매장된 학도병 유해 6구."
우리는 '07년부터 발굴작전을 개시하여 밭둑에 일렬로 가지런하게 매장된 유해를 찾았다.
발목에 차는 고무줄이며 "중"자가 새겨진 뺏지도 나오고 만년피로 나온다.
이 만년필은 거의 학도병 유해에서는 나오는 유품이며 시계도 나왔다.
그당시 시대상이 시계는 아무나 찰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들어가는 입구는 그동안 객토작업등으로 변하여 찾을 길이 없다.
그로부터 지역주미늬 제보가 잇다라 나와서 야산이 아닌 동네 인접에서 30여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북한군 장군묘에 얽힌 비화"
이곳에는 북한군 높은 사람의 묘가 있다.
사람들은 장군묘라 하며 한때는 누군가 헌화를 한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하여 관심지역이기도 했다.
그런데 누가 이 묘를 만드는데 관여한 사람은 찾아내지 못했다. 아마 알고 있거나 본인이 했다할지라도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묘한 것은 추석 때가 된다던가 하면 누군가 아무도 몰래 벌초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하는걸까, 북한의 끄나풀이 하는걸까등의 오갖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가 이 소문을 듣고 현장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동네분이라며 누군가 나에게 나가와 귀띔을 해준다.
"북한군 장군이 아니고 장교가 묻혀있다 파 가고 없다" 한다.
시기는 모르고 왜냐면 모두가 피난을 나가고 극히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수복이 되고 나서 파갔다고 한다. 그러니 휴전협정 당시에 유해를 교환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해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가는데 그걸 파 볼 수는 없는 상태다.
저기 창녕의 구진산에도 실제 커다란 장군묘가 있는데 가운데가 굴토 되어 있다.
이곳은 휴전협정 당시에 북한측의 요구로 시신이 발굴 되어 북으로 갔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던 미 제24사단장 딘소장과 맞 교한했다는 설도 있다.
말이야 어쨋든 거의 50년을 넘어오면서 누군가 벌초를 하고 때로는야생화를 갔다 놓는데 누군지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화천읍, 여기는 노무자사단의 집결지였다."
화천은 전쟁중에 완전히 다 타버려 아무도 살 수 없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51년 중공군 5월공세가 끝나고 아군이 진격하는 과정에 푸퇴하는 중공군을 비팽기로 추격하며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포벼의화력이 불을 뿜어서 흔적조차 없는 읍내로 변한 것을 아군이 불도저로 밀어서 새로 경지를 조성하고 이곳에 노무자사단 집결소가 위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철조망으로 부대구분을 하고 전방에 지원되는 군수물품이 대기하고 이동외과 병원이 있어 부상자들이 들어와 진료를 받기도 하고 여기서 다시 육군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때론 전방에서 실려온 시신을 북한강가에서 화장하여 처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 노무자 집결소에서 근무한 참전용사 분을 파주 월롱 부곡리에서 만나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당시 용사님은 노무자 대대 인사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밤이면 트럭들이 수 없이 들어가 들어가고 새벽녁부터 차들이 다시 들어 오는데 모두가 시신이었다 한다.
"볏짚처럼 쌓여지는 시신의 모습"
차량들이 한번 움직이면 너무나 많은 시신들이 실려와 그냥 노무자들도 아무런 의식없이 차에서 내려 한 곳에 옮긴다.
어쩌다 그 속에서 살아난 군인들이 사려다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귀를 울리기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언제 저런 신세가 될지 모르는 위치라 누구도 아무런 말도 없이 통제하는 간부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기계였다고 한다.
그러니 누가 누군지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나에게 되 묻는다.
그러니 지금 화천읍은 전후에 군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을 대상으로 땅을 할당했다고 한다.
전쟁의 흔적조차 없이 구획정리된 이곳이 그 많은 전쟁의 전사자 영웅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주위의 5번도와 7번도로가 주로 사용된 도로로써 읍에서 신읍리 노동리 부촌리를 거쳐 사방거리에서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주파령을 넘어 추동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도로 이고 사방거리에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5번 도로를 딸 말고개에 이르게 된다.
가는 도주에 파포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461번 도로를 따라 봉오리와 다목리로 이어진다.
그러니 화천도 교통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주파령을 넘어서면서 우측은 백암산이고 바로 앞에 흑운토령등 '53년 중공군의 7월의 마지막 최후공세가 있었던 금성천이 나오게 된다."
주파령 좌측으로는 800m고지군의 장고봉이 있고 적근산으로 이어지는 산악지형이다.
이곳으로 진출한 미 제9군단은 서부전선에서 미 제1군단이 연천-철원 도로 및 철로 축선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주저항선을 10km 끌어올리는 Commando작전을 시작하자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도 방어선을 개선함은 물론 적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위해 '51.10.8일에 금성진격 작작전계획을 승인받아 시행하게 된다.
당시 제 9군단은 철원 동쪽 중산리-김화-화천 북방 적근산-백암산-북한강선에(와이오밍선)미 제25사-국군 제2사- 미 제24사-국군 제6사를 배치하고 미7사를 예비로 하고 있었다.
6월말 이곳으로 진출한 이래 약 4개월에 걸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중공군 또한 제 20병단 제67군이 적근산 북쪽 백암산 북쪽에 강력한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미군은 금성을 확보함으로써 이곳에서 전략적 가치가 가장 큰 오성산(1,062m)에 대해 위협을 가함으로써 철의 삼각지대 통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전략적 관점에서 우선 금성천을 확보 하기 위해 제1단계 목표선을 하소리-풍동리-죽동-여문리-금성천 하구(노메드 라인)설정하고 10월13일 공격을 개시하여 3일만에 확보 하였다.
군단은 다시 금성 남쪽 3km까지 진출하기로 하고 10월17일부토 공격을 개시하여 하소리-외야동-봉화산-교암산--성동리-금성천 하구를 연하는선(폴라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2사단은 10월13일 공격을 개시 하였다.
하소리-교전리-월봉산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주공인 제17연대가 미 제25사로부터 지원된 전차 1개중대의 지원하에 북정령에서 월봉산 지역으로 진출하고 조공인 32연대는 우측에서 492고지와 600고지의 적을 포위 격멸하고 예비인 31연대는 주 방어선을 바어하다 사단 서측방으로 진출하여 제17연대의 진출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정령 바로 밑의 492고지일대와 600고지는 제 32연대가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비행기 폭격과 포병화력, 화염방사기를 사용하고 육탄으로 돌진하여 수류탄 투척으로 점령 하면서 120여명을 사살하고 84명의 사상자를 내는 악전고투 끝에 점령하게 된다.
제17연대는 전차 1개중대의 지원하에 북정령과 462고지를 공격하면서 특히 462고지에서 적이 강력한 저하을 하여 전투기 폭격과 포병화력을 퍼부으며 진출하여 적 103명을 사살하면서 점령하게 된다.
사단은 바로 2단계 작전에 돌입하여 10월17일 부터 폴라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18일 목표선에 도달하게 된다.
한편 국군 제6사단은 금성천과 교암산 진출을 위해 '51.10.13일에 공격을 개시한다.
제6사단은 군단의 우전방 사단으로 백암산을 방어 중이었다.
좌로는 미 제24사단이 우로는 미 제10군단의 좌익 국군 8사단이 인접하였다.
이당시 중공군은 제199사단으로 금성천 북안의 585고지-여문리-529고지선에 주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1개연대로 그 남안의 585고지-여내골-462고지에 경계진지를 구축하였다.
따라서 제6사단은 '51.10.13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죽동-여문리-금성천입구를 연하는 노매드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수령 하였다.
사단은 좌익에 7연대 우익에 19연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우측의 19연대는 462고지에서 무려 149명의 사상자를 내고 적 404명을 사살하면서 진지를 점령 하였다.
조익의 17연대는 강을 도하하여 551-552고지선에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적 374명을 사살하며 진출한다.
반면에 19연대는 계속되는 공격에도 관망산 529고지는 점령하지 못한체 노매드선진출을 완료한다.
그러나 사단의 최종 목표는 교암산으로 폴라선인 교암산-송동리선을 확보하기 위해 2연대가 그 교두보인 585고지를 공격하고 19연대는 우측을 엄호토록 하였다.
하지만 3일차인 19일에야 당시 선봉인 2대대의 50%병력이 손실을 입고 대대장은 후송되는 가운데 585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처음 지급된 화염방사기"
적의 특화점이 워낙 강력하여 제대로 진출을 못하는 가운데 이때 처음으로 화염방사기가 지급되어 57mm무반동총과 60mm 박격포 , 수류탄을 들고 백병전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21일에야 교암산 진출을 완료하여 임무 달성을 하게 되며 이때 군단의 지시로 좌측 미 제24사단에 교암산을 인계하고 미 제10군단 좌익인 국군 제8사단의 서측연대(제21연대)를 배속 받아 만곡부에 우람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949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여 용호동-949고지-973고지-석장동을 잇는 게리선을 확보하여 양 군단간의 전선을 완만하게 정리하게 된다.
"949고지 진출간 나타난 공산군의 천일공로할 만행!"
사단은 제8사단 좌측지역을 인수하여 제19연대가 949고지를 공격하게 되는데 능선을 진훌하는과정에 포로가 된 우리 국군을 나무가지에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아 죽여놓는가 하면 심지어는 가죽을 벗기어 나무가지에 걸쳐놓고 물러나는 비극적인 만행이 게속 되었다.
1,000m가까운 고지 능선에서 어떻게 전사자를 처리할 것이며 부상자를 처리할 것인가.
뒤따르는 노무자부대원들이 죽자사자 임무를 수행하지만 계곡에 잠적한 적군이 나타나 역습을 하는 관계로 제대로 유해수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다.
당시 19연대 제 2대대 김기헌 참전용사님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다.
"'51.11월의 전투에 전사자는 중공군보다 아군이 더 많았던 기억이 나며 전사자들의 모습이 흡사 개미떼가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전사에는 아군전사 103명 부상 382명이고 적 사살은 884명이며 124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술되고 있다.
"발굴된 300여구의 유해는 적군일까 아군일까?"
그러다 이곳 전투는 몇번의 부대 교대가 이루어지고 다시 제6사단이 교암산 지역으로 들어와 중공군 최후 공셀르 맞이하여 전투를 하면서 좌측에는 수도 사단이 우측에서는 8사단과 3사단이 그리고 5사단이 병해 퇴각하여 금성천 이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 이 흑운토령과 백암산이 적에게 일시적으로 피탈 되었다 재 탈환하게 되는데 고지나 능선마다 개인호나 교통호가 즐비하여 어디고 파면 유해가 나오는 곳이 되었다.
규모가 얼마며 얼마의 숫자가 매장 되었느냐는 것은 정말 숫자에 불과 하고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만도 흑운토령과 칠성전망대 우측 819고지 일대에서는 300여구가 발굴 되었다.
지금도 미확인 지뢰지대를 개척하고 땅을 굴토하면 유해는 나온다.
그런데 중요한 변수 하나가 중공군이 마지막 전투로 이곳까지 밀어붙이고 다시 금성천을 넘어 가는데 미쳐 본대에 합류하지 못한 중공군이 골짜기마다 배회하고 있어 그저 총도 없고 우왕좌왕하며 몰려다녀 아군이 맘대로 죽이고 살리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백암산이 핏빛으로 물들며 우리 국군5사단과 6사단이 탈환했다고는 하는데 그 주도권은 우리가 잡고 있었기에 아군의 유해처리는 그런대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북한강 지둔지 이야기"
우리는 북한강에 미군이 단정을 이용하여 차량과 인원을 옮기려다 전복되어 미군병사가 순직했다는 곳을 찾으려 화천군과 협조하여 파로호 선착장에서 순시선을 타고 평화의 댐 밑까지 정찰을 하게 되었다. 차로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을 우리는 계곡마다 들어가 혹시나 민가가 있을 경우에 올라서 즈언을 들어보려 했다.
두류봉을 돌아서 오음리에서 메네미 고개를 넘어 후동에 이르는데 이곳 둔전밭에도 가 보았고 계속 진출하여 평화의 댐 밑에서 돌아 비수구미 방개 법성등 사람이 있는 곳은 다들어 가 보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옛날 6.25전쟁 당시부터 살아온 사람이 있는 곳은 비수구미에서 간이 식당을 하시는 사장님과 지둔지에 어른이 계셨다.
그러나 비수구미에 계신분은 어려서 잘 모르고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로 이곳 북한강에 그 당시는 겨울에 얼음이 얼면 땡크가 지나가도 꺼지지 않는다는 말과 실제 전쟁때 강을 이용하여 많은 중공군이나 북한군이 움직였다고 한다.
더욱이 서울의 마포나루에서 소금배가 닻을 달고 노를 저어 이곳으로 해서 내금강지역으로 올라가 장사를 했다고 하니 놀랄 노릇이었다.
"사람을 잡아와 구워 먹고 가는 공산군"
그런데 어느날에 몇몇의 군인들이 사람을 묶어서 데려오고 일부는 나무를 해서 강가에 깔아놓고 불을 피워서 잡아온 사람을 그 속에 밀어 넣어서는 모여 앉아 뭘 먹고 가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그게 무엇인지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사람을 구워서 고기 대용으로 먹었다고 한다.
과연 그렇 수 있을까 의아심이 생기지만 우린 눈동자만 커지고 우울한 모습속에 나와서 방개 지역으로 향했다.
옛날 이곳에는 분교가 있다 학생이 없어 폐교 되었고 지금 이화여대 하계별장이 이곳에 있다.
이곳 일대 어디에선가 미군 차량이 전도 되는 사고가 있었다고 자료에는 나와 있는데 지금 수심이 30m는 된다 원래 화천댐이 건설 되기 전에도 10m는 되었다고 한다.
몇번이 수중 탐사를 미군들과 하다 그 징후를 찾지 못하고 우린 임무를 다음으로 연기해야 했다.
"권총찬 군인들이 들어와 경례하고 갔다."
지둔지에 들어가니 밖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계곡을 끼고 그런대로 일정한 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안내한 아저씨는 이곳에 사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원래 이곳에 살다가 잠시 육지로 나가 생활하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전쟁당시 나이가 12살 이어서 나름 기억이 정확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83세의 나이에도 거뜬하게 산밭을 올라 우리를 안내하시는 모습이 등신불에 나오느나 안내자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를 올라가니 밭의 끝 부분인데 울창한 수목을 해집고 들어가니 많은 무덤군이 있었다.
아마도 그 옛날에는 이곳에 그래도 사람이 조금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느 중앙을 가리키며 이 일대가 바로 6.25전쟁중인데 권총을 찬 높은 분이 가운데에 서고 옆으로 군인들이 서서 경례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사실 이곳은 북한군이나 중공군도 들어와 머무른 적이 없다고 한다. 주로 동계에 저 밑으로 강가를 따라 이동해 올라가고 내려오는 모습은 보았지만 이 곳으로 올라와 전투행위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리 전사에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국군 6사단이 '51.6월초에 백암산으로 진출하면서 이곳을 지나는 것이고 그 앞에는 '51.4월에 우리 해병1연대가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이곳 화천댐을 넘어 재안산 밑의 지금 포병사격장이 있는 일산까지 진출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성격을 알 수없는 유해매장이라 조심스레 접근해야만 한다. 그래서 보류지역으로 관리한다.
지금부터는 중서부 전선의 서쪽인 영평천 북방 전투로 탐사지역을 옮겨 보고자 한다.
이곳은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이 '51.5.20일에 문산-포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캔사스선(38도선)상의 영평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제1사단을 문산축선에 , 미 제1기병사단을 동두천 축선에, 그리고미 제25사단을(터키여단 배속)을 포천 축선에 투입하여 3개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5월27일에 임진강-적성-전곡-영평-연곡을 연하는 캔사스선에 진출한다.
이에 따라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이 선의 요새화와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북쪽에 유리한 감제고지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유엔군과 미8군은 5월 말 이 조치의 일환으로 적 춘계공세 이전에 확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하는 와이오밍선을 확보하기 우해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에게 와이오밍선으로 공격을 하도록 한다.
바로 이 작전의 명칭이 "말뚝을 박듯이 전선을 튼튼히 한다는 의미에서 '파일드라이브'"라 명명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은 연천-철원-김화로 진격하고 미 제9군단은 김화-화천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미 제1군단의 철원-김화 진격전"
미 8군사령부는 이 작전의 중점을 미 제1군단 지역에 두고 미 제10군단에 배속 되었던 국군 제9사단과 미 제3사단을 '51.5.29일부로 미 제 1군단으로 배속 전환 시켰다.
이에 따라 군단은 국군 1사단을 임진강 남쪽에, 미 제1기병사단(영 29여단배속)을 전곡 남쪽에, 구군 제 9사단을 영평 북쪽 누대리에, 미 제3사단을 운천 남쪽에, 그리고 미 제25사단(터키여ㅏㄴ 배속)을 도평리 일대에 배치 하였다.
"국군 제 9사단의 진격"
여기서는 주로 철원 -김화로 진격하는 사단에 대해 우리의 탐사과정을 알아보려 한다.
국군 제 9사단은 향로봉-지장봉을 연하는 산악 도로를 따라 고대산을 , 미 제 3사단이 운천-평강 도로를 따라 철원을, 그리고 우전방 미 제 25사단이 도평-금성도로를 따라 김화를 공격 하였다.
"전사와는 너무 상이한 지장봉-고대산 진격전"
전사에 지금의 포병 사격장이 있는 곳에서 북으로 진출하는데 지장봉 일대와 지장봉에서 고대산에 이르는 402고지 638고지군에서 치열한 격전이 있었다고 기록 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대광리에서 고대산, 내산리에서 지장봉을 넘어 삼율리, 금학산과 고대산 중앙에서 고대산, 금학산을 2회 탐사하고 우리 팀과는 내산리에서 지장봉으로 올라 다시 내려서서 종자봉으로 해서 내려오는 구간을 2회씩 탐사하였다.
하지만 지장봉 일대는 좁은 공간에 큰 전투를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였다.
다시 지장봉에서 402, 638고지 구간도 전투를 하기에는 부적합한 경사도와 실제로 이 일대는 전투 흔적이 그렇게 많이 없었다.
하지만 종자산 일대는 훨씬 넓은 공간에 어느 곳 보다 많은 전투 흔적이 남아 있으나 접근 하기가 곤란한 곳이다.
내가 만났던 운명하신 전 9사참전전우회 강회장께서도 많이 희생자가 발생한 곳은 고대산 정상과 3번도로로 내려 서기전 기습으로 5부능선에서 희생이 되었다 한다.
또한 고대산 정상에서 만났던 어느 9사단 참전용사님은 펑펑 울면서 전우의 이름을 불렀는데 고대산과 금학산 어간에서 모여 있다 기습을 받아 다 전사했다고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려 상노리 지역과 동송지역을 탐문했으나 시원한 답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지역주민들이 담터계곡으로 들어오는 입구와 정상어간에 수복후 들어와 보니 많은 유해가 돌무덤속에 그대로 있었으며 고개 넘어 지금 사단 유격장 일대에도 유해가 많아 도로 확장이나 수해 복구시에는 많은 유해를 과거에느 처리했다고 한다.
"장승천 전투와 터키여단"
터어키 군은 북진시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과 군우리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부대였다.
하지만 1.4후퇴 이후 '51.1월 말에 용인 김량장 전투에서 500여명이 중공군을 사살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또한 재 반격간에도 관악산 좌측 수리산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부대였다.
서울 수복후 캔사스선 진출에 따라 4월에 이곳 연천 신서면 대광리 541고지와 425고지 다리미 고개 정상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여 좌측에 필리핀 부대와 미 제3사단 , 프랑스 군대등이 조직적으로 철수 하느데 기여하고 축차적 철수 과정에 가치항에서 산악지역에서 전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승천 전투 기념비는 잘 세워져 있으나 실제 중공군 1,000여명으 ㄹ사살하고 터어키군 66명 전사에 105명이 실종된 곳치고는 그 흔적이 너무나 없다.
설마리 지역에서 영국군 황실대대가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3일간 지탱한 곳은 그래도 전투 흔적이 중성산등에 많이 남아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추측건데 적에게 포위되어 건재단위의 전투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용맹스런 전투정신으로 싸웠다고 표현하고 싶다.
"창수면 고소성리 일대에 전투 흔적이 많았다."
우리는 이쪽일대의 보장산, 불무산, 고남산 , 향로봉, 금주산, 관모봉등 고지군은 다 올라가 탐사를 했다. 하지만 전투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일대는 미군 제 25사단과 이 진격한 곳이라 미군은 원래 화력으로 초토화 시키고 진출하는 작전의 성격상 중공군이 아니면 그렇게 개인호를 구축할리 없다고 본다.
하지만 고소성리와 백의리, 오가리 일대에 가서 지역 탐문을 해 보니 중공군이 정말 많이 죽었고 이를 미군같은 경우는 진출에 장애가 되니 도져가 나타나 영평천에 밀어 넣어 버렸다 한다.
따라서 이 일대에서 전사한 국군은 카츄사나 노무자가 될 것이며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닐 것이라 판단 된다.
우리는 '09년도에 고소성리 방아다리 일대 고지군에서 13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중공군의 유품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길 주변에 매장된 유해와 지형 변화"
고소성리에서 오가릴로 강볍 북로를 타고 오다 보면 중간쯤에 그러니까 보장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에 모텔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도 길을 내면서 사실 그 주변이 유해 집단매장지인데 별 조치 없이 땅을 매립하고 파내고 하는등 많은 변화로 지금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