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벗기
이삭빛
그늘진 벽에 붙어 한 계절을 견뎠던
바랜 옷 한 벌을 두고 떠납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나
스스로 안에서부터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배웠습니다.
단단함은 한때 나를 보호했으나
이제는 나를 가두는 벽이 되었기에
살점이 찢기는 고통이 아니라
더 넓은 허공으로 나아가는 가벼움이라 믿으며
마른 껍질 속에 고여 있던 어제를
가만히 부려놓습니다.
보십시오
흉터 하나 없이 빠져나온 투명한 기억들이
햇살 아래 얼마나 눈부신지
죽어야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누군가 지어낸 신화가 아니라
제 몸을 부수고 나간 벌레의 젖은 날개 위에
새겨진 정직한 문장입니다.
떠나온 자리는 비어 있으나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날아오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무구한 몸으로
나는 다시 나를 시작합니다.
버려진 허물은 바람에 맡기고
나는 오직 바람이 가리키는 곳으로만 걷겠습니다.
[시평] 자아의 파쇄를 통해 완성되는 눈부신 비상
시평 윤정 문학평론가
헤르만 헤세는 저서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삭빛 시인의 「허물벗기」는 이 존재론적 투쟁과 해방을 정갈한 언어로 형상화한다. 시인은 안주라는 단단한 벽을 스스로 허무는 과정을 가벼움으로 명명한다. 이는 독자에게 생의 전환점에 필요한 용기를 선사하는 지점이다.
이 시에서 '허물'은 과거의 영광이자 상처이며, 성장을 가로막는 낡은 시대의 수의(壽衣)와 같다. 시인은 자신을 보호하던 견고한 껍질이 어느덧 감옥이 되었음을 통찰한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깨달음은 내면의 의지로만 가능한 진정한 독립을 의미한다. 어제를 부려놓는 행위는 더 큰 자아를 맞이하기 위한 성스러운 제의(祭儀)다.
특히 젖은 날개 위에 새겨진 '정직한 문장'이라는 표현은 압권이다. 이는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성장은 허구임을 일깨워주는 투명한 훈장과 같다. 시인은 죽음과 재생이 신화가 아닌 자연의 순리임을 벌레의 변태 과정을 통해 증명한다. 여백을 결핍이 아닌 '날아오를 수 있는 통로'로 치환하는 역설적 사유는 시의 철학적 깊이를 더한다.
결국 이 시는 오직 바람이 가리키는 곳으로 걷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수렴된다. 과거라는 낡은 옷을 벗고 '무구한 몸'으로 다시 시작하는 시인의 발걸음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허물벗기」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이들에게 지금의 아픔이 가장 정직한 비상의 과정임을 나직하고 품격 있게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