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가 없으면 재미 없지 / 정희연
사무실 창문 너머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에 몸통은 병들어 해지고 부딪히고 까여 상처투성이로 볼품이 없다. 본연의 가지도 잃고 곁가지로 다시 생명을 이어 간다. 겨울 가뭄과 뜨거운 여름을 잘 견디며 작년과 비슷하게 열매를 맺었다. 업무를 보며 시시때때로 눈을 맞춘다. 벌써 일곱 번째 계절을 같이하고 있다.
감나무가 다가온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내가 없다. 안개 사이로 연녹색 실루엣이 보인다. 가까울수록 도드라지게 드러난 홍시가 눈에 들어온다.
저 친구 말이지! 무엇이 그리 할 일이 많은지 너 다섯 시가 되면 눈을 떠. 이것저것 생각하지도 않고 화장실로 가면서 뱀이 허물을 벗듯 옷을 던지고 샤워기를 틀어. 다음은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해, 하루만 깎지 않아도 길게 자라는 구렛나루 와 턱밑 수염 때문이지. 잠에서 깨려고 더 집중하는지 모르겠어. 다음은 가볍게 샤워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는 데까지는 채 10분이 안 걸릴거야. 그러고선 사무실로 출근하지 문 하나를 열면 사무실이고 숙소야.
그는 지금까지 주도적으로 살지 못했다고 생각해. 스스로 일하기보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어. 그러다 결혼해 책임질 일이 생겨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거야. 2년 전부터 경제 공부를 시작했어. 먹고사느라 바빴는지 안중에도 없다가, 코로나 19로 주식 값이 바닥을 찍은 다음 하늘을 뚫을 기세로 주식 열기가 뜨거울 때 주식 시장에 접어들었지. 역시나 개미(주식 시장에서 개인이 투자하는 사람)였던 거지. 주가가 높을 때 뛰어드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었어. 3년째 내리막길에서 허둥대고 있다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유튜브에도 한참 열을 올리더니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며 잠시 멈추더니, 가족 카톡에 금융 지식을 정리해 나가고 있어.
또 하나의 관심 분야는 책 읽기와 글쓰기야. 달라진 점은 알고 모르는 것이 두리뭉실했던 것이 글을 쓰면서 그 경계가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을 안 거야. 책을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10쪽 또는 30쪽으로 노트에 옮겨 적더라고. 글쓰기에 도움이 되나 봐. 예나 지금이나 진일보한 면이 없는데 이제는 신념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아. 지금은 김호연의 『망원동 브라더스』(나무옆의자, 2014.)를 읽고 있더라고. 만 2년 가까이 글을 배우고 쓰는 것이 아직도 어설퍼 내놓기 부끄러워 헛웃음을 짓곤 해. 어떤 분야에서 최고에 이르지 못했고, 경지에 이를 만큼 열심히 해 온 일도 없어. 그래서 더 간절함이 엿보이는 것 같더라. 머릿속에 있는 단어와 문법을 꺼내 겨우 에이포(A4) 두 장을 쓰는 것도 급급했는데, 동료의 글을 읽는 여유가 있는 것 같아.
금요일이면 주말을 준비하느라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져, 가족과 함께하는 하루와 농막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 일터에서 열심히 수고한 가족과 같이하며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아. 월요일에 사진을 정리하는 걸 보고 알았어. 의견이 일치가 되지 않아 혼란의 시기도 많았지만, 이제 많이 둥글둥글해진 것 같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양보하는 태도가 조금씩 엿보여. 전화 통화하는 걸 듣고 알 수 있었지. 일과 삶을 적절하게 조절하려는 것 같아.
퇴직하고서 햇볕이 잘 들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사무실을 갖는 걸 꿈꿔. 업무도 보고 책을 읽으며 노후를 보내고 싶은 거지.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여행도 하고, 글쓰기를 계속하면서 말이야. 군인 친구는 벌써 정년에 접어들었다고 연락이 왔어. 아파트 하나가 있고 죽을 때까지 연금이 나오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데 본인은 쥐꼬리만 한 국민연금이 전부고 특별히 모아 놓은 자산도 없어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거야. 100세 시대에 앞두고 40년을 버티려면 수입이 행복을 뒷받침한다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주체적인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고 하나 둘 만들어 가고 있는가 봐.
그에게 정해진 일과가 있는 것 같아. 첫 번째는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샤워하기. 두 번째는 경제 공부와 책 읽기로 아침 시간 보내기. 세 번째는 일과 시간은 업무에 집중하기. 네 번째는 일이 끝나면 도서관, 커피숍에서 휴식 취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말은 가족과 함께하고 농막에서 시간 보내기야.
의욕이 넘쳐서 좋기는 하지만 특별하게 성과물은 없는 것 같아. 너무 열정이 넘치면 오래가지 못하는데 그게 걱정이야. 일을 잘하는 사람은 장대 높이뛰기 선수처럼 엄청난 높이를 뛰어넘는게 아니라 어느 때나 그럴 수 있게 사다리를 만드는 것일 거야. 지치지 않고 힘을 꾸준히 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진동과 함께 사무실이 천장이 흔들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감나무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꽤나 큰 흔들림이었다. 2023년 10월 25일 21시 46분에 충청남도 공주에서 규모 3.4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이어졌다. 뭐지? 꿈인가? 다음 날 아침 나무 앞에 섰다. 보기와 다르게 당당하다. 상처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풍파를 전혀 몰라 재미 없는 것보다 자신이 훨씬 매력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가 어느 때와 다르게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