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역>> 정이천 주해. 심의용 옮김. 글항아리
-의리역의 정수 정이천 <역전> 완역
/장자가 말하는 성인이란 세상에 대한 집착과 의존, 그래서 기다림까지 버린 사람이다.
무궁한 경지에서 ‘소요’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기다림도 집착도 없다. 하지만 기다림과 집착을
아쉬움 없이 망각할 정도로 인간은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주역>은 차마 세상에 대한 집착과
의존을 버리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들이 묘사된 가련한 처세술인지도 모른다/ 심의용의 해제 중.
‘쿵’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니 고양이가 밥 달라고 무거운 /주역/을 책상에서 떨어뜨려 내동댕이쳤다.. 역시 책보다는 생존이 강하군. 집에는 주역 책이 세 권 있다. <대산 주역> 상, 중, 하. <실증 주역> 상, 하. 정이천의 /주역/이다. 대만의 어떤 학자의 <주역계사 강의>도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귀찮고 번거로워 그대로 두고 있었다. 주역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몇 년 전에 들었다. 대산 주역을 읽었지만 전혀 알 수 없어, 실증 주역을 사서 읽었지만, 또한 알수 없었다. 두꺼운 책이라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깨진 항아리에 물 채우기 식이었다. 오산시에서 시행하는 인문학 강의 중에 주역 강의가 있다기에 수강 신청을 하였고, 교재로 정이천의 주역을 구입하였다. 강의는 몇 번 나가다 말았다. 정이천의 주역도 성실하게 읽었지만, 흥미를 느끼거나 맛을 알지 못하였던 듯 하다. 벼르다 대도시까지 나갔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시간과 아까운 돈만 낭비하고 헛헛하게 귀가하는 시골 촌부 꼴이 되고 말았다. 내 마음에 무슨 변덕이 일었는지, 삼 개월 전에 정이천의 주역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매일 조금씩 읽기로 하였다. 한 괘나 두 괘 정도만, 그리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일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는다는 생각만 하기로 하였다. 주역을 소설로 읽기로 하였다. 어께에 힘빼고 읽기로 하였다. 알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고, 읽히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이 오늘 읽지 않았으면 내일 읽고 하는 식이었다. 삼 개월 전쯤에는 모든 게 실망스럽고 책도 읽히지가 않아 뭔가 가볍고 길게 읽을 수 있는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이걸 읽어보자 했다. 엄청난 분량이라 몇 개월은 읽을거리가 되겠다 싶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몇 년 전과 삼 개월 전에 주역을 꺼낸 이유는 비슷한 의도가 있지 않았나 싶다. 막연하게나마 이래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렇게 해서 나의 삼개월의 긴 여정은 시작되었다. 쌍쌍이 날아다니는 참새 책상에 날아들고/점점이 흩날리는 버드나무 꽃잎 벼루에 떨어지네/자그마한 창가에 한가롭게 앉아 /주역/을 읽으니/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알지 못했구나.남송 시대 학자 섭채의 시라는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른 풀처럼 서걱이던 내 마음이 아침이슬에 흠뻑 젖어 다시 생기를 찾기를 바래본다.
오늘은 내가 왜 매번 주역 읽기를 실패하엿는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진단과 평가를 해보고 싶다. 주역은 어른들을 위한 책인데, 어린아이인 내가 주역을 읽었기에 그렇다. 일설에 의하면 공자도 오십이 넘어서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나도 한 설을 추가하고 싶다. 젊어서도 주역을 알고 있었고, 읽었지만, 이해할 수 없어 포기했다가.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주역/을 읽어낼 수 있었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다. 어느 정도 인간사의 이 꼴 저 꼴을 본 후라야 주역의 문구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삼, 사년 전에 나의 안목은 어린아이였는데, 그동안 이 꼴 저 꼴을 겪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차서 그런지 주역이 재미있는 책임을 조금은 알게 되었지 않나 싶다. 주역의 문구가 몇자 보이니, 나도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뿌듯함이 있다. 그러나 세상사는 늘 ‘주역다워서’ ‘지혜’가 생기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듦을 실감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이 더 가까이 왔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역/을 읽지 못한 두 번째 이유는 기득권의 저항 때문이다. 늘 뭍에서 놀던 생물이 물 속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거나, 안하려는 이유는 뭍에서의 그동안의 기득권(익숙함이나 능숙함)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그래서 언제나 물을 물 속에서 느끼지 않고 뭍이나 물가에 서서 바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책이 있고, 생각해 왔던 방식이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바다에 풍덩하고 뛰어들수는 없기에 주저주저 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떤 계기나 어떤 사건이 생기면 뭍에서의 사고 방식이나 삶의 태도로는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할 수 있고, 그런 연후에 다른 활로를 찾거나 견디는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이번에 주역을 읽은 것은 그런 때와 시가 도래하였고, 나의 주역읽기가 우연잖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智者樂水 仁者樂山 이라 공자가 말했다고 한다. 물은 움직이고 흐르고 변화하는 것이고 지자는 흐르고 변하는 이치를 아는 자이고, 인자는 흐르고 변하는 것에서 산의 부동과 고요함의 이치를 아는 자가 아닐가. 산 속에 물이 있고, 물은 산과 떨어질 수가 없기에 이 둘은 한쌍이다. 주역은 지자요수 인자요산 이치 같다. 그동안 내게 고요함이 없고 불안이 있었다면 흐르고 움직이고 변화는 것을 알지 못했거나 ‘기득권의 저항’에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동안 /주역/이 읽히지 않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 더 보태자면. 나는 인간사의 애매모호함을 알지 못했거나, 애매모호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애매모호’가 애매하면 ‘모순’이라고 해도 좋고,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는 인간사의 ‘본능’ , ‘본질’ ‘정수’라고 해도 좋다. 우리 시대는 ‘과학’이나 ‘이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하고 해석해내려고 하였고, 어쨌든 그런 토양에서 자란 나란 인간은 설명되지 않고 해석할 수 없는 인간사의 복잡성과 변화를 답답해하거나, 억지로 해석해내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이유가 /주역/읽기를 어렵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내가 설명하거나 해석하려는 그런 시도나 성과를 무시하거나 폄하할 생각도 없고, 또한 주술적 관점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인간사는 설명될 수도 이해 될 수도 해석될 수도 없는 무엇이 있음을 알아가고 가고 있는 것 같다. /주역/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도 싶다. /주역/을 건성이라도 읽다보면 ‘이현령비현령’ 즉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뜻으로 , 어떤 사실이 이렇게도 저렿게도 해석됨을 어렴풋이 알게된다. 여기에 어떤 ‘패턴’이나 ‘이론’이 개입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굳이 어떤 ‘패턴’이나, ‘이론’을 찾다가는 주역의 끊임업이 반복되고 변화하는 인간사의 장대한 파노라마를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도 쉽다. 세상사는 이현령비현령하며 변화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읽어내고, 각자의 원, 형, 이, 정을 세우는 처세를 주역에서 배울 수 있지 않을가. 역자의 지적처럼 <주역>은 차마 세상에 대한 집착과
의존을 버리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들이 묘사된 가련한 처세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나약한 인간들이다. 내가 지금 주역을 읽고 쓴 감상은 내일이면 또 변화할 것이다. 시와 때가 변화면.
/상대를 기쁘게만 하고 자신의 강직한 뜻을 어긴다면 아첨이고, 강직한 뜻만 지키려다 상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폭력이다/ 왕필의 해석.
지화명이괘
밝은 빛이 땅 속으로 들어간 모습이다. 명이괘는 어두운 암흑을 상징하는 괘이니, 어리석은 군주가 위에 있고 현명한 자들이 손상을 입는 때다. 밝은 태양이 땅속으로 들어가면 밝은 빛이 손상을 입어서 어둡게 되므로 어둠에 감춰진 빛이 된다. 이런 시와 때를 만났을 때 정이천의 /주역/의 처방은 어려움을 알고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이다. 그것은 현명함을 감추는 것이다. 안에 있어 어렵지만 그 뜻을 올바르게 할 수 있다. ‘어두운 어리석음을 쓰는 것이 바로 밝은 지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때의 처세란 알고 싶지 않음이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음일지 모른다. '어두운 어리석음'을 사용하여. 괜히 드러냈다가는 상처받고 손상 당할 것을 알기에.
명이괘는 가인괘로 받는다. 밖에서 손상을 당한자는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오므로 가족을 상징하는 가인괘로 받는다. 그래서 손상을 당한 우리들은 ’자아‘와 가족’에 메달리는걸까?
가련한 인간들의 가련한 처세를 위하여. 그렇지만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언젠가는 변화가 올 것이니, 그대 그때까지 살아남아라.
주역은 말한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첫댓글 놀라워요~~주역속 3개월, 주역을 손에 들게 하는 글입니다.
/지화 명이, 현명함을 감추는 것, 어두운 어리석음을 쓰는 것이 바로 밝은 지혜가 된 것이다/ 명이괘에서 고수의 향기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