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사도행전 10장 34-35절『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외모로 판단하다(프로소폴렢테스)는 편파적으로, 편애하여, 한쪽으로 치우쳐서 판단하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든 편애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것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하나님을 경외하며(포부메노스) 의(뒤카이오쉬넨)를 행하는 사람을 받는다는 것이다. 포부메노스는 두려워하다 라는 의미다. 뒤카이오쉬넨은 공정한, 의로운, 거룩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히브리서 11장 33절『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뒤카이오쉬넨)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그리고 빌립보서 3장 6절『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뒤카이오쉬넨)로는 흠이 없는 자라』
공정한, 의로운, 거룩하다는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의가 있는 반면, 자기가 행하는 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메시야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다. 고넬료는 메시야를 바라보는 의를 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당시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알려주시고, 세례받게 해주신다.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언약인 것이다.
사울과 같이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는 것은 자기의 의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기라는 주체가 행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사를 통해서 자기가 아닌 율법 속의 메시야를 발견했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자를 볼 수 있다. 예수를 믿으므로 구원을 얻지만, 선행을 통해서,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함으로서, 구원을 확증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자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 8장 1-2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교회 공동체 목사나 신도들은 비록 예수를 믿지만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존재들이므로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에 상응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동해야 하는 것은 자기의 의를 버리는 행위가 뒤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과 신도들은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자기의 의를 이루려는 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지 않으므로 결국 자기의 의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가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흘리신 피가 과거의 죄만 용서받을 뿐 현재나 미래에 지을 죄는 다시 용서받아야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세상으로 들어온 죄 자체를 제거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는 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며, 율법이 적용되지 않으며 성령의 법으로 적용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1-24절『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율법에서 정하는 행위”를 이제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율법에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행함이다. 야고보는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0장 36-37절『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하는 내용이다. 그는 만유의 주(큐리어스 κύριος)라는 것이다. 큐리어스는 히브리어 아도나이(야훼)의 헬라식 표현이다. 따라서 주(Lord)는 거룩한 주님, 즉 주인이라는 의미로서 받아드려지는데, 본래의 의미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하야 아세르 하야)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디)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디는 ~을 통하여 라는 말이다. 화평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생명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언약의 표시로 세례를 하게 한 것이다. 세례는 물에서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갖는다. 로마서 6장 4-5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사도행전 10장 38절『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의 제자들 나아가 성도들도 이와 같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성령과 능력을 받고, 선한 일을 행하고, 마귀에게 눌린 사람을 고치는 것이다. 선한 일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생명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는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므로 더 이상 죄인이 아닌 것이다. 현재적으로 부활생명을 믿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머물게 되고, 그래서 날마다 죄를 용서받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므로 마귀가 접근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신 뜻은 부활생명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로 복귀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