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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여인
이 홍사
여자가 기다린다.
새벽마다 내가 사무실에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
사무실 한쪽에 다소곳이 서서 기다리는 여자인데 청동으로 만든 여인이다. 매일 새벽 사무실에 내려오면 나는 청동 여인에게 안부를 묻는다.
안녕!
수줍은지 청동 여인은 나체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이 없다.
어쩌면 나는 이 여인을 보기 위해서 새벽 일찍 사무실에 내려오는지도 모른다.
부럽다.
가끔 청동 여인이 부러울 때가 있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게 편한 시대가 되었다.
내가 안녕이라고 묻는 것은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청동 여인에게 인격을 부여하려고 묻는 안부다. 청동 여인이 말을 하지도 않거니와 대답을 하더라도 듣지 말자. 귀를 닫는 게 이 엄혹한 시대에 얼마나 편한 것인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스님들이 묵언수행을 하면서 뭘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참 편할 것이다. 잔소리하지 않는다? 듣고도 못 들은 척한다? 나는 묵언수행을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참 편할 것이라는 짐작이다. 요즘 밖에 나가보면 귀를 씻고 싶은 말을 많이 듣는다. 특히나 정치의 얘기를 들으면 욕이 저절로 나오고 귀를 씻고 싶다. 단종이 폐위되고 생육신 경은 선생께서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서 십 년이 넘도록 청맹과니로 살았다. 오죽하고 그렇게 입과 귀를 닫았을까? 그분의 심정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귀를 막고 입을 닫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 그게 무척이나 궁금했다.
청동 여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자.
청동 여인은 어디서 났는가?
가끔 커피를 마시러 가는 예술촌의 박 촌장 작업실 구석에 다소곳이 서 있던 것이다. 박 촌장이라는 조각가의 초기 작품인데 청동으로 만든 대작이다. 키는 내 허리까지 오는 대작인데, 촌장의 작업실에 갈 적마다 엉덩이를 쓰다듬던 물건이다. 엉덩이를 펑퍼짐하게 만들어 쓰다듬는 손길이 풍성하며 청동 재질이라 매끈한 게 촉감이 좋고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이 생겼다. 눈치를 보니 팔 물건이 아니기에 가격을 묻지 않고 좀 빌려달라고 하고는 업어온 것이다. 실컷, 보다가 싫증이 나면 돌려줄 물건인데 나는 인격을 부여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니 아무래도 돌려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촌장이 와서 업어가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돌려주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가격을 묻지 말고 나중에 다른 것으로 갚아야 하겠지.
촌장은 평생을 전업 작가로 살았다.
이 시대에는 웬만한 조각가 빼고는 전업 작가라면 살림이 팍팍한 법이다. 박 촌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중이 고기 맛을 보았으니 벼룩도 안 남긴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설친다. 박 촌장의 손위 동서가 태양광 발전의 기술자다. 거기에 일손이 모자라 보름 정도를 거들다가 왔는데 돈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나는 면전에 대놓고 중이 고기 맛을 알았으니 앞으로 어쩔 거냐고 묻기도 했다. 탈원전 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태양광 설비의 일거리는 많았다.
일 년 남짓 따라다니다가 지금은 꽁지머리를 자르고, 경비원도 아니고 병원 입구에 서서 안내를 보고 있다. 그 병원의 원장이 고등학교 선배라 경쟁자 없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고 했다. 법적으로 그렇게 안내원을 세우는 게 작은 병원에도 해당이 된다고 했다. 그것도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고 해서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받아서 들어간 자리다. 매일 커피를 마시러 가는 아지트가 사라졌다. 일주일에 닷새를 근무하고 작업은 주말에나 하는 형편이다. 작가도 고정 수입이 있어야 작업이 잘 된다는 게 촌장의 설명이었다. 그 말에 내가 토를 달았다.
유명 미대를 어렵게 나와 병원 경비원이 되었구먼.
이제는 아무 때나 촌장의 작업실에 불쑥불쑥 찾아갈 수가 없다. 주말에는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간을 뺏으면 안 된다.
아무려나, 청동 여인이 마음에 드는 것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여자! 그 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때로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 엉덩이를 쓰다듬어도 말이 없다. 아내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얼마나 양순하고 아름다운 태도인가? 그게 무엇보다 마음에 들어 내가 반할 지경이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편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며칠간 고민하다가 몸소 체험해보기로 작정을 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몸소 체험해보는 것이다. 나는 본디 그런 인간이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무엇을 배운다는 생각에 마음은 벅차고 뿌듯했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가 있는가?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호기심에 유독 취약한 나는, 몸소 체득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내가 나를 안다. 오늘은 청동 여인을 보며 오후 내내 궁리 끝에 인쇄물을 만들었다.
*온정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귀하께서 보태시는 금액은 농아협회의 복지금으로 쓰이게 됩니다. 농아들도 우리 가족입니다. 부디 베풀어 주시어 농아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선처를 바랍니다.*
짧은 글을 굵은 글씨로 출력해서 A4용지에 꽉 차도록 인쇄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코팅을 해서 그걸 들고 비교적 익명성이 짙은 강 건너의 옥계동을 염두에 두었다. 서울이라면 지하철을 탔겠지만, 지하철이 없는 구미라는 소도시이니 저녁 시간에 술집이나 음식점을 돌 수밖에 없었다. 우한 폐렴이 극성을 부려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 그나마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안도에 젖게 했다. 거기다가 벙거지 털모자를 썼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내가 보아도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완벽한 변장을 했다.
차에 달린 룸미러를 보고 되물었다.
미친 짓이 아니야?
아니야. 배움은 도처에 깔려 있다고 했어.
선량한 취객을 상대로 사기 치는 행위가 아니야?
아니야 받은 돈은 농아 복지 센터에 후원금으로 주면 돼.
그렇더라도 말을 할 수 있는 멀쩡한 작자가 이런 걸 들고 다니면 사기야.
아니야 어디에도 내가 말을 못 한다는 구절이나 글귀는 없어.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것이지.
그런 갈등을 느끼며 차를 끌고 옥계동으로 향했다. 그곳에 공단 근로자를 상대로 하는 술집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차는 멀찍이 해마루 공원의 주차장에 세웠다. 누가 고급 승용차를 끌고 왔다는 사실을 알면 그런 낭패가 없다.
천천히 걸어서 맞은편의 술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 술집이나 식당이 혼잡한 시간을 이용했다. 마스크를 끼고 벙거지 털모자에 돈을 담을 수 있는 헝겊 가방을 목에 걸었고 손에는 코팅한 A4용지를 들고 있었다.
실수라도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나는 나에게 다짐을 주었다.
첫 번째 보이는 집이 막창을 굽는 집이었다. 유리문에 때가 끼어 있었지만, 밖에서 보니 실내는 고기를 굽는 연기가 자욱했다. 가게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환풍기의 배출구를 가게 앞으로 빼놓았는데 빠져나오는 연기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입구 계단에 놓인 관리를 하지 않은 화분들이 고기 연기에 질식되어 말라가고 있었다.
정말 들어가야 하나?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혹시 농아들에 대한 모독은 아닌가?
자신의 행동에 회의가 들었다. 회의가 아니라 두려웠다. 마치 사탄의 뱀이 우글거리는 동굴로 들어가려는 기분이었다.
정말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새댁인지 처녀인지 모르지만, 노랑머리의 여자 하나가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사탄의 뱀? 그건 다음에 생각하자는 심산으로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들어섰다, 테이블은 철판으로 된 둥근 테이블이었는데 불청객을 맞아줄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음속으로 준비한 행동 요령이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졌다.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 또한 어려운 문제였다. 출입문 입구 테이블에서 세 명의 중년 사내들이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기로 먼저 다가가 무작정 인쇄된 A4용지를 내밀었다. 표정은 살피지 말자.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술을 마시던 사내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모였다. 마스크 안의 얼굴이 홧홧했다.
사람들은 냉정한데 참 익숙했다.
한 사내가 무슨 뜻인지 알고 인쇄물은 읽지 않고 손을 들어 보였다. 가능하면 눈을 맞추지 말아야 했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바로 돌아서서 뒷좌석의 손님들에게 인쇄물을 보였다. 그 좌석도 세 명이 있었는데 두 명은 중년 아줌마였고 한 명이 중년 사내였는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분위기를 망치는 거 같아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멀쩡하게 생긴 양반이, 거, 참 안 돼 보이네.”
사내가 아줌마들이 들으라는 소리로 말하며 바지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고개를 숙여주고 받아서 메고 있던 헝겊 가방에 넣었다. 나를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아줌마들 눈을 의식해서 마지못해 내미는 투가 역력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다음 테이블은 대학생들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 테이블로 다가가려는 찰라, 학생들이 먼저 무슨 뜻인지 알고 손사래를 쳤다.
줘도 안 받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만 숙여주고 그 테이블은 지나쳐 다음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 자리에는 청년 둘이서 앉아서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인쇄물을 내밀기도 전에 한 청년이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먼저 내밀었다.
“내 사촌 여동생도 말을 못 해요. 알아들었어요?”
돈을 내미는 청년이 말했다.
동병상련. 하마터면 아, 그러냐고 할 뻔했다. 그런 실수를 하면 낭패가 따로 없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무덤덤하게 돈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주방에 있었다. 아마도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가게인 모양이다. 그 부부는 나를 힐긋 보고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빨리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보이는 듯했다. 그 반대쪽 자리는 비어있고 벽에는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고기 국내산, 배추 국내산, 쌀 국내산, 그렇게 적혀 있었고 그 밑에 주방장 국내산, 써빙 국내산이라고 적혀 있어서 웃음이 쿡 터져 나올 뻔했다.
농아가 웃음은 웃는가?
잘 모르겠다.
주방에 있는 주인으로 보이는 부부를 향해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면접장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등골에서 땀이 흘렀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런?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끈다는 것을 깜빡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농아가 있는가? 혹 모르지. 문자 메시지만 확인하려고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을지. 그러나 손님들 앞에서 벨이 울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발신인을 보니 아내였다. 얼른 핸드폰의 배터리를 제거했다. 보나 마나 저녁을 안 먹고 어딜 나갔느냐고 하는 전화일 것이다. 저녁을 먹고 들어올 것이냐? 그게 궁금해서 하는 전화가 분명하다.
설령 전화를 받아서 그렇게 묻는다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거래처에 손님들을 만나러 다닌다고 해야 마땅할 터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이다. 아니면 인생을 배우러 다닌다고 해야 마땅하나?
배터리를 제거하고 주위를 살폈다.
혹시 본 사람은 없을까?
다행히 골목은 비어있고 스산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나는 잠시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배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냥 정신이 없었다. 아! 말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바쁘구나. 배운 것이라면, 그게 정답이다. 겨우 한 집을 들르고 나서 학습 효과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다음 집은 중국집이었다.
한 집을 들러서 그런지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주방 쪽에서 여자가 건성으로 인사를 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얼레?
겨우 한 테이블의 손님뿐이었다. 그것도 가족인지 젊은 부부가 앉아서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그 중간에 유치원에 다닐 법한 여자아이가 끼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돌아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가가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인쇄된 용지를 불쑥 내밀었다.
“에이, 오라는 손님은 안 오고.”
주방에서 여자가 하는 말이 또렷하게 들렸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 듣지 못하는 것이다. 청각을 어떤 기화로 상실했거나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 말을 익히지 못한 언어 장애인이다. 그래야만 한다.
“정아야! 말을 못 하시는 분인가 봐. 이렇게 불쌍한 분은 돕는 게 착한 어린이야.”
여자가 핸드백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우리 정아, 착한 어린이! 네가 드려!”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서 가르마가 선명하게 보이는 여아가 지폐를 한 손으로 받아들고 불쑥 내밀었다.
“두 손으로 드려야지.”
여자가 채근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는 젓가락을 놓고 얼른 두 손으로 내밀었다. 일단 받았다. 안 받을 수가 없는 이치였다. 받고 고맙다는 소리는 못 하고 고개를 깊이 숙여주고 나왔다.
밖에는 차가운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다음은 횟집이었다.
막 썰어드립니다. 그런 현수막이 붙어 있는 횟집이었는데 손님들이 복잡하게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손님들을 쭉 훑어보았다.
얼레? 큰일 났다.
정면에 앉아 소주를 마시던 최 교수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이 친구가 여기 있을 줄이야. 지역대학에서 보건학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고등학교 동기생이며 같은 계원이다.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은 대머리의 김 변호사였다. 둘이 소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얼른 돌아섰다.
다행히 최 교수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역시 여기도 위험하구나. 익명성이 짙은 지역이 아니야. 역시 구미는 바닥이 너무 좁아. 어쩌지? 걸음을 걷는 모양새만 보아도 사람을 알아볼 터인데? 허리를 조금 꼬부리고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위장해서 횟집을 나왔다. 나와서 문밖에서 유리문을 통해서 보니 최 교수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김 변호사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몰라보았던 모양이다.
간담이 서늘했다.
여기선 위험하겠구나.
대구로 가자.
시간을 보니 겨우 여섯 반이었다. 해마루 공원으로 올라가서 차를 끌고 구미역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길이 좀 복잡했다. 아무래도 주차 문제 때문에 차를 가지고 가는 것보다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기차에서도 배울 게 있을 것이다. 그동안 세 집을 돌면서 무엇을 배웠나? 돌이키니 말을 안 한다는 것은 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기차는 바로 있었다. 대구까지는 금방이다. 왜관을 지나면 바로 대구다. 표를 끊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는 메모지에 대구, 라고 써서 그 메모지를 보여주고 표를 끊었다. 그런 사람이 더러 있는지 표를 발매하는 새댁인지 처녀인지 모르겠지만 젊은 여자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자신이 앉은 의자를 가리키며 없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친절하게 표를 끊어주었다. 입석인 모양이다. 알았다는 듯이 손을 살짝 들어주었다. 2번 홈에서 타라고 손가락 두 개를 펴서 보이며 아래 지하를 가리켰다. 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주고 지하로 내려가 기차에 탔다. 기차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기차는 복잡했다. 물론 나도 입석이었다.
대구까지 가는 동안 차창만 바라보았다. 차창에는 벙거지 털모자를 쓴 농인이 비쳤다. 차창에 비친 낯선 사내와 어색한 눈싸움을 하며 대구까지 갔다.
막상 대구역에 내리니 막막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아무래도 술집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하겠지.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서 역을 빠져나가서 도로를 건넜다. 중앙로인데 술집은 없고 구제 옷을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다시 도로를 건너 향촌동 쪽으로 들어섰다.
향촌동으로 가니 예상대로 음식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곱창집, 생고기집, 횟집을 순례하며 농인 행세를 했다.
간이 좀 커졌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인쇄물을 들이밀 수가 있었다.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확률을 계산하니 테이블에 가서 인쇄물을 들이밀고 인사를 하면 구 할은 손을 들어 보였다. 더러는 줄 돈은 없고 술이나 한잔하라고 술잔을 들이미는 취객도 있었고, 돈 때문에 지금 싸우는 게 안 보여?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고소한 기분이 들었다.
돈 때문에 많이 싸워라.
이 돈의 노예들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가게를 순례했다.
유심히 본 것은 돈을 주는 사람의 눈빛과 돈을 내밀지 않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의 눈빛이 다르다는 점이다. 돈을 내미는 사람의 눈빛은 뭔지 모를 우월감에 젖어 빛이 났고 손사래를 치는 인간은 눈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죄지은 것이 없는데 그랬다.
말을 안 하고 있으니 눈치라는 감각이 급속히 발전, 아니 진화하는 것 같았다. 몇 집을 돌다 보니, 이 사람은 돈을 내밀겠구나, 저 사람은 손사래를 치겠구나, 그런 감이 단박에 잡힌다. 그 점을 배운 것이다. 총체적으로 짚어보면 남자나 여자들끼리 앉은 테이블보다는 남녀가 함께 앉은 테이블이 돈을 내미는 확률이 높다. 그건 나를 의식해서라기보다는 상대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자.
향촌동 골목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들어간 가게를 짚어보니 대략 스무 곳이 넘었다. 목에 맨 헝겊 가방을 뒤져서 돈을 셈하니 천 원짜리 지폐가 열 한 장이었다. 그나마 동전은 없었다. 구미에서 받은 것 세 장을 빼면 여덟 장을 받은 셈이다. 빈손으로 돌아서 나온 가게가 많았으므로 그 정도였다.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대구역으로 갔다. 역시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매표창구에서 말을 하지 않고 메모지에 구미라고 적어서 보여주고 표를 끊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표를 끊어주는 남자가 노약자, 장애인 할인이라고 적혀 유리에 붙여 놓은 것을 가리키며 장애인 확인증을 보자고 손가락으로 네모 표시를 하고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렇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고개를 저었다.
표를 받아서 보니 기차 시간이 삼십 분이 넘게 남았다.
그동안 막연하게 기다릴 내가 아니다. 역 대기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에 재미가 붙었다. 인쇄물을 내밀고 표정을 살피는 재미가 그만이다. 대략 스무 명 정도가 앉아 있었는데 인쇄물을 내밀고 고개를 숙였지만, 돈을 준 사람은 딱 한 명이었고 모두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거나 웃음을 보여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의자 뒤에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이 홀로 앉아 있었다. 꼬질꼬질 때가 묻은 점퍼에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무엇이 담겼는지 커다란 배낭을 놓고 그곳에 기대어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발치에는 빈 소주병이 서 있었다. 어디로 가는 여행자는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 수가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노숙자 앞으로 갔다.
먼저 인사를 깊게 하고 인쇄물을 내밀었다.
“어? 이 새끼 봐라. 나 돈 없어.”
욕을 한 번 먹었다. 인쇄물을 좀 높게 가슴팍으로 들이밀었다.
“이 벙어리새끼가 미쳤나? 나 돈이 없다니까?”
욕을 두 번 먹었다. 인쇄물을 더 높게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나 돈 없다니까?”
돈이 없는 게 자랑이야. 인쇄물을 눈앞에서 얼굴로 난폭하게 디밀었다.
“어? 이 새끼 봐라.”
또 욕을 먹었다. 인쇄물을 피하며 고개를 뒤로 더 젖히는 순간, 몸의 중심을 못 잡고 노숙자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의자를 넘어가서 넘어진 노숙자에게 인쇄물을 얼굴에 디밀었다.
“알았어! 알았어! 줄게. 이 새끼 지독한 놈이네.”
넘어진 노숙자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일어나는 속도가 굼떴다. 노숙자는 다시 의자에 앉아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뒤지더니 동전 삼백 원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서 헝겊 가방에 넣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깊게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다 보았다. 누구도 참견하거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의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냉정한 데 참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거기까지는 잘 배웠는데 정작 알이 꼬인 것은 기차를 타고 난 다음이었다.
내려갈 적에는 입석이었지만 올 적에는 자리가 있었다. 자리를 찾아 앉아서 생각하니 기차에서도 시험을 해보는 것이 마땅하다 싶었다. 방금 기차를 타고 내린 사람들이 자리 자리에 앉자 기차 안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밤차라서 그런지 빈자리도 드문드문 있었다. 나는 일어섰다.
객차 안을 차례로 훑으며 인쇄물을 승객에게 보여주고 인사를 했다. 고개를 젓는 사람도 있었고 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를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돈을 내미는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인사를 깊숙하게 하고 받았다. 분명히 내가 서너 자리 앞에서 볼 적에는 핸드폰을 주물럭거리던 승객이 내가 그 자리에 도착하자 자는 척 눈을 감아버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앉았던 객차를 다 훑고 다음 칸으로 건너갔다. 나는 농인이다. 눈치로 줄 만한 사람에게 인쇄물을 들이밀고 눈을 보는 것이다.
왜관을 지나고 다음 역에서는 내려야 한다.
그 객차에서 앞줄부터 차례대로 인쇄물을 들이밀고 이유도 타당성도 없는 돈을 수금했다. 생각하니 음식점을 돌 적보다 수입이 괜찮았다. 그러나 나는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목적이었다. 한창 인쇄물을 들이밀고 이유가 불분명한 수금을 하고 있을 적에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누구신가?
돌아보니 객차의 차장이었다.
철도원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팔뚝에 차장이라고 적힌 완장을 찬 건장한 사내였다. 차장은 손에 무전기를 쥐고 있었다.
“여기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돼요. 위법이에요.”
나는 못 들은 척 고개를 갸웃했다.
차장은 뭘 보여 달라고 손짓을 했다. 아마도 차표를 요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인쇄물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고 주머니를 뒤져 차표를 내밀었다.
“구미까지 끊으셨구만.”
차표를 보고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나의 팔짱을 끼고 잡아끌었다. 일단 객차 밖으로 나와서 객차의 연결부분 통로에 서서 어디론가 무전을 했다.
못 듣는 척하고 있었지만, 구미의 역무원과 무전을 하는 모양새였다. 객차에서 구걸하던 벙어리를 발견했으니 알아서 처리할 방도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분명히 벙어리라고 했다. 그 말이 너무 뜬금없고 생소하게 들렸다.
나 벙어리 아닌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방에서 무슨 대답을 했는데 못 들었고 1213열차 5호 객차에서 내릴 것이라고 다시 무전을 했다. 알겠다는 대답이 차장이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 들렸다. 기차는 금방 구미역에 도착했다. 차장을 역시 내 팔짱을 풀지 않고 끌어내렸다. 내리니 바로 앞에 젊은 역무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인계가 되었다. 역무원이 이젠 내 팔짱을 끼고 잡아끌었다. 내 뒤를 따라서 몇몇 승객이 내려서 관심 없다는 투로 쳐다도 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향했다.
“갑시다. 말을 한다고 알아듣나?”
역무원이 팔짱을 끼고 잡아끌었다. 계단을 올라와 역사에 들어서면 팔짱을 풀어주고 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역 대기실에서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 앞 광장으로 내려섰다.
이게 무슨 일이야?
역 광장에는 경찰차 한 대가 경광등을 켜 놓고 서 있었다.
“이 사람입니까?”
“말을 못 하는 사람입니다.”
경찰에 인계가 되고 나는 경찰차 뒷좌석에 실렸다. 역무원이 사라지는 건 보지도 못했다. 생각하니 정말로 입장이 답답한 실정이었다. 그냥 될 대로 되겠지. 경찰은 두 명이 한 조였는데 하나는 운전을 하고 하나는 내 팔짱을 끼고 뒷좌석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참 좋은 경험을 하는군!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경험.
“내립시다.”
차는 멈추었고 팔짱을 낀 경찰이 잡아끌었다.
눈을 떠보니 역 앞에 있는 원평지구대였다. 옛날의 파출소가 이젠 지구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구대로 들어가니 잎사귀가 네 걔 달린 계급장을 찬 경찰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지구대장이었던 모양이다.
“열차에서 구걸을 했다구? 자금이 어느 시대인데?”
젊은 경찰이 의자를 빼주며 앉으라고 했다.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젊은 경찰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더니 글을 아느냐고 물었다. 못 들은 척했다. 젊은 경찰이 책꽂이에서 이면지를 빼내더니 이름이라고 적고는 내 앞으로 밀었다. 아마도 필담을 시작할 모양이다.
나는 장갑을 벗고 이름을 적었다.
그다음은 주소라고 적고는 물음표를 했다. 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구미 사람인데요?”
젊은 경찰이 지구대장에게 말했다.
“신상을 털어봐”
지구대장이 감정을 싣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호자 연락처?
이거 보통 재미있는 게 아니네? 그런데 누구의 연락처를 적어야 하나? 조금 망설였다. 아내? 그러면 아내에게 전화할 것이다. 벙어리 누구 씨의 보호자 되십니까? 그런 전화를 받으면 아내는 뭐라고 하겠는가? 생각하니 참으로 난감한 입장이었다.
그냥 혼자서 집으로 갈게요.
보호자 연락처를 적으라는 곳에 그렇게 적었다.
젊은 경찰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거 정말 답답하네.
방법이 없다. 벙거지 털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지구대장님! 저는 농인이 아닙니다. 지금 묵언수행과 탁발수행을 동시에 하는 중입니다.”
지구대장을 향해서 또렷하게 말했다.
세 명의 경찰이 깜짝 놀라며 황당한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묵언수행? 이 양반이 기차 승객을 상대로 사기쳤구만. 김순경 신원조회 좀 해 봐!”
지구대장이 김순경이라는 젊은 경찰에게 차갑게 말했다.
결국 신분증을 보여주고 신원조회와 전과가 있는지 조회를 하고 신상이 탈탈 털리고 자술서를 쓰고 한 시간 만에 풀려날 수가 있었다.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은 전과 조회를 하는데 군에 가기 전에 통행금지에 걸려 삼천 원 벌금을 낸 것까지 조회가 되었다.
“앞으로 묵언수행은 집에서나 하시오. 바쁜 사람들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지구대를 나서는데 지구대장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고는 하고 지구대를 나온 나는 바로 앞의 편의점으로 가서 그동안 받은 돈을 세어 보았다. 만팔천삼백 원이었다. 담배 네 갑 값에 못 미치는 돈이었지만 많이도 탁발했다. 그 돈으로 커피와 음료수를 몽땅 사서 지구대에 들어가 거절하지만, 필담을 주고받던 책상 위에 막무가내로 두고 나와 역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끌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와 청동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묵언수행은 집에서나 하래!”
청동 여인은 대답이 없다. 청동 여인의 엉덩이를 슬쩍 쓰다듬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 뭘 배웠나?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넘었다.
배가 고프다. 뭘 배웠는지는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그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청동 여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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