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돌아온 나와 동생이 거실에서 티격태격 레고 블록을 맞추고 있으면, 엄마는 시장에서 장 봐온 식재료로 분주히 저녁밥을 준비했다. 밥솥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고,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즈음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아버지가 퇴근했고, 창밖도 어둑해졌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마흔이 채 안 됐으니, 이 이야기엔 ‘아빠’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듯하다.
퇴근한 아빠는 겉옷을 벗어놓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셨다. 이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사이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퍼졌다. 나는 도면을 보며 짝이 맞는 레고 블록을 찾는 데 집중하다가도, 귀를 쫑긋 세웠다. 욕실 문 너머로 들리는 노래가 어떤 가수가 부르는 유행가인지, 가사가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어도 아빠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만은 느꼈다. 시작과 끝을 지정하기 어려운 아련한 기억이지만, 분명한 건 아빠의 노래를 듣는 그 시간을 은근히 기다렸고, 노래를 듣는 동안 내가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둥지를 지키기 위해 더 자주, 더 오래 둥지를 떠나 있게 되면서 아주 긴 시간 아빠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 그사이 나는 훌쩍 자라 대학에 갔고, 서울 자취방으로 짐을 꾸려 나왔다. 노래를 흥얼거리던 아빠의 음성, 밥상에 둘러앉아 나누던 대화, 형광등 불빛 아래 저녁을 함께 보내던 날들은 그렇게 멀어지고 잊혀갔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노래를 들은 건, 당신 며느리의 생일을 기념해 찾아간 노래방에서였다. 마이크를 쥔 아빠는 흥겹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순간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를 빤히 보다가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쓴 채로 눈을 수차례 비비적거렸다.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이 아쉽고 야속해서. 아스라이 멀어진 기억의 한 조각이 영롱하게 반짝거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