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 꽃밭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한 동기가 같은 아파트단지 다른 동에 산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고향 면서기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군복무를 마치고 도청으로 자리를 옮겨 중년에 사무관이 되어 고향 면장으로 파견가기도 했다. 다시 도청으로 복귀해 어딘가 멀리 장기 연수도 다녀와 서기관으로 올랐다. 기초단체 부시장 부군수로는 나가지 못하고 도의회 의사국장을 지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얼굴을 자주 볼 기회가 적은 편이다. 어쩌다 드물게 퇴근길 연락이 닿아 건너편 아파트 상가 주점에 마주 앉은 기회가 있다. 생선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비우기도 하나 명태전이나 삶은 주꾸미로 막걸리 잔을 비움이 더 편했다. 둘이서 자리를 갖다보면 형제나 아내에게도 못다 한 속내를 편하게 다 털어 놓는다. 둘이서 얘기를 나누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차수를 변경해 자리를 옮겨가기도 하나 웬만하면 1차로 끝낸다. 그럴 때마다 친구가 매번 술값을 계산했다. 자리를 파해 집으로 가다보면 신호등을 건너기 전 으레 부딪히는 얼굴이 있다. 길목에서 트럭으로 과일행상을 하는 아주머니다. 넉살좋은 친구는 ‘어이, 애인!’하며 덥석 손을 맞잡고 인사 나누고는 토마토나 딸기를 두 봉지 사 하나는 나한테 안겨주고 같이 횡단보도 건넌다.
나는 봄날 주말 산행을 나서면 산나물을 채집해 온다. 어느 산자락으로 가면 무슨 산나물이 자라는지 훤하다. 매주 주말 산행을 가면 좋지만 비가 온다거나 갈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산행을 나서면 배낭은 물론 보조가방까지 산나물을 가득 뜯어온다. 우리 집에서는 소비가 다 될 수 없을 만치 양인지라 집으로 가기 전 배낭을 비우게 되는데 1순위로 친구에게 보낸다.
나는 여름이면 산행을 나서 영지버섯을 따온다. 영지버섯을 따기가 쉽지는 않다. 날씨가 무더운지라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선다. 활엽수림 가운데도 참나무가 숲을 지형을 골라 찾아가 삭은 등걸에서 돋아난 영지버섯을 따면 아파트 베란다에 말린다. 발품 팔아 따서 말린 영지는 형제들과 나누고 지인들에게 보낸다. 내가 고생해 딴 영지버섯을 나누는 지인가운데 이 친구가 빠질 리 없다.
친구는 올해 초부터 공로연수 기간이다. 일반 행정 공무원은 정년 직전 1년은 후진에게 직위를 물려주고 안식년 격으로 쉬는 제도였다. 근무처로 출근하지 않아도 정액 급여는 조금도 모자람 없이 매달 꼬박꼬박 통장으로 입금 되는 모양이다. 친구는 아내가 와병 중이라 간병인을 구해야하는 처지였는데 마침 잘 되었다. 봄날에 보고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도 자리를 갖질 못했다.
지난 일요일 오후 친구로부터 얼굴을 한 번 보자는 연락이 왔는데 다음 어느 날로 미루었다. 우리가 자리를 마주해 앉으면 잔을 채우고 비워야 하는데 나는 이튿날 월요일 아침 출근과 근무가 부담이 되어서였다. 그래서 추석 쇠고 그대가 구하려는 ‘비수리’ 약재까지 마련해 얼굴을 보자고 했다. 그러고 나는 근무에 여념 없는 화요일 일과 중 친구가 카톡으로 한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친구가 손수 키운 장미허브를 사진에 담아 보내면서 ‘자네 몫으로 화단 골목에 두었으니 퇴근길 가져가게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친구가 안식년 휴가 기간에 백수가 되어 쉬면서 소일거리가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 아파트 동이 다른 친구네 출입구 근처에 꽃밭을 가꾸는 일이었다. 지난여름 어느 날 친구 아파트 앞을 지나다가 꽃밭에서 물을 주느라 수고하는 친구를 만난 적 있다.
퇴근길 동선이 친구네 아파트와는 달라 일부러 그곳으로 들렀다. 친구가 건네려는 화분만 챙겨 오려는 생각이었는데 꽃밭을 둘러보고 감탄했다. 나도 학교에서 봉숭아와 코스모스를 가꾼다만 친구 꽃밭은 더 너르고 종류도 다양했다. 폭염과 가뭄을 이겨내고 가을 들머리 잦은 비에 싱그럽게 자라 알록달록 꽃을 피웠다. 간병으로 고생하는 줄 알았는데 꽃 대궐을 만들어 놓았더랬다. 18.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