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는 기체 ③ T-4 초음속 폭격기 등 몰랐던 소련의 괴물들
These Five Soviet Super-Weapons Were Disastrous
It 's not surprising that most stayed on the drawing board
https://warisboring.com/these-five-soviet-super-weapons-were-disastrous-a2a714e060d0#.qry1mu40t
소련 시대의 군산 복합물은 서방 기업에 70년 가까이 대항 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동안 서방을 놀라게 한 저렴하고 혁신적인 고성능 장비도 있었지만 하늘을 나는 것도 겨우인 기체나 어떻게든 떠있기만 한 함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소련 붕괴를 방지 할 수 있는 무기는 하나도 없었지만 일부는 붕괴의 양상을 바꾸었다. 전투에서 기술과 '사람'적 요소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 관계에서 분리되는 장비의 배치를 결정하는 경우 국방에 큰 영향이 나온다.
무기 개발의 중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각종 사건이 관계하는 속에서 진정한 국익과 필요에 집중하는 것이 보통 영광과 허세만의 추구가 아니다. 소련의 경우는 "경이의 무기"의 대부분은 상상의 세계 그대로였다. 소련 자신도 소련의 적에게도.
구경 406mm B-37 해군포는 소베츠키 소유즈급으로 제작되었다. Photo via Wikipedia
소베츠키 소유즈급 전함
20세기 시점에서 제정 러시아는 비교적 현대화된 강력한 해군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러일 전쟁이 끝나면서 러시아 조선 업계는 서방 국가보다 훨씬 뒤처져 또한 혁명으로 산업계뿐만 아니라 해군까지 활동을 중단해 버린다. 전쟁이후 소련은 약해진 함대를 다시 활성화 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1930년대가 후반이 되면서 소련 경제는 회복되고 스탈린은 해군력 정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소베츠키 소유즈급 전함을 선두로 야심적인 정비 계획을 수립하고 순양함과 항공 모함의 정비도 상정했다. 소베츠키 소유즈급은 이탈리아 리토리오 급을 참고로 배수량은 60,000톤 가까이에 주포는 16인치 9문으로 최고 속도 28노트의 구상이었다. 완공 했으면 서방의 최우수 전함과 동일한 정도의 규모였을 것이다 소련은 건함에서 경험 부족으로 부실 작업이 실전에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소련은 16척의 전함 건조를 1938년부터 1940년에 계획하고, 그 중 4척을 기공했다. 건조 장소는 레닌 그라드, 니콜라예프(흑해) 모로토프스크(백해)로 그 중 한척은 1940년에 작업이 빈약한 기술력 때문에 중도에 포기되었다. 남은 세 척도 전쟁발발에 의해 작업을 중단하고, 그 중 한척은 레닌그라드에서 세계 대전 후 완성을 목표로 했지만 합리적인 일파가 각 함의 건조를 중지시키고 해체했다. 각 함의 건조는 소련에 엄청난 자원 투입을 요구했다. 건조를 좀 더 일찍 시작한 소련은 상당한 국력을 투입한 결과 흑해와 발트해 봉쇄된 상태로의 전함을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또는 한 척은 북극 항로의 선단 호위에 투입되고 있었다. 세계대전중 소련은 전함에 사용할 예정인 자재를 투입해야 할 더 많은 유익한 분야가 있었던 것이다.
국방부의 '울리야놉스크'급 항공 모함의 상상도. Art via K.Е. Сергеев / Wikimedia
오렐급 울리야놉스크급 항공모함
소련은 혁명 직후부터 항공모함 건조를 검토하고 있었지만 전함 건조로 경제가 휘청 거리고 소련 산업계가 피하게 되는 것에서 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계획은 흐지부지 된다. 전후 스탈린의 비현실적인 건함 계획에서 항공모함 건조로 전환했다. 모스크바급 헬기 항모가 1960년대 중반에 취역한 후 키예프급 VSTOL 항공모함 몇척이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등장했다.
그 다음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탄탄한 발전을 주장하는 방향이 있었을 때 한꺼번에 슈퍼 항모로 전환되어야 하는 방향도 나왔다.(이것이 오렐급이다)하지만 소련 해군은 단계적인 발전 방안을 채택하고 키예프급의 개량과 쿠즈네초프급 일반 동력형 중형 스키점프식 항공모함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또한 쿠즈네초프급의 후계로 울리야놉스크급을 상정했다.
배수량 80,000톤으로 원자력 추진을 울리야놉스크급은 미 슈퍼 항공 모함에 처음 정면으로 대항하는 함이 될 것 같았다. 스키점프 방식을 채용하고 있었지만 캐터펄트를 갖추고 있으며 전투기, 조기 경보기를 운용 할 수 있는 경우 미 해군 항공 모함과 거의 호각세 였던 것이다. 또한 완성되면 처음으로 소련 해군은 장거리 공격 작전을 세계의 어떠한 지점에서도 실시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시대의 무기 시스템은 예외없이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냉전 종식으로 소련 체제가 붕괴하고 울리야놉스크의 건조는 위험이 너무 커져서 선체가 분해되었다. 나중에 보면 단계적인 전력 정비 방법은 나름대로의 효과를 올리고 제해함과 해군 항공대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슈퍼 항모를 그대로 건조하는 결정을 한 소련 해군의 생각은 미 해군과 전혀 다른 것이며 서방에 필적하는 해군의 존재를 보여주는것 보다 해군 전략의 재가동을 고집했다. 하지만 완공해도 소련은 우방과 적국에 과시 할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K-7 중폭격기 RC 모델. Photo via Wikipedia
세계 대전 사이의 중폭격기
소련 공군은 제 2차 대전중에 전략 폭격 능력을 정비 할 수 없었지만 세계대전 사이에 소련은 장거리 네발 엔진 폭격기를 중점적으로 개발하려고 했다. 대전 발발시 소련은 타국을 능가하는 규모의 중폭격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종은 구형이 된 TB-3가 대부분 이었지만.
전투의 격화에 소련은 Pe-8을 주력으로 했다. 대부분 아브로 랭카스터와 보잉 B-17에 필적하는 기체였지만 Pe-8은 서방 폭격기에 필적하는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항공기 제조 및 공급 문제가 그 원인이었다. 소련 공군은 진정 멋진 프로젝트를 실험했고 그 중에서도 K-7 중폭격기는 융커스 구상과 흡사했지만 여덟번째의 시험 비행에서 추락해 기내의 14명이 전원 사망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망한 개발 사업은 TB-3/ANT-20/TB-6 제품군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엔진 여섯개 이상의 괴물기가 되었다. 중무장을 위해 속도와 기동성이 희생되었지만 편대 비행중의 폭격기는 요격기로 부터 방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유였다. ANT-20 수송기는 엔진이 여덟개로 승객 72명을 태우고 시제기는 모스크바 근교에 추락해 45명이 사망했다. ANT-26 폭격기에 전용한 ANT-20 엔진 12개는 폭탄 33,000 파운드로 B-29를 능가하는 탑재량이 될 것 같았다.
어쨌든 하늘을 날았다것은 프로토 타입뿐이고 장시간 비행은 하지 않는다. 소련이 이 노선을 채용하고 있으면 전술적 공군력의 정비가 상당히 지연하고 붉은 군대 지상 부대의 자원을 상당이 잠식했을 것이다. 거대한 ANT-26은 독일 전투기의 표적이었을 뿐이고 독일공군이 기다리는 영공에 뛰어들 뿐이었던 것이다. 소련에게 자원을 낭비할 여유가 아닌 전략 폭격과 같은 고가 전략은 실시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독일군을 지상에서 격파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만약 소련이 전략 폭격을 심각하게 실시하는 정책을 채택한다면 독일군의 지상 침공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T-42 전차의 상상도. Art via Wikipedia
초대형 전차 T-42
독일과 소련의 전차 설계가 1930년대에 유사한 것은 카잔 전차 학교의 지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과 소련은 1920년대 말부터 항공 분야, 장갑 차량, 화학 무기 등을 공동 작업을 시작한 성과가 있었다. 나치의 출현으로 이 협력은 막을 내렸지만 소련과 독일은 함께 혁신적인 새로운 발상의 장갑차 기술을 손에 넣고 있었다.
세계 대전 사이에 '초대형' 전차의 생산을 시도한 나라는 많다. 표준형 전차의 세배에서 네 배의 무게있는 전차를 가리킨다. 그 중 독일 에드워드 그로테는 초중량 전차를 독일, 소련 양쪽 모두 설계했다. 소련 참모 본부에 제출한 방안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T-42의 초안으로 무게 100톤, 포탑 세개 시속 17마일, 승무원 14 ~ 15명이라는 것이었다.
T-42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소련 군부가 심각하게 장비화를 검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좀 더 현실적인 방안으로 T-35, T-100, SMK, KV-4, KV-5가 있었다. 이 중 생산에 들어간 T-35만으로 45톤 포탑은 5가지가 있었다. 배치된 61량은 대부분이 바바로사 작전 초기에 상실했다. 기관의 결함 및 탑승자가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초중량 전차는 예외없이 T-42도 중량 초과 높은 가격으로 개발이 힘들어 본격 생산되지 않았다. 붉은 군대가 이 전차를 채용한다면, 일본, 핀란드, 독일을 상대로 두 경우 모두 비참한 결과가 있었을 소련의 기갑 차량 교화 정책 자체가 전술적으로 의미없는 내용이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얼음덮인 T-4 폭격기. Samantha Cristoforetti / Flickr photo
수호이 T-4 초음속 폭격기
세계 대전후 소련 폭격기는 미국과 유사한 기종이 많다. Tu-4는 포획한 B-29를 그대로 복사했다. 수호이 T-4는 B-70 발키리에 상응하는 소련의 항공기이다. 대형 고속 폭격기로 고고도를 비행하는 T-4는 소련 방위 산업의 능력의 시험 과제(능력 이상의 과제가 되기도 했다)였다.
마하 3으로 실용 최고 고도가 70,000 피트 가까운 T-4는 모양이 B-70와 흡사하고 성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련 공군의 구조가 미국과 달리 T-4는 전술적 임무에 투입되어 정찰 및 대함 미사일의 수송에도 사용하는 구상이었다. Kh-22 대함 미사일을 품고 비행하는 T-4는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요구 수준이 소련에 너무 생산에 옮겨지지 않았다. 빠르고 고고도를 비행하는 항공기에 허용되는 허용 오차는 소련 항공 업계에서는 실현 될 수 없었다. 또한 T-4도 B-70뿐만 아니라 SAM이 가로막고 있었다.
T-4는 가변 날개형 Tu-160의 선구자가 되었다. Tu-160는 35대 밖에 생산되지 않았고 T-4도 취역 시작의 예상으로 부터 대부분 10년 후에 등장했다. 만약 소련이 T-4를 배치했다면 전술기 부대에서는 상당 부분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고성능 초음속 폭격기 부대는 대함 미사일을 탑재하고 있었을 미 항모 부대에게는 소형의 단거리 형의 Tu-22M 이상으로 방어가 곤란했을 것이다. T-4가 양산되었다면 미국의 조달에도 변화가 생겼을 것이고 B-1A가 더 많이 중시되고 전략 요격 전투기도 각광을 받았을 것이다. 운행 유지가 매우 고액인 T-4 그러나 소련 붕괴후 일부 잔존하여 러시아 공군에 편입 되었을지도 모른다.
맺음말
소련은 웅장한 구상과 글로벌 야심이 있었지만 국방 산업의 기반에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 제약이 걸작 장비를 낳은 경우도 있다. T-34와 MiG-21이 그 예이다. 반대로 제약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결정을 주도하기도 해 세계대전 사이의 거대 폭격기, 거대 전함과 거대 전차 구상이 예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교훈으로 웨폰 시스템의 선택이 방위 산업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국가의 운명을 바꿀만한 힘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