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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한국 서원 9곳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서원.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2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1963년 국보로 지정된 안향 초상,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1981년 보물로 지정된 주세붕 초상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어 곧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 층 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괴석(四塊石)들을 바른 층 쌓기 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 초석 위에는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小累],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친 후,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소수서원 입장요금은 어른 2천원, 중고등학생 1,330원, 초등학생 660원이다.
영주 선비촌, 소수서원, 소수 박물관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통합 관람권은 성인 3,000원이다.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榮州 紹修書院 講學堂)은 2004년 4월 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었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인 강학(講學)과 제향(祭享)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이다.]
장서각(藏書閣)
[재(齋)는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유숙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기숙사로 보면 된다.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는 한 건물에 있으며,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별도의 건물로 되어 있다.]
[장서각(藏書閣)은 오늘날의 도서관으로 유학 경서나 문집 등의 서적, 목판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탁청지(濯淸池)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文成公廟)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 안에 있는 제향 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비롯하여 안축, 안보, 주세붕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2004년 4월 6일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었고, 영주시청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탁청지(濯淸池)는 유생들이 공부하다 휴식을 취했다는 인공연못이다.]
광풍정(光風亭)
[광풍정(光風亭)은 본래 '광풍대'라고 불리던 곳으로 퇴계 이황이 '제월광풍(霽月光風)'에서 따서 붙인 이름이다. 비가 갠 뒤 바람과 달처럼 마음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고 시원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소수박물관
[소수박물관(紹修博物館)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유교전문박물관.
설립일 : 2004년 9월22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80(청구리 346번지)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휴관일 : 없음
유교전문박물관으로 2004년 9월 22일 개관 하였다. 14,143㎡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5개의 전시실과 수장고, 시청각실, 야외전시실으로 이루어졌다. 3만 800여 점의 소장품이 소장, 전시되어 있고, 유교와 관련된 전통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국보 제111호인 안향 초상(安珦 肖像)이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획 전시실은 기증 받은 2만여 점의 유물을 연차적으로 순환 전시하고 있으며, 제 1전시실은 선사시대를 비롯한 삼국시대, 조선시대의 문화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제 2전시실은 ‘유교의 전래’라는 테마로 이황의 <성학십도>와 <사서삼경>, <학맥도>를 전시하며, 제 3전시실은 조선시대 사학기관인 서원과 지방교육기관인 향교에 대한 전시가 이루어진다. 제 4전시실에서는 소수서원 창건 이야기와 소수서원에 배향된 인물 등 소수서원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영주 선비촌, 소수서원, 소수 박물관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통합 관람권을 판매하며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의 경우 1,000원이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111호 안향 초상(安珦 肖像)
[안향 초상(安珦 肖像)
요약 : 고려 후기의 명신 안향(安珦)의 영정.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소수박물관 (내죽1리)
크기 : 세로 37cm, 가로 29cm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1318년(충숙왕 5) 제작되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된 이제현 초상보다 1년 앞서 만들어졌으며 한국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충숙왕이 안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 반신상(半身像)이며 30도 각도의 좌측상이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 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본시 순흥향교(順興鄕校)에 안치해 오다가 1457년(세조 3)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역모사건을 일으킨 후 부(府)가 폐지되자 한양(漢陽)의 안씨종가(安氏宗家)에 옮겨졌다가 소수서원이 세워지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초상화는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안향(安珦)
개설
고려 후기 영주 출신인 안향(安珦)[1243~1306]은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문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다.
가계
안향의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안유(安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훗날 이름을 ‘안향’으로 고쳤지만, 조선의 5대 임금 문종과 휘가 같아 조선시대 저서에는 ‘안유’로 기록되어 있다. ‘회헌’이란 호는 송나라 주자를 흠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낸 안자미(安子美), 할아버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증직된 안영유(安永儒)[1201~?], 아버지는 주리(州吏)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른 안부(安孚)[1220~?], 어머니는 예빈승(禮賓承)을 지낸 우성윤(禹成允)의 딸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안향의 첫 번째 부인은 우사간(右司諫) 김녹연(金祿延)의 딸 한남김씨(漢南金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염수장(廉守藏)의 딸 서원염씨(瑞原廉氏)이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낸 안우기(安于器)[1265~1329]가 아들이다. 사위는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지낸 문욱(文頊),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허수(許绥), 통문서록사(通文署錄事)를 지낸 박제(朴璾), 직사관(直史館)을 지낸 한수연(韓守延), 정경공(貞景公) 김사원(金士元)[?~1319]이다.
활동 사항
안향은 1243년(고종 30) 흥주(興州) 평리촌(坪里村)[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출생하였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에 보임되었다가 직한림원으로 승진해 내시원에 소속되었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계책을 써서 탈출하니, 원종이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다. 1271년(원종 12) 서도(西道)에 파견되었는데, 청렴한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내시원에 재직하면서 내시원의 오랜 폐단을 임금께 보고해 혁파하였으며, 1272년 감찰어사로 승진하였다.
안향은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으로 부임했을 때 합주(陜州)[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백성들을 현혹하고 다니던 무당들이 오자, 무당들을 엄격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바로잡았다. 경상도안렴사가 고과 평정에서 안향을 표창하였고, 곧 판도좌랑으로 승진하였다. 1277년 판도좌랑, 1278년 전중시사를 거쳐 1279년 독로화(禿魯花)[뚤루게]에 선발되어 국자사업으로 승진하였다. 1279년 3월 대방공(帶方公) 징(瀓)을 따라 원나라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로 돌아온 안향은 우사의대부를 거쳐, 1288년(충렬왕 14)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288년 9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89년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원외랑에 임명되었고, 곧 낭중에 올랐다. 1289년 11월 원나라에 가는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세자를 수종하였는데, 1290년 귀국할 때 주자서를 필사하고 공자,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하여 돌아왔다. 1292년 충렬왕이 질환이 있자 안향의 집에 머물렀으며, 1293년에는 제국대장공주가 안향의 집에 머물렀다. 1293년 원나라 세조가 충렬왕에게 추충선력정원(推忠宣力定遠)의 공신호를 내렸는데, 안향이 시를 지어 하례하자 미(米) 50석을 하사하였다. 1294년(충렬왕 20) 부지밀직사사로 동남도병마사를 제수받아 합포에 출진하였으며, 합포에서 안향은 군사들을 위무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294년 지공거로 동지공거 민지(閔漬)[1248~1326]와 함께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 1297년 첨의참리세자이보에 각각 임명되었다.
안향은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참지기무 행동경유수 집현적대학사 계림부윤(參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太學士鷄林府尹)으로 임명되었다. 8월 충선왕과 계국공주가 원나라에 들어갈 때 호종하였다. 1299년 충렬왕이 복위한 뒤 수국사로 승진하였다. 1300년(충렬왕 26) 도첨의찬성사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은 오기(吳祁)[1259~1336], 석천보(石天補) 등의 무고를 당하였다. 이때 첨의중찬으로 치사하였으나, 곧 찬성사로 복직하였다. 1301년 국자감이 수차례의 병화로 허물어지자, 안향은 자신의 저택을 국가에 바치고 서부 양온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토지와 남녀 노비 각 100명을 국자감에 귀속시켰다. 안향은 교육기관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관료들에게 차등 있게 은과 포를 내게 하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섬학전(贍學錢)으로 삼자고 양부(兩部)에 건의하였다.
안향은 1303년(충렬왕 29) 국학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공자와 십철(十哲)의 초상, 문묘 제기, 악기, 6경 및 제자사서(諸子史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이산(李imagefont), 이진(李瑱)[1244~1321]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로 삼았다. 이때 금내학관(禁內學館), 내시(內侍), 삼도감(三都監), 오고(五庫)의 관리, 그리고 7관(七管), 12도(十二徒)의 생도 중 경서 수업을 받은 자가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향은 1303년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고, 1304년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안향의 사적(事蹟)을 모은 『회헌실기(晦軒實記)』는 모두 네 차례 간행되었다. 첫 번째는 1763년(영조 39) 안향의 17대손 안극권(安克權)이 유집사실(遺什事實), 세계비지(世系碑誌), 제현기술(諸賢記述) 등을 편집하여, 1766년에 간행하였다. 이것을 ‘도동본실기(道東本實記)’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1816년(순조 16) 안재묵(安在默) 등이 증보한 것으로, 이때 안향의 연보도 완성되었다. 세 번째는 안명렬(安明烈) 등이 1883~1884년 사이에 간행한 것인데, 이를 ‘태학본실기(太學本實記)’라고 한다. 네 번째는 1909년 후손과 사림이 합의하여 간행한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 연산(硯山) 소장의 목판본으로 이를 ‘연산본실기’라고 부른다. 실기는 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
안향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대덕산에 있는데, 안향 사후에 충렬왕이 내린 장지이다.
상훈과 추모
안향이 1306년(충렬왕 32)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례를 치를 때 7관과 12도의 유생들이 소복을 하고 노제를 지냈다고 한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원나라 화공에게 안향의 영정을 제작하게 하여, 문묘에 봉안하였다. 훗날 흥주의 수령 최림(崔琳)이 이 영정을 모사하여 흥주향교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안향 초상이다. 1319년 조정에서 안향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안향의 문생 신천(辛蕆)[?~1339]이 힘껏 주청하여 종사가 이루어졌다.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안향을 제향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백운동서원은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 받게 된다. 1643년(인조 21)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의 임강서원(臨江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56년(효종 7)에는 14세손 안응창(安應昌)[1603~1680]이 안향의 출생지인 지금의 순흥면 석교리에 영주 안향 향려비(榮州安珦鄕閭碑)[문화재자료 제611호]를 세웠다. 1676년(숙종 2)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의 도동묘(道東廟)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1781년(정조 5) 경기도 개성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신위를 봉안한 안자묘(安子廟)는 원래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천동으로 옮겨졌다가, 1975년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으로 다시 옮겼다.]
취한대(翠寒臺)
[취한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대(臺)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허물어졌다. 그 자리에 다시 터를 닦아 정자를 지었는데 "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詩)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를 따온 것이라 한다. 취한대는 주로 원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장소다.]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
종목 사적 제170호(1969년 5월 28일 지정)
면적 323,110m2
시대 조선 시대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
좌표 북위 36° 43′ 38″ 동경 128° 50′ 16″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69년 5월 28일 사적 제170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개요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에 설립되었다. 영남학파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생가이면서 태실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시작하여 1576년 완공하였다. 1570년 퇴계 이황이 작고하자,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1575년에 선조가 명필 한석봉으로 하여금 쓰게한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되어, 1977년 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1975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1000원 지폐 뒷면의 디자인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관련 문화재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 보물 제210호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기 위한 강당이다. 전교당의 맢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팔작지붕과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 보물 제211호
도산서원 가장 뒷쪽에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강세황필 도산서원도 - 보물 제522호
안동 도산서원 - 사적 제170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이곳 안동 도산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시사단
1553년 이황은 스스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낙향을 하였고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다. 정조는 규장각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이곳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영남인재를 선발케 하고, 이를 기려 1796년 이곳에 단을 마련하고 비를 세웠다.[2]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숲이 사라졌으나 2009년 도산서원과 시사단을 잊는 다리가 가설되었다.
서자 출입 허락 사건
도산서원은 교육기관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기관이었지만, 영남 안동과 주변지역 사림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1884년 서얼들이 도산서원 출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원에서는 끝까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고, 서얼들과 서원 유사(有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서자들의 서원 출입 허락 상소가 계속되자 1884년(고종 21년) 조정에서는 서얼들도 서원 출입을 허용하라는 공문인 관문(關文)을 각 관아와 서원에 하달하였다. 1884년 11월 조정에서 하달한 관문에서 "서원에 서류들의 출입을 허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경주 옥산서원은 곧 서얼의 서원 출입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도산서원은 서자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옥산서원의 사정이지 도산서원은 적용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분개한 서얼들이 단체로 도산서원을 찾아와 드디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서얼들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라고 했다. 서얼들에게 서원의 수노(首奴)들은 몰매를 맞고 "피가 흘러 땅에 가득했고", 유사 등 임원은 서얼들에게 잡혀 "옷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떨어지며 강물에 패댕이쳐지기도" 하는 등 갖은 수모를 입었다. 이를 두고 서원 측에서는 "서원이 창건된 이래 다시없는 극변"이라 했다. 사태가 진정된 후 도산서원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으며, 이를 《도산서원서류사변일기 陶山書院庶類事變日記》라 부른다.
서자들이 출입을 요구하면서 폭력을 행사하자, 결국 관망하던 군청이 개입했다. 1885년 2월 10일 최대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임원 모두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종손에게 욕하고 종택을 파괴하려 한다"며 관아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관아가 개입하자 서얼들 무리 사이에에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남아 있다가 붙잡혀 구금되고 일부는 자기 집안에 끌려가 문벌(門罰)을 받았다. 문벌을 받은 서얼들은 관아의 판결에 불복하고, 이후 안동권 곳곳의 다른 서얼들과 연합하여 대립했다. 결국 서자들과 도산서원의 갈등, 대립은 4년 1개월간 계속되었고, 결국 1888년 12월 서자들의 출입 요구가 관철되었다.
안동 병산서원(安東 屛山書院)
비어 있음 미학의 절정
안동 병산서원(安東 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1978년 3월 31일 사적 제260호에 지정되고, 2010년 7월 31일과 2019년 7월 10일 각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개요
고려 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선조 5)에 서애 류성룡이 안동으로 옮겨오면서부터 병산 서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 광해군 5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인조 9)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 14)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았으며, 유림 선현을 모시고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옥산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중복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2010년 7월 31일에 하회마을의 일원으로 먼저 등재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도 등재되어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
목차
역사 속으로 떠나는 여행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다
성리학적 자연관, 만대루
비대칭의 대칭, 입교당
서원 건축의 특성
물새는 푸른 병산 아래 날고
역사 속으로 떠나는 여행
병산서원(屛山書院) 가는 길, 낮게 드리운 구름, 안동 풍산의 너른 들판을 돌아 강 언덕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분다. 확 펼쳐진 강변, 굽이치는 물줄기, 참 상쾌하다. 흰 모래톱의 병산 더욱 푸르고 초록 강물 사이로 날아가는 백로 더욱 희다. 사과밭에서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아직 산모퉁이를 돌지 않아 서원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벌써 병산서원에 가 있다. 서원 앞 낙동강변에는 늙은 소나무가 묵묵히 서 있다. 5월의 햇살이 병산 앞 강물, 백사장에 눈이 부실 듯 내린다. 녹음이 싱그러워 초록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병산을 바라보노라면 시, 바람, 아련함, 세월······ 이런 것들이 읽힌다. 강물은 유유히 역사 속으로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사랑도 흘러 함께 그 역사 속에 파묻힌다.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다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있던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豊岳書堂)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다. 선조 5년(1572년)에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 1542~1607년)이 풍산현 북쪽에 있던 서당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5년(1613년)에 존덕사(尊德祠)를 건립하면서 향사의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되었다. 그 후 철종 14년(1863년)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병산서원은 낙동강 건너 병풍 모양의 아름다운 병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북고남저의 지형에 따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남쪽으로부터 외삼문인 복례문(復禮門)을 지나 만대루(晩對樓) 누각 아래로 오르면 좌우로 동·서재가 있고 정면으로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사당은 입교당 뒤편 동쪽으로 살짝 비껴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의 부속건물로는 고직사와 장경각이 있다.
성리학적 자연관, 만대루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는 멀리서 보면 기둥 위에 지붕이 덩그마니 놓인,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다. 누각을 지탱하는 기둥과 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한 부재와 장식적 공간을 극도로 절제한 건축의 멋, 바닥 평면과 기둥 높이 그리고 지붕의 물매 등 상큼한 비례가 눈맛을 시원하게 한다. 건물 안의 인공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가 된 공간이다. 이 누마루는 유생들이 학문과 열정을 토로하며 우주 질서와 자연 순환을 탐구하던 성리학적 이상향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누각에 오르면 화산의 울창한 송림과 함께 낙동강과 병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기둥 사이로 바라보이는 낙동강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우물마루에서 배어나는 윤기에서 세월의 힘을 실감한다. 덤벙주초에 자연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위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 기둥들이 정제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참으로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선비의 꼿꼿하고 청청한 정신이 아래 위층 건물에 동시에 살아나 있다.
만대루의 ‘만대’는 당나라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다. 보름 병산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만대루 앞 방형 연지에 비치고 서원 안마당에 달빛이 가득 내리면 병산서원은 그야말로 시적 공간이 된다.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백미요, 비어 있음 미학의 본보기이다.
비대칭의 대칭, 입교당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인 병산서원 입교당은 만대루 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전면 높은 석축단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경상도 절집의 진입 공간이 누마루를 지나 대웅전 영역에 진입하는 방식과 똑같다. 이는 백제계 사찰 건축에서 보이는 누각을 끼고 돌아드는 방식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데, 산지 지형이 대부분인 경상도 지역에서 행했던 공간 활용의 좋은 예이다. 입교당은 유생들이 배우고 원장과 강사가 기거하는 서원의 중심 공간이다.
입교당 동쪽 대청 온돌방 명성재(明誠齋)는 반칸 목을 퇴(退)로 개방하였으나, 서쪽 온돌방인 경의재(敬義齋) 앞은 좁은 툇마루를 내달아 언뜻 보면 대칭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비대칭의 구도로 조화를 이루도록 구성하였다. 대청의 전면은 창호나 벽을 설치하지 않고 개방하여 만대루의 트인 공간 사이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교당의 앞마당은 가로 세로 12미터 내외의 마당이다. 안동 사대부 종가의 ㅁ자집 안마당을 보는 듯하다.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보편적 미감의 결과물이리라. 마당 동쪽에는 ‘동직재(動直齋)’, 서쪽에는 ‘장서실(藏書室)’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동·서재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동재는 고학년, 서재는 신참 유생이 사용하는 곳이다. 언뜻 보기에는 양쪽 입면이 비슷해 보이나 실은 엄격한 비대칭이다. 문살의 칸수도 틀리고, 퇴의 개방도 다르다. 한국 미의 특징 중 하나인 비대칭의 대칭이다.
병산서원은 입교당 앞뜰을 건물과 울타리 담으로 막아서 경내와 경외를 뚜렷이 구분하였지만, 만대루의 트인 공간을 통하여 시각적으로는 완전히 개방된 공간으로 꾸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서원 안으로 끌어들인 특이한 조원이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산수가 없으면 감정을 순화하지 못하여 사람이 거칠어진다. 산수란 멀리서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큰 포부를 갖게 하여 인물을 만들어내고, 가까이 대하면 심지를 깨끗하게 하고 정신을 즐겁게 한다.”고 했다. 서원이 산수경치가 빼어난 곳에 위치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서원 건축의 특성
조선 건축은 온돌방과 마루가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온돌방은 벽으로 둘러싸인 따뜻한 공간으로서 외부에 폐쇄적인 반면, 마루는 사방으로 트여 있어 개방적이고 시원한 공간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은 가을부터 봄까지 머무는 겨울 공간이며, 마루는 여름 공간이다. 한옥은 자연의 일부이다. 온돌방은 벽과 창호로 실내를 한정해 자신만의 은둔세계를 만들지만, 대청마루는 외부로 트인 공간이어서 주변 자연 속에 건물이 그대로 스며드는 개방적인 공간이 된다. 특히 사방으로 트인 누마루는 자연에 자신을 투영해 세계를 관조하게 하는 공간을 만든다. 반면에 건물과 담으로 둘러싸인 뜰은 늘 고요가 배어 있는 여백의 공간으로 있는 그대로 머물며 하나의 작은 세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조선 건축의 특성은 살림집, 사찰, 궁궐, 누정(樓亭) 건축 등 모든 건축에 나타나는데, 특히 서원에는 이러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서원은 성리학적 가치관과 자연관이 반영된 물리적 표상이다. 서원 건축에는 절제되고 단아한 건축 형식과 질서 그리고 자연과 인공을 합일하려는 공간 처리와 배치 형식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이 극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성리학의 미학으로 만들어낸 조선의 사랑방 가구와 석물에서 보는 것과 같은 또다른 형식의 질박한 조형미이기도 하다.
물새는 푸른 병산 아래 날고
무심의 경지, 말없이 빛나는 침묵을 본다. 강변 넓은 백사장 옆 언덕에는 노송들이 꿈틀거리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병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병산에서 하회까지 가는 길이 걸어서는 10리. 늘 한번 걸어보고 싶었던 길이다.
만대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강은 그렇게 흐르고 있다. 수목과 바위 절벽 병풍을 둘러친 병산 아래 강물이 흐르고 백사장 흰 모래는 태초의 고독을 간직한 듯 고요하다.
초여름 햇살에 그림자 진 산 이편과 물 저편이 어우러져 이루어낸 한 폭의 산수화를 무심히 바라본다. 물새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여울물 굽이치는 소리는 들릴 듯하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智者樂水)라.”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더니, 산 좋고 물 좋은 병산서원에서 공부했던 유생들은 모두 어질고 지혜로웠을까. 지금도 풍광이 아름다운데, 그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절집 경치가 너무 아름다우면 고승이 안 나고, 서원 경치가 너무 좋으면 공부가 안 된다는데, 이곳 유생들은 공부가 잘되었을까. 아니면 산천경개의 빼어남에 취해 학문의 열정을 날려 보냈을까. 괜히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12시 정각, 군내 버스는 덜컹덜컹 마른 먼지를 뿌리며 빈 차로 떠나고, 서원 앞뜰에는 오후 햇살이 나른하게 내린다. 물새는 푸른 병산 아래 날고, 버스는 떠나고, 그렇게 세월은 간다.
경주 옥산서원(慶州 玉山書院)
종목 사적 제154호(1967년 3월 8일 지정)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옥산리)
좌표 북위 36° 0′ 42″ 동경 129° 9′ 46″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경주 옥산서원(慶州 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67년 3월 8일 사적 제154호에 지정되고, 2010년 8월 1일 양동마을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19년 7월 10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재차 등재되어 2관왕이 되었다.
개요
경주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이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 1573년에 선조로부터 ‘옥산’이라 사액이 내려졌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839년(헌종 5)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무변루,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동재 민구재, 서재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회재 이언적은 관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종가가 있는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의 근처 경주시 안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옥산서원을 세웠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독락당 주변 청절(淸絶)한 냇물을 끼고 있는 바위 다섯 곳에 각각 관어대(觀魚臺)·탁영대(濯纓臺)·세심대(洗心臺)·징심대(澄心臺)·영귀대(詠歸臺)라 이름한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있으며,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서원인 만큼 안동의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양대(兩大) 서원 역할을 했고, 나아가 한국 성리학의 연총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서원 중 하나로 한석봉, 김정희, 이산해 등 당대 명인의 친필 현판이 남아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된 47개의 서원에 당연히 포함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2010년 8월 1일 양동마을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19년 7월 10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재차 등재되어 2관왕이 되었다.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은 한훤당 김굉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2007년 10월 10일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종목 사적 제488호(2007년 10월 10일 지정)
면적 8,891m2
시대 조선시대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좌표 북위 35° 42′ 4.47″ 동경 128° 22′ 17.67″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개요
달성 도동서원은 조선 오현의 한 사람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68년(선조 1)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우고 쌍계서원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그 후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여 사우를 중건하고 당시의 동명이 보로동 이었으므로 보로동서원이라 불렀다. 그 후 2년 뒤인 1607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면서 공자의 도가 동래하였다는 의미로 도동서원이라고 하였다. 이때 동(洞) 이름도 도동리로 개칭되었다. 1678년(숙종 4)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하였다.
중정당ㆍ사당ㆍ담장
- 보물 제350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이곳 달성 달성 도동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양 남계서원(咸陽灆溪書院)
사적 제499호.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서원으로 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전사청·명성당·양정재·보인재·애련헌·영매헌·풍영루·묘정비각·고직사 등이 있다.
건립시기·연도 : 1552년(명종 7)
규모(면적) : 4,810㎡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499호 지정일 : 2009년 5월 26일
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藍溪)’라고 사액되었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羅村: 현재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634년(인조 12)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강익(姜翼)을 제향하고 1642년(인조 20) 유호인(兪好仁)과 정온(鄭蘊)을 병향하였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 정온을, 1689년(숙종 15)에 강익을 본사(本祠) 올려 배향하고, 1820년(순조 20) 정홍서(鄭弘緖)를 별사에 모셨다. 이후 1868년 별사는 훼철(毁撤)되었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전사청(典祀廳)·명성당(明誠堂)·양정재(養正齋)·보인재(輔仁齋)·애련헌(愛蓮軒)·영매헌(詠梅軒)·풍영루(風咏樓)·묘정비각(廟庭碑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성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集義齋)라 하며,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동재(東齋)인 양정재와 서재(西齋)인 보인재에는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이 서원은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2009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은 『어정오경백편(御定五經百編)』·『고려사(高麗史)』 등 59종 317책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만 4500여 평, 대지 6000평, 임야 1.5정보 등이 있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서원으로 1590년(선조 23)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1975년 4월 2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지정일 : 1975년 4월 23일
소재지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379번지
1975년 4월 2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5,821㎡이다. 1590년(선조 23)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24년(인조 2) 다시 세웠으며, 유생들의 소청으로 1662년(현종 3) ‘筆巖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1672년(현종 13)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어 1786년 양자징(梁子徵)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호남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사액서원 (賜額書院)이다.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는 정면 3칸, 측면 3칸, 상하 18칸의 2층 기와집으로 지어져 두 차례에 걸쳐 중·개수되었고, 문루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다. 문루를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의 단층 기와집 강당인 청절당(淸節堂)이 보이는데, 이 건물에는 9칸 대청과 좌우 3칸의 협실(夾室)이 있고, 대청에는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편액이 있으며, 처마 밑에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의 글씨로 사액된 ‘筆巖書院’이라는 편액이 있다. 그 뒤편 서쪽에는 숭의재(崇義齋)가 있고, 동쪽에는 진덕재(進德齋)가 있으며, 숭의재 옆에는 3칸의 경장각(敬藏閣)이 위치한다. 경장각에는 조선 12대 왕이었던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김인후에게 그려 하사한 <묵죽도> 목판이 보관중이었으나 도난당하였으며, 이후 목판화를 참고하여 다시 제작한 목판은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매년 4월에 하서(河西) 김인후를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열린다. 2019년 7월 안동 도산서원, 영주 소수서원 등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이때 장성 필암서원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정읍 무성서원(井邑武城書院)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최치원(崔致遠)과 관련된 서원. 교육시설. 사적.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사적 지정일 : 1968년 12월 19일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고, 고려 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송세림(宋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과 1675년(숙종 1)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祠宇)·현가루(絃歌樓)·명륜당(明倫堂)·강수재(講修齋)·흥학재(興學齋)·고사(庫舍) 등이 있다.
사우는 1884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과 측면 3칸에 홑처마 맞배기와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최치원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신잠·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는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바닥은 흙으로, 2층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28년(순조 28) 중건되었다.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이다. 명륜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의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인 각 4칸의 장수재와 흥학재는 숙종 때 건립되었다가 이후 중수한 것으로,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기범연의(箕範衍義)』 1책 등 40여 종의 전적이 있다.
1968년 12월 1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무성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논산 돈암서원(論山 遁岩書院)
논산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은 사계 김장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93년 10월 18일 사적 제383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종목 사적 제383호(1993년 10월 18일 지정)
면적 5,548m2
시대 조선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임리)
좌표 북위 36° 12′ 32″ 동경 127° 10′ 49″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논산 돈암서원은 1634년(조선 인조 12)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건립하였다. 1659년(효종 10) 및 1660년 (현종 1)에 두 번의 사액을 받았다.
1658년(효종 9)에 김집(金集), 1688년(조선 숙종 1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조선 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하였다.
1871년(대한제국 고종 8년)의 전국적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1881년(고종 18년)에 이르러 숲 말의 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조금 높은 지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립
돈암서원은 본래 현재 위치의 서북쪽 1.5km 떨어진 임리 숲말에 있었다. 연산천에 가까이 있고 지대가 낮아 수해를 입어 1880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 숲말에 돈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본래 은둔하는 곳이다라는 뜻의 둔암에서 온 말이다. 김장생이 은둔하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쓰고자 했던 마음이 담겨 있다. 김장생은 양성당을 지으며 기록한 글에 대둔산이 남쪽에 있고 북쪽에는 계룡산이 솟았다고 했으며 양성당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산을 우러르며 즐기고 시내를 내려다보면 물을 살피며 자연 경물을 접하는 대로 이치를 깨닫는다"고 적었다.
배향 인물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문화재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論山 遯岩書院 凝道堂) : 보물 제1569호
돈암서원유경사(遯岩書院惟敬祠)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양성당제영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 대전역사박물관 소장
돈암서원 책판 : 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9호
정회당 :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천호산 고운사에서 수학하던 건물로 1954년 돈암서원으로 옮겨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이곳 논산 돈암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한국 서원 9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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