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밥값 한 날
박래여
남편의 초등학교 총 동창회 날이다. 햇살은 따갑고 바람은 선들거렸다. 남편은 동창회에 가고 나는 책속에 빠졌다. 읽을 책이 여러 권 왔다. 오태규 작가의 수필집과 소설집 중에 장편 소설 『친구 줄리앙』을 폈다. 예전에 『우시아로 가는 길』도 재미있게 읽었다. 산문집과 함께 보내주신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 책도 한 권 보내드려야 하나. 망설이다 만다. 개인 작품집을 내는 것도 어렵고 지인에게 보내는 것도 어렵다. 꾸준히 개인 작품집을 내는 작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어떤 작가의 부인이 하소연을 한다. 남편은 돈만 모이면 책을 낸단다. 생활에 보탬도 주지 않는 책을 꾸준히 내는 것을 말릴 수도 없단다. 자신이 벌어야 생활고를 면하는데 글쟁이 남편은 가족의 생계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내는 것을 행복으로 아니 답답할 때도 많단다. 글을 쓰는 남편을 만났으니 감수해야 할 일이지만 솔직히 힘들 때도 있다고 토로한다. 글쟁이로서 자신의 작품집을 묶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원고가 한권 분량이 되면 묶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문인도 많다.
나도 오랫동안 작품을 발표하면서 단행본으로 묶어줄 필요성을 느꼈었다. 자비는 힘들어 창작기금을 받았으면 싶었으나 엄두를 못 냈었다. 오래 전,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창작 기금에 서너 번 도전 했지만 그때마다 고배를 마시고는 포기했었다. 지난해는 운이 좋았다. 이런 저런 창작지원금 제도가 있는 줄도 모르다가 후배 문우가 알려주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아이들 손을 빌려 신청했었다. 막상 창작지원금을 받게 됐지만 오랫동안 발표한 작품 중에 어떤 것을 간추려 묶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등단작과 문학상을 받은 중단편 작품으로 첫 소설집을 묶었다. 출간을 했지만 또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책을 포장해서 보내는 것도 번거롭고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지난해부터 농사를 대폭 줄인 덕에 온종일 책과 글쓰기로 보낼 수 있어 좋은데. 막상 시간이 널찍하니 몸과 열정이 따라주지 않아 쓸쓸하다. 날밤을 새우며 글이 쓰고 싶을 때는 할 일이 왜 그리 많았는지 틈을 내기 어려워 힘들었는데. 막상 내 시간이 주어지자 몸이 따라 주지 않아 힘들다. 책 읽다 지치면 컴퓨터 앞에 앉고, 허리가 뻐근해져 오면 마당을 거닌다. 바깥나들이 할 일도 드물어 온종일 혼자 노는 편이다.
동창회에 다녀온 농부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감꽃 솎으러 간다. 류인혜 수필가의 『나무를 읽는다』독후감을 쓰고 나니 해거름이다. 빨래를 걷어 들이고 저녁 준비를 한다. 일상은 늘 변함없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풀빛도 다르고 풀의 크기도 달라져 있다. 어린 고추모종을 심어놓은 텃밭에 들어선다. 두더지가 뒤져 놓은 곳은 고추 모가 기운이 없다.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에 한 눈 팔면 고추의 생명 줄이 끊어진다. 고추 골에 들어서 자근자근 밟아준다.
농부가 왔다. 저녁은 나가서 먹잖다. 흔쾌히 따라나섰다. 단골 쇠머리 국밥집에 갔다. 손님이 많다. 동창회에 참석했던 농부의 후배들이다. 낯익은 얼굴도 있고, 낯선 얼굴도 있다. 인사하기 바빴다. 국밥집 사장님도 서빙 하는 사람도 언니아우 하는 사이다. 인정스러운 사장님은 쇠머리국밥을 넉넉하게 퍼준다. 갓 지은 밥도 고슬고슬 맛있다. 주인은 내가 소설책을 낸 줄을 알지만 책 한 권 달라는 말은 못하고 눈치만 봤다. 내친김에 책 두 권에 사인을 해서 줬다.
“오늘 저녁 밥값은 안 받을래요. 책을 사서 봐야 하는데. 고마워요. 언니”
“책은 선물이고, 밥은 사 먹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막무가내다. 거기다 토마토농사 짓는 집에서 못난이를 가득 갖다 줬다고 커다란 봉지를 내민다.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채소다. 나는 올리브유에 마늘 다진 것, 매운 고추를 넣어 볶다가 토마토를 굵직하게 썰어 넣고 달걀을 푼 후 굵은 소금으로 간해서 반찬으로 먹는다. 토마토 버무리라고 한다. 토마토를 생으로는 잘 먹지 않는데 반찬을 만들면 잘 먹게 된다. 귀한 토마토 선물까지 받았으니 횡재했다.
더구나 농부는 일몰이 아름다운 강변 드라이브를 시켜준다. 강물을 바라보며 둑길을 걸었다. 겨우 피기 시작한 개양귀비와 수레국화가 아름다운 둑길이다. 둘만의 오붓한 저녁 산책길에 농부의 자상한 마음이 깔려 해거름으로 내린다. 책이 밥값 한 날,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행복이 내 가슴을 따라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