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스 베버 강연(1919) 후의 독일
■ 나치의 발흥(1)
대공황은 독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사람들은 바이마르 정부가 독일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였고, 결과적으로 나치당의 인기가 치솟게 되었다.
뮌헨 봉기 이후 히틀러의 전략에 변화가 있었다. 뮌헨 봉기 이후 나치당은 금지되었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스스로를 최고지도자로 하여 당을 새로이 일으켜 세웠다.
1920년대 중반까지, 슈트레제만 하의 독일의 경제상황은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나치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지가 사라졌고 쿠데타를 통한 정부의 전복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
히틀러는 전략을 바꾸었다. 그는 이제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 권력을 얻고자 노력했다. 나치당은 지역정당으로 머무르지 않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확대되었으며, 정당의 신념을 알리기 위해 프로파간다를 이용했다.
대공황이 빈곤과 고난을 야기했다. 대공황은 독일 내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1933년까지 6백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1931년 독일 최대 은행이 파산했다. 이것으로 전쟁 배상금의 지불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 시기 바이마르 정부는 여러 번의 변화를 겪었지만, 그 누구도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대공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에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부가 그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에 희망을 걸었다.
나치당과 같은 극단주의자 단체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내세워 더욱 인기를 얻었다. 공황 시기 나치당의 인기는 커져만 갔다. 나치는 부유함을 약속하였고 독일을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는 많은 실업자, 기업인, 청년들이 매력을 느끼게 했다.
일부 사람들은 나치의 반공, 반 유대인 사고방식을 지지했다. 1930년 나치 당원은 300,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나치은 정치권 한 귀퉁이의 소규모 극단주의자 단체로 머물러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공황은 그들에게 주류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 나치의 발흥 (2)
1930년의 선거 결과는 나치당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1930년 선거는 나치의 득표수 증가를 보여주었다.
하인리히 브뤼닝(Heinrich Brüning) 수상은 국회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나치당(107석 확보) 과 공산당(77석 확보)의 의석수가 크게 증가했다. 어느 정당도 국회에 대한 지배권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브뤼닝은 긴급조치 하에 통치하여야 했다. 독일은 강력한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32년 4월까지도 독일의 상황은 심각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국가는 강력한 정부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힌덴부르크(Hindenburg) 대통령은 그의 임기종료일이 가까워지자, 재선에 출마했다. 히틀러는 그에 맞서 출마하였고, 공산당 후보 또한 있었다. 국가적 영웅이었던 힌덴부르크는 쉽게 당선될 것이라 믿었으나, 첫 번째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두 번째 무기명 투표에서는 53%의 표를 얻어 36.8%를 얻은 히틀러를 이겼다.
힌덴부르크는 나치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힌덴부르크는 국회의 지지를 받는 수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경험이 부족했던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을 지목했다.
1932년 7월 국회 선거에서, 나치당이 230석을 확보했다. 이제 그들은 가장 큰 정당이 되었으나, 국회의 과반수를 넘지는 못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수상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거부하였으며, 폰 파펜을 고수했다.
■ 나치의 발흥 (3)
나치당은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다. 나치당은 선거에서 의석을 잃게 되었다. 1932년 11월 선거에서 나치당은 34석을 잃었으며, 그들의 인기가 하락하는 듯 했다.
힌덴부르크는 수상의 자리에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를 지목했다. 폰 슐라이허는 나치의 다른 지도자인 그레고르 슈트라서(Gregor Strasser)에게 부 수상의 자리를 맡을 것을 요청함으로써 나치의 내분을 꾀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슈트라서의 수락을 제지했다.
곧 힌덴부르크는 굴복하였으며, 1933년 1월 히틀러에게 수상의 자리를 제안하게 되었다. 1933년 3월 히틀러는 나치당이 국회 안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얻기를 바라며, 또 한번의 선거를 요청하기로 했다.
나치는 1933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비열한 짓을 했다.나치당이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1) 그들은 뉴스 매체를 통제했다.
2) 경쟁자 측의 집회가 금지되었다.
3) 나치 돌격대를 이용하여 반대측에 테러를 가했다.
4) 국회에 화재가 났고, 히틀러는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려 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자극했다. 공산당원의 대규모 체포가 뒤따랐다.
5) 히틀러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취하였고, 권력을 이용하여 공산당 유권자들을 위협했다.
히틀러는 하룻밤에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다.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다른 정치 정당들이 독일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자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상승했다.
■ 히틀러 정권 장악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나자 그는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법을 바꾸었다.
나치당은 288석을 얻었으나 과반수를 넘지 않았으며, 공산당이 여전히 81석을 확보했다. 이에 히틀러는 공산당은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수권법안(Enabling Bill)을 제출하기 위한 의회 내에서의 충분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법안은 1933년 3월 위협과 협상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그가 의회 없이 4년간 통치할 수 있도록 하였고, 다른 모든 정당들은 불법화 했다. 히틀러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ㅡ피의숙청사건(The Night of the Long Knives)
여전히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으며, 그는 나치 내부의 경쟁자를 우려했다. 가장 큰 위협은 나치 돌격대(400,000명 이상)를 통제하고 있는 에른스트 룀(Ernst Röhm)이었다. 1934년 29~30일, 히틀러는 사람을 보내 룀과 그 일당을 체포했다. 이 사건은 ‘피의숙청사건’이라 불린다.룀, 슈트라서, 폰 슐라이허를 포함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살해 당했다. 모든 잠재적 반대세력들은 뿌리 뽑혔다.
한달 후 힌덴부르크가 사망했다. 히틀러는 수상과 대통령직을 겸임하고 군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퓌러(Der Führer: 총통, 지도자)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독재의 시작이었다. 독일은 이제 강력한 지도자 하에 있었다.
독일은 여러 지구로 재편되었다. 각각의 지구는 가우(Gau: 복수는 Gaue)라 칭하였으며, 이를 가우라이터(Gauleiter: 충성도 높은 나치)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 위로는 히틀러가 조언을 구하는 라이흐스라이터 (Reichsleiter)가 있었다. (프로파간다를 담당했던 괴벨스(Goebbels)와 독일 경찰을 담당했던 히믈러(Himmler) 등).
최 상층에는 절대적 지배권을 가진 퓌러가 있었으며, 이는 히틀러 자신이었다. 생활의 모든 측면들이 주의 깊게 통제되었으며, 충성스러운 나치당원 만이 성공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권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치당이 선거에 승리하자 독일은 순식간에 민주 국가에서 독재국가로 바뀌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수상, 대통령, 그리고
군의 총 사령관을 아우르는 절대권력으로 만들었다.
■ 나치 통치 방법
나치는 독일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설득에서부터 폭력까지 여러 방법을 사용했다. 나치는 프로파간다를 이용했다. 프로파간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특정 사상이나 관점을 널리 퍼뜨리는 것을 말한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독일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 대부분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렸다.
나치는 미디어를 탈취했다. 그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제했다, 그리고 영화와 포스터들도 그들의 메시지를 알리는데 이용되었다.
국민 계몽 선전부(Ministry of Public Enlightenment and Propaganda: 1933년 설립)는 요제프 괴벨스에 의해 주도되었다. 모든 예술가, 작가, 언론인, 음악인들은 작업 허가를 받기 위해 신고를 하여야 했다.
나치는 권력과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대규모의 당원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또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국제적 관심을 끌기 위한 기회로 이용했다.
나치는 검열을 실시했다. 나치는 서적, 신문, 그리고 다른 매체들도 검열했다. 반 나치 매체를 발행하는 사람은 처형의 위험을 감수하여야 했다. 나치는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검열을 이용했다. 그들은 바그너(Wagner)와 같은 애국적 독일 작곡가들은 칭송하였으나, 멘델스존(Mendelssohn)과 같은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은 금지했다.
독일은 경찰 국가가 되었다. 나치 친위대(SS: Schutzstaffel)는 히틀러의 친위대로 시작되었다. 1930년대 그들은 히믈러의 지도력 아래서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다. 조직원들은 히틀러에게 전적인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그들의 잔인함으로 인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히믈러는 비밀 경찰인 게슈타포(Gestapo) 또한 맡고 있었다.
1933년 이후 정치범이나 나치에 위협이 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을 수감하기 위한 강제 수용소가 독일과 그 주변지역 전역에 만들어졌다. 이들 중 일부는 이후에 죽음의 수용소로 바뀌게 된다.
독일인들이 나치에 충성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역 감시인들이 고용되었다. 사람들은 충성스럽지 못한 행위들을 신고 하도록 장려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게슈타포에 체포 당했다.
나치는 교회를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많은 나치당원들은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평화에 대한 가르침은 나치의 사상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그들을 즉시 공격하는 모험을 감수하지는 않았다.
1933년 히틀러는 가톨릭 교회와 합의안에 서명했다. 양측은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교회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노력하였고, 나치의 정책에 반대하는 가톨릭의 항의를 무시하였다.
히틀러는 서로 다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들을 하나의 라이히 교회(Reich Church)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나치 주교인 루드비히 뮐러(Ludwig Müller)를 수장으로 했다. 일부 교회 구성원들은 이러한 국가의 간섭에 분개하여 떨어져나가,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만들었다.
나치 체제에 맞섰던 많은 성직자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