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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우리 대중 음악에 관해 제대로 정리된 자료를 대하기도 쉽지않는 서글픈 현실이기는 하더라도 이웃나라 '일본 대중음악' 이라고 하면 제대로 알아보려는 생각도 없이 대충대충 별생각없이 사는 자들이 대부분인지라 막말로 알고 지꺼리는 자도 없을 뿐더러 제대로 아는게 없으니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지 일본음악이라면 그저 두루뭉수리 '엔카(演歌)'라고 대충 넘어가버리는 블로거(심지어 어떤 블로거에는 "엔카 포크송"이라는 게시판을 버젓이 구분해 놓기도 한다.ㅠㅠ)가 대부분인 실정에서... 이리저리 웹서핑을 하던중에 네이버 블로거 중(( http://blog.naver.com/jinurock/)에서 'J-Pop의 역사'라는 표제의 글이 눈에띄어 자세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특정 아이템의 근원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정리해두는 습성을 지닌 일본인들 답게 단행본[『J-ROCKベスト123』(講談社文庫 1996年 6月)]으로 발간된 것을 이 블로거(?)가 입수. 번역 정리한 자료라고 표시하였다.
이전부터 '언제 일본 출장시에 서점에 들러볼 기회가 있으면 찾아봐야겠다.'고 작정 했던차에 얼른 스크랩해두고 나름대로 수정정리 해둘 작정이다.
물경 한 세기전에 우리나라를 침략. 식민지 수탈을 계속한 것이 무려 36년간이니 근대화 이전의 문화는 대부분 말살되고 글과 말 뿐이 아니라 사고방식까지 큰 영향을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오늘날. (사실상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니.. 실제적으로 1905년부터 대한제국이 망했다)
지나가버린 쓰라린 치욕의 흔적을 붙들고 한탄을 한들 별무소용이니 그들이 먼저 도입하고 깔끔하게 정리해논 자료를 응용하여 그나마 주변에 나뒹구는 변변찮은 자료를 근거로 우리의 대중음악의 역사 개요도 더듬어 볼겸 아래와 같이 정리해본다.
※뭐 대단한 학술논문 발표도 영리를 목적으로하는 전문적 정견발표 같은 것도 아닌지라 내가 먼저 읽어보고 문맥의 전체적 흐름에 이상이 없는 범위내에서 교정의 차원으로 가끔 중복되어 눈에 거슬리는 띄어쓰기 받침, 단어 정도를 수정정리한 것임(그래도 완전하지는 않다.)을 밝혀둔다.
日本 大衆音樂(J-Pop) 槪觀.
제1차 세계대전후에 있어서 일본 팝음악의 출발점은 「진주군 POP」이었다. 1945년부터 195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미군이 가지고온 팝의 영향을 받아, 블루스, 부기우기, 맘보 등의 요소가 유행가에 스며들고, 하와이안, 컨츄리 & 웨스턴(C&W), 재즈 등이 상당한 붑을 이루었다. 이러한 팝중에서 "일본 락"의 탄생에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진 것은 C&W였다.
5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Bill Haley & His Comets의 「Rock Around The Clock」이 크게 히트하고(1955년), 다음해에는 엘비스 프레슬 리가 등장하는 등, Rock&Roll/Rockabilly(1950년대 말에 유행한 음악으로 컨트리 음악의 악기로 록을 연주한 것)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때마침 C&W 붐으로 이미 인기가 있었던 小坂一也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를 리메이크해 히트함에 따라(1956년 6월), 단숨에 로커빌리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프레슬리의 곡을 리메이크해 젊은이들을 열광시티는 小坂를 보고, 다른 C&W밴드들도 계속해 로커빌리화하고, 58년이 되자 平尾昌章, 미키카치즈, 山下敬二郞의 "로커빌리의 세남자"가 모여 음반데뷔한다. 2월에는 渡 프로덕션이 주최한 로커빌리 축전 「제1회 日劇 웨스턴 카니발」이 열리면서, 로커빌리 붐은 본격화 된다.
일본의 로커빌리 가수들은 당초 오리지날 Rock&Roll(미국의 Rock & Roll)/Rockabilly의 리메이크에 열중했는데, 59년이 되자 상황이 변하게 된다. 리메이크 히트는 후퇴하고, 진짜오리지널곡에 의한 히트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리지널곡의 선구자「星はなんでも知っている」(平尾昌章/58년 7월)가 판매량 15만장을 기록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후 대부분의 로커빌리 히트 넘버들이 가요곡화되고, 로커빌리붐은 급속하게 식어가고 만다.
※이 글은 『J-ROCKベスト123』(講談社文庫 1996년 6월)을 번역해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2.Teen Pop의 유행(1960-1963) J-Rock의 역사
곡의 오리지널화, 가요곡화에 의해 로커빌리붐은 식어갔지만, 일본음악 전체의 미국지향에 변화는 없었다. 미국을 뒤쫓아 가기라도 하듯 「Rock&Roll의 종언↓ 로커빌리의 소프트화」라는 길을 걷게 되고, 6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에서도 백인중산계층의 오락용 유행가요(팝송)가 열병처럼 번지며 유행하게된다.
이시대의 일본 음악을 특징지우는 것은, 흔히 말하는 「번역 POP」이다. 새로운 감각을 가진 번역 작사가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이들이 그린 일종의 "아메리칸드림"을 전후세대의 젊은 가수들이 노래하면서, 일본의 10대들이 열광하는 새로운 바탕이 생겨나게된다.
번역POP시대를 연 것은 로커빌리의 세남자가 닐세데카의 「戀の片道切符」를 리메이크한 60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59년 6월의 후지TV 「The Hit Parade」의 방송개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TV라는 "뉴미디어"속에서의 이 프로그램은 번역POP의 보급에큰 공헌을 했을뿐만아니라, The Peanuts 등의 빅스타도 길러내는 등 후에 pop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원형이 되기도 하였다.
이시기에 등장하고 활약한 남성 아이돌에는 ダニ一飯田와 パラダイス キング(보컬은 坂本九), ブル- コメッツ(보컬은 鹿內孝), スリ-ファンキ-ズ, 飯田久彦, 竹田公彦, 佐 木功, ほりまさゆき 등이고, 여성 아이돌에는 Peanuts, 森山加代子, 中尾ミエ, ベニ シスタ-ズ, 靑山ミチ, 梅木マリ, 安村昌子, 渡 トモコ 등이 있다.
번역 Teen Pop기에는 62년의 트위스트붐으로 그 정점을 맞이한다. 일본에서의 붐은 Chubby Checker의 「The Twist」의 리메이크로 시작해서, 藤木孝 등의 트위스트 명인을 낳기도한다. 트위스트붐이 끝날 즈음에는 아메리칸드림의 일본적 수용스타일의 하나였던 번역 Teen Pop은 로커빌리와 마찬가지로 오리지널화를 통해서 사라져간다.
또한, 번역 Teen Pop말기인 63년에 坂本九의 「上を向いて步こう」가 「SUKIYAKI」란 영어제목으로 미국 빌보드차트 1위를 차지하게된다. 이러한 성공으로 이후 일본 대중음악계는 미국시장으로의 진입을 계속해서 시도하게 된다.
3.일렉트릭 인스트루멘탈 락의 파도(1964-1965) J-Rock의 역사
일반적으로 미국 팝씬을 모방하고 있던 것이 당시 일본 대중음악계의 모습이었지만, 도쿄올림픽 개최연도인 64년을 고비로 독자적인 방향을 가기 시작한다. 이해에 미국이 비틀즈중심의 전개를 보인것에 비해, 일본은 ベンチャ-ズ로 대표되는 일렉 인스투루멘탈 락 중심의 전개를 보인 것이다.
우선, 미국의 무명 인스트루멘탈 밴드인 アストロノウツ가 "서핀 붐"에 불을 붙였다. ベンチャ-ズ를 방불시키는 그들의 「太陽の彼方に」가 좋은 평가를 받고, 이곡에 일본어가사를 실은 藤本好一(블루진즈)의 리메이크송이 크게 히트하고, 또한 橋幸夫의 일본제 서핀 「戀をするなら」의 폭발적인 히트에 의해, 일본의 서핀 붐은 정점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アストロノウツ의 선배격인 ベンチャ-ズ의 인기도 올라가고, 64년부터 65년에 걸쳐서 「パイプライン」「キャラバン」등의 곡을 연속히트시키면서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 일렉 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것에 영향을 받아, 寺內タケシ의 ブル-ジ-ンズ(블루진즈)나 東寶의 젊은배우 加山雄三이 이끄는 ランチャ─ズ(란차즈)를 필두로 ベンチャ-ズ스타일의 밴드가 계속해서 등장했다.
도쿄올림픽에 맞추어서 급속하게 보급된 TV도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 시켰다. 후지TV의 「勝ち拔きエレキ合戰」(65년 6월 방영개시)을 계기로 각 방송국은 밴드 콘테스트 프로그램을 모두 방영하고, 일본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청소년들은 프로그램 출연을 목표로 열심히 실력을 연마하게 된다. 그 중에서, 나중에 일본의 락음악계를 짊어지게 되는 인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4.비틀즈가 남긴 유산, Group Sound (1966-68년) J-Rock의 역사
이미 일렉트릭 인스트루멘탈기에 전기악기는 아마츄어 밴드들에게까지 보급되어, 일렉악기를 사용하는 밴드들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비틀즈의 일본공연(1966년6월28일-7월3일)을 계기로 해서 비틀즈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까지 높아졌다.
비틀즈에 열광하는 소녀들이 급증하고, 이것을 다루는 매스컴보도도 과열되면서, 그들의 음악이나 장발의 시비를 둘러싼 논쟁과 비틀즈를 통한 소녀들의 불량화라는 논쟁까지 생기게 되었다. 비틀즈가 그야말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로,아마츄어를 막론하고 일본의 밴드들이 밴처즈부터 비틀즈까지 리버풀계 사운드의 모방에 열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일본의 Group Sound(GS)시대의 시작이다.
선두를 달리던 배드는 スパイダ-ス(스파이더스)와 ブル- コメッツ(블루코메츠)였다. 두 밴드 모두 원래는 로커빌리/C&W계 배드였는데, スパイダ-ス는 앨범 『ザ?スパイダ-ス?ファスト?アルバム』(1966년4월)로 완전히 리버풀화하고, 비틀즈 일본공연에 앞서서 GS(Group Sound)의 원형을 확립하였다.
ブル-コメ는 리버풀의 영향을 받은 대히트곡 「靑い瞳」이후,독자적인 GS사운드를 정착시켰다.
스파이더스에 상징되는 것처럼 GS가 리버풀에 촉발되어 생겨난 것은 확실하지만, 히트곡의 계보는 블루코메에서 유래하는 "노래하는 애수의 일렉밴드"가 의미하는 것처럼, 리버플 사운드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계를 그려갔다.
이 두 밴드를 GS의 출발점으로 해서 최전성기인 67년-68년에는 100개에 가까운 밴드가 일본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GS라는 호칭이 일반화된 것은 이즈음인데, GS의 대명사로 불리던 ジュリ-(澤田硏二)를 축으로 하는 タイガ-ス의 데뷔도 67년 2월이었다.
67년 5월에발표한 「シ-サイド?ハウンド」에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르고, 이후 「モナリザの微笑」「君だけに愛を」「シ-シ-シ-」등도 연속해서 대히트 하게 되면서 그 인기는 다른 GS들을 압도했다.
타이거즈를 비틀즈에 비한다면, 롤링스톤즈는 ショ-ケン(萩原健一)을축으로 하는 テンプタ-ズ(템프터즈)였다. 埼玉현 大宮출신의 그들은 아마츄어시기 때부터 롤링스톤즈나 비틀즈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특기였는데, 68년 3월에 발표한 「神樣お願い」가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같은 해 6월에 발표한 「エメラルドの傳說」로 인기를 확고히 했다.
GS의 최전성기는 이 두 밴드를 정점으로 다수의 그룹이 인기를 다투었다. モッズ계의 カ-ナビ-ツ, 失神パフォマンスのオックス, 포크록계열의 ワイルド ワンズ 외에도, ジャガ-ズ, ビレッジ シンンガ-ズ, ゴルデン カップス, モップス, パ-プル シャドウズ, リンド&リンダ-ズ, ダイナマイツ, フィンガ-ズ, フラワ-ズ 등을 주요한 GS로서 들 수 있다.
화려했던 GS붐도 68년말부터 69년에 걸쳐서 급속하게 식어갔다. 붐의 도화선이었던 브루코메가 68년11월 발표한 「さよならのあとで」의 히트에 의해GS사운드와 결별하고, 이후의 대부분의 GS는 가요곡화 되었다. 이 때에도 영미의 New Rock이 들어와 있었지만, 기존의 일본대중음악계의 질서 안에 자리잡고 있던 GS에게는, 마치 체제 전복적인 New Rock이란 조류를 소화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가요곡화로 활로를찾는 길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로커빌리로 시작되는 일본의 "락 선사시대"는 GS의 가요곡화와 함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5.J-Pop(Rock)의 탄생 (1968-72년) J-Rock의 역사
60년대말의 New Rock시대에 들어서자, 영미에서는 단지 8비트의 순환코드를 기본으로 하는 팝은 이미 "Rock"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세계적인 반체제운동에 호응이나 하듯이, 기성의 팝이나 음악의 질서에 저항하는 정신이 "Rock"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Rock은 그 정신이나 사상성, 예술성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팝에는 이러한 새로운 조류를 소화할 만큼의 기량도 전통도, PA시스템 등 고도화, 거대화하는 Rock의 툴을 이용할 만큼의 컨텐트는 물론 충분한 자금 축적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한 것이 68년에 「歸って來た醉っぱらい」의 대히트를 기록한 フォ-ク クルセダ-ス와, 『ジャックスの世界』로 충격적으로 나타난 ジャックス였다.
포크계에 한쪽발을 담그면서도 그들에게는 New Rock에 필적하는 신선함과 '오리지널리티'가 내제되어 있었다. 그들이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한 역할은 New Rock이 영미에서 한 역할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New Rock을 소화하지 못하던 일본의 팝은, フォ-ク クルセダ-ス(Folk rock)와 ジャックス를 통해서 비로소 Rock의 특징적인 요소를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70-80년대에 걸친 "일본의 락"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フォ-ク クルセダ-ス그리고 ジャックス이야말로 최초의 "일본 락의 선구자"였다.
로커빌리도, 60년대 아메리카팝도, 일렉트릭 인스트루멘탈도, GS도, 각각이 일본의 락에 유산을 남겼지만, 현재의 일본에 "락씬" 혹은 "락적인 씬"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フォ-ク クルセダ-ス와 ジャックス의 선구적인 활약이다. 따라서, フォ-ク クルセダ-ス와 ジャックス가 활약한 1968년 무렵이야말로 일본 「락의 원년」인 것이다.
그들은 소위 앵글로 언더그라운드 씬으로부터 등장했지만, 이 씬은 기존의 팝컬쳐 시스템을 거부할 즈음에 성립하고 있었다. 그 지지층은 GS아이돌에 열광하던 10대들뿐만이 아니라, 대학생 등 20세 전후가 중심으로, 반체제운동의 전선에 선 세대와 일치하고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구체제, GS에 대한 반동도 있고 해서, 그들은 New Rock보다도 지적으로 서브컬쳐적인 인상이 강한 밥딜란 등의 New Folk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 씬에서 활약한 뮤지션의 대부분이 "Folk Singer"였다.
앵글로씬의 상징적 존재였던 일본 最古의 인디레이블 "URC"를 거점으로, 高石友也, 岡林信康 등이 「反戰포크」「關西포크」라고도 불린 앵글로포크의 기수로서 활약했고, 일본의 우드스탁으로 비유되는 전일본 포크잼보리(69-71년) 등의 시대적인 이벤트를 선도했다.
70년에는 이 앵글로씬을 기점으로 지금도 일본의 락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細野晴臣, 大瀧詠一, 松本隆, 鈴木茂 네명으로 이루어진 "Happyend"가 데뷔해, フォ-ク クルセダ-ス와 ジャックス가 기초를 닦은 「일본의 락」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フォ-ク クルセダ-ス와 ジャックス가 일본락의 무의식적 창시자라고 한다면, 『はっぴえんど』『風街ろまん』의 두장의 앨범으로 「일본어 락」을 확립한 해피엔드는 일본 락의 의식적인 창시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앵글로씬에서는 이 밖에 遠藤賢司, 高田渡, 加川良, 三上寬, あがた森魚, 友部正人, はちみつぱい(후의 문라이더즈) 등, 그 후의 일본락/팝에 영향을 미친 개성적인 뮤지션도 등장했고, 또 하나 이 씬의 주변에서는 吉田拓郞, 井上陽水, 泉谷しげる 등도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앵글로씬 이외에서도 후의 일본 락을 지탱하는 그룹이나 뮤지션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천재 기타리스트 竹田和夫의 ブル-ス クリエイション, GS계 이면서 New Rock에 정통해 있던 ゴルデン カップス나 スピ-ド グル-&シンキ, 70년대 초반에 일본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불린 成毛滋, 전 ジャックス의 츠노다 히로, 일본의 락밴드로서 처음으로 본격인 해외공연을 한 フラワ- トラベリン밴드, 펑크 이전의 펑크라고 할 수 있는 村八分, 정치상황을 그대로음악속에서 묘사한 頭腦警察, 전 フォ-クル의 加藤和彦이 결성한 전설의 밴드 サディスティック ミカ밴드, 矢澤永吉의 キャロル, 桑名正博의 ファニ- カンパニ-. 72년경 까지 지금도 일본 락을 이끌고 있는 빅네임이 거의 다 배출되었다.
이처럼, 계명기에 다양한 지향성을 나타내고 있던 일본락 이었지만, フォ-クル나 岡林 등 앵글로계의 일부를 제외하고, 비즈니스적으로는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Rock"이 비즈니스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시대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6.Rock의 다양화와 New Music (1973-78년) J-Rock의 역사
GS와 마찬가지로 「New Music」도 일본 Rock사에 있어서 고유한 장르에 속한다. 단지, 그 "정의"는 GS보다도 더 애매하다. 그러나, 70년대에 있어서 일본의Rock/Pop의 조류 전체를 들여다보면, 대략적인 성격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NewMusic"이란 이입문화로서의Rock을 음악적인 기초로 하면서, 일본 고유의 「현재」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Pop의 체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시도 전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New Music이란 이입음악인 Rock을 어떠한 형태로 받아들일까 하는 시행착오의 과정 전체였던 것이다.
New Music기는 Happyend가 해산한 73년에 시작되어, YMO가 결성되고 SAS가 데뷔한 78년에 끝을 맺는다. 그 6년간은 일본이 제1차 석유쇼크를 극복하고 변동환율제 하에서 성장을 계속하고, 제2차 오일쇼크를 주원인으로 한 안정성장에 이행하기까지의 시기와 일치한다. 즉, New Music은 고도성장말기를 상징하는 Pop인 동시에, 물건의 가치가 상대화되고 「절대」라는 기준이 멀어져 가는 시기에 개화한 Pop이었다.
우선, 71년-72년에 걸친 「일본어 Rock 논쟁」이 New Music기의 전주곡이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Happyend의 평가를 계기로 하는 「일본어Rock인가 영어Rock인가」를 테마로 해서 일어난 논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입문화인 Rock을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받아들일 것인가, Rock을 일본이라는 문맥에서 상대적으로 평가하면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Rock의 평가와 그 수용방식을 둘러싼 논쟁이었던 것이다. 앵글로 "Folk"씬에서 탄생한 일본Rock으로서는 불가결한 숙명적인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Rock파」를 선도한 것은 Happyend였다. 그들은 73년의 해산 후에도 Rock에 집착하지 않고, 폭넓은 Pop의 에센스를 흡수하면서 그것을 일본이라는 풍토속에서 어떻게 하면 구체화할 수 있을까 궁리하며, 새로운 뉴앙스의 Pop 체계를 추구해 갔다. Happyend로부터는 キャラメル ママ/ティン パン アレ-(細野晴臣)와 ナイアガラ(大瀧詠一)라는 두 개의 큰 조류가 태어났는데, 이 두 조류로부터 수많은 개성적인 아티스트들이 성장해 갔다. 예를 들면, 荒井由實, 山下達郞(シュガ- ベイブ), 吉田美奈子, あがた森魚, 失野顯子, ム-ンライダ-ズ 등이다. 그들은 모두다 Rock의 상대화를 통해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절대Rock파」의 활동이 상대Rock파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절대Rock파의 대표격인 內田裕也프로듀서에 의한 「ワン ステップ フェスティバル」(74년)는, "Rock이라는 보편성"을 포교하기 위한 일대 이벤트였는데, 거기서 전개된 일본Rock의 다채로움은 80년대의 Rock/Pop의 상황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カルメン マキ&OZ나 紫 등의 Hard Rock계 밴드가 큰 지지를 받은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그들의 존재가 80년대 이후의 Heavy Metal붐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70년대의 일본Rock은 이렇게 상대Rock파와 절대Rcok파와의 상극을 하나의 축으로 해서 전개되는데, 결국은 상대Rcok파에 통합되게 된다. 이시기는 80년대의 Rock의 상황을 예고라도 하듯이, 새로운 스타일의 Rock이 계속해서 탄생하고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 간다. Rock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キャロル의 등장(72년12월)에 힘입어, Rock전문 레이블도 설립되었다. Rock계 레코드의 발매 타이틀도 증가하고, 콘서트의 관중 동원력도 증가했으며, 라이브하우스도 정착,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던 지방의 Rock밴드나 블루스계의 뮤지션도 활동의 폭을 넓혀간다. 70년대의 종반기에는ゴダイゴ, 甲斐バンド, ロック御三家(原田眞二, 桑名正博, チャ-)도 히트했다. 이미 언급했던 상대Rock파, 절대Rcok파의 활약을 함께 생각하면, 이 시대의 특징을 「Rock의 다양화」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New Music시대의 도래」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New Music」이라는 표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일본의 Pop시장에는 英美와 같은 의미의 "Rock"이 존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요곡도 포함한 Pop의 세계 전체를 아우르지 않으면, 혹은 Pop의 세계 전체에 혁신을 가져오지않으면, 즉 Rcok을 상대화하고 Pop 전체에 적접, 간접적으로 혁신을 가져오게 하려는 의도를 많든 적든 가지고 있지 않으면, Rock은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Rock의 다양화는 오히려 Pop을 혁신하기 위한 방법론의 다양화인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대의 Rock의 특징은 다양화 그 자체가 아니라, Rock의 상대화에 의해 태어난 새로운 Pop의 의지와 그것을 구체화하는 시행착오 과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New Music」의 본질인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갖춘 New Music기의 주역은 상대Rock파 Happyend, ナイアガラ/ティン パン アレ-계 인맥이며, 그들과 교류하면서 독자성을 획득한 サディステック ミカ 밴드계 인맥이었다. 그들의 시행착오가 씬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으며, 그 후의 Pop은 그들이 그린 흔적을 축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의 YMO 및 大瀧詠一의 대성공도 그 증거인데, 松田聖子프로젝트를 거쳐 ユ-ミン帝國, サザン帝國에 이르기까지의 조류도 그들을 빼고서는 말할 수 없다. Happyend의 해산으로 시작되는 New Music은 ユ-ミン의 히트 및 SAS의 데뷔로 귀결되고, 또한 YMO의 결성에 의해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
70년대 중반이후의 가요곡화된 포크를 「New Music」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Rock의 상대화와는 관계가 없고, 새로운 Pop에 대한 의지도 없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들을 New Music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7.Techno/New Wave시대의 도래(1979-82년)
8.Rock의 대중화와 Private화 (1983-87년)
테크노/뉴웨이브 시대가 지나고 83년경이 되자, 이제는 누구도 「일본 Rock」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지 않게 되었다. 인기차트는 Rock계 뮤지션에 의해 서서히 침식되어 갔고, 노래 프로그램도 CM도 이벤트도, Rock이라고 불리는 Pop을 빼고는 성립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라고 하기보다는, 전시대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Rock의 정착, 그리고 대중화이다. 失澤榮吉, 山下達郞, RCサクション, サザンオ-ルスタ-ズ, 濱田省吾 등 70년대에 등장한 밴드나 뮤지션은 완전히 메이저화 되고, 차트의 단골손님이 되어있었다. 佐野元春, 大澤譽志幸 등의 "신인"도 이러한 베테랑 세에 지지 않는 활약을 시작했다.
한편, カルメン マキ, 紫, BOWWOW 등의 활약을 거쳐, 라우드니스가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등 Japanese Band Rock도 드디어 Heavy Metal시대로 들어가 44メグナム, ア-スシェイカ-등의 인기 밴드의 출현으로 점점 더 붐이 거세져 갔다. 이러한 와중에 濱田麻里 등의 Girls Metal이나 聖飢魔과 같은 예능Metal도 등장해서 Heavy Metal계도 일대 세력으로서 인지되게끔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중화와는 상반되는 움직임, 즉 Private화, Segment화(세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그 기수는 펑크나 뉴웨이브에 촉발된 "80년대 태생"의 밴드나 뮤지션이었다. 대중화나 히트차트에는 거의 무관심한 그들 입장에서 메이저의 Rock은 이미 Rock이 아니라, 단지 구체제Pop에 불과했다. 그것은 그것으로 "Rock적"인 의지였지만, 그들은 구세대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이나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을 몸에 지닐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메이저 상대로 정면대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씬"을 게릴라적, 미크로적으로 확립하면그만이었다. スタ-リン의 영향하에서 태어난 "Hard Core Punk" 가 이러한 흐름을 상징하고 있다.
기술보다도 정신, 사운드보다도 파워. 보이지 않는 100만명 보다 눈앞에서 열광하는 수백인. 대중의 지지는 필요 없다. 마이너한 씬에서 활동하고, 디스크를 Private하게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Rock적, Punk적인 것은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씬에서 활약한 뮤지션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흐름에 영향받아, 레코드 비즈니스 측에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다수의 Rock계 인디(독립) 레이블이 탄생한 것이다. ナゴム, ADK, AA, アルケミ, セルフィッシュ 등이 그 대표인데, 이러한 움직임은 東京에서 지방까지 파급되어 대형 레코드회사까지 레이블을 새롭게 설립하는 등 인디즈는 일종의 붐으로까지 확산되어갔다. 음악적인 지향성도 배경도 다른 밴드가 "인디즈"라는 말로 일괄되어 표현되고, ラフィン ノ-ズ, ウイラ-ド, 有頂天 세 밴드를 "인디즈 3총사"라고 부르는 풍조도 생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인디 레이블 설립의 동기였지만, 80년대 중반이 되자 비즈니스면에서의 우위가 주목을 끈다. 인디 마켓에서는 많은 프로모션 비용, 유통비용 등을 들이지 않아도, 확실하게 수천 단위의 신보를 팔아치우는 것이다. 대형 레코드회사가 이 점을 간과할 리가 없다. 거기서 인디즈 씬에서 활약하는 아마츄어 인기밴드의 입도선매가 시작되고, 인디계에서 메이저계로 진출하는밴드가 속출했다. 뮤지션측도 자유로운 표현의 장으로서가 아니라, 인스턴트로 세상에 나오는 장으로서 인디즈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80년대 후반의 인디즈 씬은 메이저 씬을 위한 전초기지에 불과해져 버렸다.
그렇지만, "국민적"인 레벨에서 말하면, 인디즈의 대부분은 이러한 인디즈 씬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화의 주역이었던 베테랑 뮤지션이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도 아니었다. 10대들에게, 한 세대, 두 세대나 위의 뮤지션에게 열광하길 바라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새로운 음의 구축이나 Pop으로서의 높은 정신성이 아니라, "화내는 젊은이, 고민하는 젊은이의 대변자"로서의 아이돌 이었다. 이러한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등장한 것이 尾崎豊(오자키 유타카)이다. 음으로서 새로운 점은 거의 없었다. 토해 내는 듯한 언어, 메시지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러나, 83년의 데뷔와 동시에 많은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10대들 사이에서 「Message Song Rock」이라는 환상조차 만들어 내었다. 대형밴드 붐기에 메시지형 뮤지션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 계기의 하나를 만든 것은 틀림없이 尾崎豊이다.
같은 83년에 등장한 BOøWY는 음악적으로는 오자키와 상극에 있는 밴드였지만, 그 후의 일본Rock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점에서는 오자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 음악은 이입Pop으로서의 Rock을 기초로 하고 있었는데, 옛날 GS의 ブル-コメッツ가 이룩한 것과 같은의미로, 일본 이외에서는 결코 태어나기 힘든 "Rock"이었다. BOøWY에 의해 일본Rock의 오리지널리티가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사실, BOøWY의 출현 이후, 일본Rock의 주 조류는 그 뿌리였던 영미Pop과 거의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테크노/뉴웨이브기까지 일본의 Rock은 "이입문화(移入文化)"의 흔적을 남기면서 「일본 고유의 현재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Pop의 체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의사」가 숨겨져 있었는데, BOøWY이후 Pop씬의 무대 위에서 그러한 의사를 나타내는 것은 어려워졌다. 양악(洋樂)으로서의 Rock은문화가 아니라, 단순한 기술, 기능이 된 것이다. 그것은 자동차, 가전 등의 분야에서 구미시장을 지배하고, 많은 무역흑자를 내고 있던 80년대 중반 이후의 경제환경, 그리고 동시기의 허세와도 비슷한 일본인의 "자신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렇게 尾崎豊와 BOøWY를 축으로 하면서 "일본Rock"에는 옛날에 없었던 도메스틱한 환경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오리지널리티의 개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떤 종류의 쇄국상태라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원래 지켜야할 컬쳐나 유산이 있어서 문화적 채널을 닫은 것도 아니고, 도메스틱함에도 불구하고 뿌리가 없는, 일종의 독특한 Rock/Pop환경이었다.
어쨌든, 尾崎豊와 BOøWY가 대중화의 한 귀결로서 출현한 것은 사실이고, 그들은 무의식중에 Private화, Indie화 라는 일부 인디즈의 멘탈리티를 대중화에 합류시키고, 마크로적인 의미에서의 Private화, 즉 도메스틱화의 파도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9.밴드버블의 생성과 붕괴(1988-90년)
그리고 대형 밴드 붐의 도래이다.
87년경까지의 일본의 Rock/Pop의 특징이었던 Private화, Segment화는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라이브하우스를 증가시켜 갔다. 하지만, 아마츄어밴드가 라이브하우스보다 더 많이 빠른 속도로 증가해 갔다.
이러한 배경에는 尾崎豊, BOøWY 이후 Rock의 Domestic화도 크게 작용했다. 10대들은 누구나 尾崎豊처럼 토해내고 싶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 누구나 布袋寅泰처럼 멋지게 기타를 치고 싶어했다. 이 시기에 아나로그반에서 CD로의 이행도 거의 끝나갔고, CD단가도 내려갔으며, 레코드랜탈점도 난립기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보다도 훨씬 싼 가격에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디지털화, 대량생산화를 통해서 악기가격은 상대적으로 싸지고, 대여 스튜디오도 급증했다. 이 정도의 조건이 갖추어 지자, 어설픈 스포츠에 열중하는 것보다는밴드를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훨씬 재밌고 손쉬웠다. 또한, 유행하던 8비트에는 스포츠감각으로 열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밴드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운동을 즐기던 사람들까지도 우습게 「밴드 하자!」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밴드를 하면 사람들 앞에서연주하고 싶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수요, 공급의 문제 때문에 라이브하우스 출연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라이브하우스에 출연할 수 없었던 아마츄어 밴드는 초보자들의 스트리트 퍼포먼스장 이었던 東京 原宿(하라쥬크)의 보행자천국, 호코텐으로진출했고, 80년대 말이 되자 호코텐은 스트리트 라이브의 메카로 바뀌게 되었다. 매주 일요일, 구경하러 온 관객들에 섞여서 아마츄어 밴드 예비군이 밀려들었고, 그 다음주에는 예비군의 예비군이 기타를 한 손에 들고 호코텐에 선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호코텐 밴드의 수는 급속도로 증가했고 마침내 밴드 붐은 본격화되게 되었다.
이것에 박차를 가한 것이 TBS계 「イカすバンド天國」, 속칭 イカ天(이카텐)(89년 2월부터 방영)이다. 이것은 옛날의 「勝ち拔きエレキ合戰」처럼 아마츄어 락밴드 콘테스트 프로그램어었는데, 이 프로그램이 자극제가 되면서 밴드의 수는 점점 늘어갔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개나 소나 밴드한다고 하는 말이 나돌 정도로 밴드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호코텐, 이카텐에서 배출된 밴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대표적인 밴드를 들자면, THE BOOM, KUSUKUSU, JUNカイウォ-カ-(S), AURA, たま, ジッタリ- ジン, フライング キッズ, ブランキ- ジェット シティ 등이다. 하지만, 호코텐, 이카텐 붐 이전의 80년대 전반기부터 라이브하우스에서 인기 있던 밴드가 밴드붐에 편승해 히트한 경우가 일반적으로 존재감이 컸다. 예를 들면, ブル-ハ-ツ, ストリ-ト スライダ-ズ, ユニコ-ン, 筋肉少女隊, レピッシュ, BUCK TICK, X, ZIGGY 등이다. 또한 팝의 헤비화, 비쥬얼화에 맞추어서, 이카텐, 호코텐기의 뮤지션들은 의상, 메이크업 등에 있어서 과도할 정도로 자기연출에 몰두했는데, 일부를 제외하고 음악적으로는 오히려 보수적이며, 기존의 음의 틀에서 좋은 의미던 나쁜 의미던 벗어나지 못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일 것이다. 그 대부분은 변형되지 않은 Beat Punk이던가 기껏해야 그 응용편 정도였다.
이러한 밴드 붐에 의해 일본의 Rock은 점점 대중화되고 거대화되어 갔지만, 90년경이 되자 붐은 급속도로 식어버린다. 실질적으로는 비쥬얼면에서의 화려함과 메시지 지향의 도발적인 언어만이 붐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한번 질리게 되면 쇠퇴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또한, 버블경제의붕괴와 함께 찾아온 평성불황의 시작이 밴드버블의 쇠퇴를 부채질 하기도하였다.
물론, 이러한 밴드붐에 큰 획을 그은 뮤지션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전시대의 Private화, Segment화의 흐름을 이어받아, 자신들의 표현을 연마하는 것에 전념하고, 결과적으로 밴드버블을 극복해 간 일군의 뮤지션들이다. 예를 들면, ボ ガンボス, エレファント カシマシ, ニュ-エスト モデル, フリッパ-ズ ギタ- 등이 그 대표격이다. 그들은 초Domestic한 환경속에서 자족하고 있던 Rock/Pop의 주조류에 반발하는 활동으로 그 지지층을 넓혀 갔다.
Anti Domestic움직임은 "World Music"이라는 개념하에 등장한 뮤지션들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上上颱風이나 오키나와의 りんけんバンド가 있는데, 그들은 기본에 얽매이는 것을 통해서, 거꾸로 열린 Rock/Pop이 태어난다는 것을 몸으로서 표현했다.
Domestic한 밴드버블 상황은 호코텐, 이카텐 예를 들것도 없이 어디까지나 "국제도시"東京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실제로 이 시기 이후 국제적으로 평가된 것은 "토착도시"大阪에서 태어난 少年ナイフ나 ボアタムズ 등이다. 후에 역시 大阪출신을 중심으로이루어진 オルケスタ デ ラ ルス가 빌보드 살사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는데, 이렇듯 막을 내리려 하는 움직임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大阪 등 非東京 지역에서 발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東京사이드에도 새로운 움직임은 있었다. 예를 들면,일본어 랩이나 힙합을 지향하는 近田春夫나 いとうせいこう가 막을 내리려 하는 경향에 제동을 걸려고 했다. 그들은 랩이라고 하는, 애초부터 토착적인 이입문화를 억지로 들여오는 것을 통해, 막을 내리려 하는 Rock/Pop상황을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려 했는데, 이"운동은 スチャダラッパ-나 電氣グル-ブ 등의 지원군을 얻어서 현재도 계속 진행중이다.
또한, パ-ル兄弟, ピチカ-ト5 등이 80년대 중반부터 계속하던 Rock의 경계를 넘어선 Pop의 체계를 추구한 활동도 반 Domestic을 제창한 東京사이드의 움직임으로서 빼놓을 수 @없다. 이 흐름의 일부는 후에 시부야계로 불리게 되는데, 그 음의 세련도와는 관계없이 이것 또한 어떤 종류의 토착화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음의 계열로 말하자면 상당히 출처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爆風SLUMP나 米米CLUB 등의 엔터테인먼트형 Pop의 개화도 이러@한 토착화"로 패러렐이 이동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0.Marketing Pop의 시대(1991~) J-Rock의 역사
밴드버블이 붕괴된 뒤에 찾아온 것은 Marketing Pop의 시대이다. 수요 측(Pop의 소비자층)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만들어진, 어떤 의미로는 치밀하게 계산된 Pop의 시대이다. 이런 종류의 시장에서 공급(제작)측의 주역은 뮤지션도 송라이터도 아니다.
레코드회사, 프로덕션, TV방송국, 광고회사, 거기에 뮤지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 등에 의한 공동작업에 의해서 비로소 "생산"된다. 미국의 쇼비즈니스에서 출발한 이러한 수법 그 자체는, 7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일본에도 침투되어 온 것으로, 꼭 새로운 스타일이라고는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 빙 등의 유명 프로덕션이 이것을 철저히 도입하게 되면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어도 메이저씬에서의 빅히트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ユ-ミン이 독자적 정보수집력을 통해 시대의 특성을 찾아내어 자신의 작품에 반영시킨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빅히트를 계속적으로 내놓는 다른 뮤지션도 ユ-ミン과 같은 작업을 어딘가에서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TV드라마나 CM 등과의 타이업을 통해서 히트제조에 관계되는 일련의 작업이 "시스템"으로서 자각적,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역시 90년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제는 CD의 판매량만이 목표는 아니다. 비디오 소프트로서의 작품화도 동시 진행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쥬얼면에서의 배려도 이전에 비해서 중요해 지고 있다. 게다가, 카라오케시대의본격화로 인해 카라오케에서 얼마나 불려질 것인가를 예측하면서 곡을 만드는 것도 이제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Marketing Pop에는 뮤지션의 얼굴은 필요 없다. 바꾸어 말하면, 무명의 뮤지션을 다수 소유해 놓고, Marketing 장치를 돌려 이상적인 뮤지션象에 가장 가까운 인물을 골라내면 그만이다.
Pop의 이러한 "생산방법"은 반드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소비자의 선호에 맞춘 상품을 만드는 것은 시장경제의 원리이다. 거꾸로 말하면, 소비자의 선호에 맞지 않는 것은 도태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의 Marketing Pop이 만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
Pop은 언제나 그 내용으로부터 혁명가를 낳고, 구체제 Pop이 신체제 Pop에 의해 바뀌는 것을 통해 명맥을 유지해 왔다. "Rock"이란 구 Pop체제를 혁신하는 새로운 Pop체제를 가리키는 개념인 것이다.
Marketing Pop이 비즈니스로서 올바르다고 해도 새로운 Pop의 체계가 이 수법을 통해서 태어난다고는 할 수 없다. 필시 예상도 못한 곳에서부터 "새로운 Rock"의 태동, 새로운 Pop의 발생이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다. Marketing Pop처럼 수요가 공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신규수요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만이 "Rock"적인 경제원리다.
Domestic화를 통해 완전히 체제화, 상업화 된 현재의 "일본의 Rock"에 다이나믹한 변동의 바람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일지도 모르지만....
※이상은 웹에서 옮겨온 자료지만 우리나라 역시 약간의 시차가 있을뿐 비슷한 경향이니 현재의 팝음악이 도입되고 발전해온 경향은 유사함으로 부분부분을 비교해보면 큰 오차는 없을 줄 안다. 다시한번 이런 귀중한 자료를 정리, 보존하고 있는 블로거에 거듭 감사의뜻을 표한다
첫댓글 1910년이 한일합방으로 우리가 식민지가 된 것이지만..
사실상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니.. 실제적으로 1905년부터 대한제국이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