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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3. 4. 큐티
역대상 2:9 ~ 17
다윗의 가계
1) 헤스론의 세 아들
- 9절. “헤스론이 낳은 아들은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배라”
a. 6 ~ 8절은 유다가 다말로부터 얻은 세라의 자손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9 ~ 55절까지는 5절에서 이어지는 부분으로 다윗을 포함하는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의 후손들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b. "여라므엘"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를’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라므엘”의 후손들은 ‘여라무엘 사람’(삼상 27:10)이라 불리웠습니다. 이들은 유다 족속 중에서도 그들 나름의 독특한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c. "람"은 ‘높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후손 중에서 다윗이 태어나게 됩니다.
d. "글루배"는 ‘갇힌 자’라는 의미입니다. 18, 42절에서는 ‘갈랩’으로 되어 있습니다.
2) 람에서 이새까지
- 10절.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으니 나손은 유다 자손의 방백이며”
a. 수평적으로 형제 관계를 밝히는 방계 분할 족보의 형식을 취하던 역대기 기자는 본절에서 혈통의 수직적 관계를 보여주는 직계 족보로 바꾸어서 본단락의 족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 언약의 당사자인 다윗의 직계 조상들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b. "암미나답"은 ‘내 친족은 고귀하다’는 의미입니다. “나손”은 ‘마법사’, ‘복술사’라는 의미입니다. “나손”은 출애굽 당시에 유다 지파를 대표하는 수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가 대제사장 아론의 부인입니다(출 6:23).
- 11절. “나손은 살마를 낳고 살마는 보아스를 낳고”
a. "살마"는 ‘겉옷’이라는 의미입니다. “살마”는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룻 4:20에서는 ‘살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b.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솔로몬 성전의 낭실 앞에 세워진 좌편 기둥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 거주한 부농이었습니다.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영원한 왕조를 보장하는 다윗 언약을 받은 다윗 족보에 이방 여인들(다말, 라합, 룻)이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들어 크게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완성될 메시야 왕국의 성격이 혈육이 아닌 언약과 은혜를 통해서 임하게 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 12절.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a. "오벳"은 ‘섬기는 자’,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을 통해서 낳은 아들입니다. “오벳”의 이름은 어머니 룻과 어머니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할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b. "이새"는 ‘부’, ‘재산’ 혹은 ‘하나님의 선물’ 또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새”는 목축업에 종사했고,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이새”는 큰 부자가 아니었고,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새”의 아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인간적 능력이나 배경 등의 외적 조건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고대에서 새로운 왕조를 열어간 배경에 많은 인물들은 그 아버지나 조상의 은덕을 힘 입는 경우가 많은데, 다윗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3) 다윗과 그의 형제 자매들
- 13절. “이새는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로 아비나답과 셋째로 시므아와”
a. 역대기 저자는 직계 족보를 다윗 대에 이르러 수평적 관계를 보여주는 분할 족보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일곱이나 되는 인물 중 하나님께서 다윗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특별한 능력이나 조건을 갖춘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의해서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b. "엘리압"은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압”은 매우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사무엘은 “엘리압”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엘리압”은 27:18에서는 ‘엘리후’로 불리웁니다. 그것은 유다 지파의 장관으로서의 명칭이었습니다. “엘리후”의 딸 ‘아비하일’은 다윗의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c, 역대기 기자는 의도적으로 이새의 아들들의 나이 순서에 따라 맏아들, 둘째, 셋째,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미약한 가문의 막내 아들이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d. "아비나답"은 ‘내 아버지는 관대하시다’ 혹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e. "시므아"는 ‘명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장대한 자의 소생을 죽였습니다(20:6, 8). 또 “시므아”의 다른 아들 ‘요나답’은 암몬에게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할 궤계를 가르쳐 준 자였습니다.
- 14절. “넷째로 느다넬과 다섯째로 랏대와”
a. "느다넬“은 ‘하나님께서 주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동일한 인물이 성경에 열 명이나 등장할 정도로 자주 사용된 이름입니다. 신약의 ‘나다나엘’이 동일한 의미의 이름입니다.
b. "랏대"는 ‘주께서 확장하심’이라는 의미입니다.
- 15절. “여섯째로 오셈과 일곱째로 다윗을 낳았으며”
a. "오셈"은 ‘강함’이라는 의미입니다.
b. "다윗"은 ‘사랑함’이라는 의미입니다.
c. 역대기에서는 이새의 아들들이 7형제로 기술되었습니다. 한데 삼상 16:10, 11 그리고 17:12 ~ 14에서는 8형제로 기술되고, 다윗은 그 중의 막내로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는 그 8형제 중 한 명이 후사가 없이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계수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d. 다윗은 일찍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삼상 16:12). 그리고 많은 고난 끝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1 ~5). 그런데 충실한 신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커다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삼하 11, 12장). 그러나 다윗은 진정으로 회개했고, 평생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왕상 15:5; 행 13:36).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 되었습니다(겔 34:23; 호 3:5). 특별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고대하는 포로 귀환 이후의 공동체에게는 다윗이야말로 솔로몬과 더불어 과거의 영광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그들이 희망하는 이상적 군주였습니다.
e. 이스라엘의 아들 유다와 다윗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은 모두 9명입니다. 유다, 베레스, 헤스론, 람, 암미나답, 나손, 살마, 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에 머물러 있었던 430년의 기간, 출애굽에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까지의 기간이 480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11명의 인물들이 910년 정도의 시간을 메워야 합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11대 밖에 되지 않는 유다에서 다윗에 이르는 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시간인 910년이라는 기간, 그리고 사이의 불일치는 유다로부터 다윗에까지 이르는 본장의 족보에 모든 인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요약, 발췌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이새의 딸들
- 16절. “그들의 자매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이라 스루야의 아들은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형제요”
a. 히브리인들의 족보에서 여자 후손들을 기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 당시에 많은 활약을 했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기에 기록이 되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b. "스루야"는 ‘하나님의 치심’ 혹은 ‘향유’라는 의미이비다. “아비가일”은 ‘즐거움의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삼하 17:25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친아버지는 이새가 아니라 ‘나하스’입니다. “스루야”와 아비가일“의 모친은 전남편 나하스와의 사이에서 이들을 낳은 후, 이들을 데리고 이새에게 재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낳았습니다.
c. 스루야가 낳은 세 아들은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이었습니다. 이들 세 아들은 다윗 당대에 상당히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늘 어머니인 “스루야”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스루야”가 당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거나, 혹은 그 남편이 일찍 사망했거나,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미미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d. 요세푸스는 “스루야”의 남편이 ‘소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e. "아비새"는 ‘나의 아버지는 이새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스루야의 차남입니다. 장자인 형 요압이 다윗과 솔로몬에 반란을 일으켰던 아도니야를 지지했기 때문에 “아비새”가 장자의 자리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30용사 가운데 서두에 소개되는 세 용사 중 가장 존귀히 여김을 받은 자였습니다. 군사적 능력에 있어서는 요압에게 다소 뒤쳐졌지만 다윗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용사였습니다(삼하 16:9; 23:14 ~ 17).
f. "요압"은 ‘여호와께서는 아버지가 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요압”은 탁월한 군사적 능력으로 다윗에게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한을 갚고자 다윗에게 귀순한 용사 아브넬을 임의로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연장하기 위해서 용사 아마사를 억울하게 죽였습니다. 또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도니야의 반역에 합세했다가 솔로몬에게 숙청당했습니다.
g. "아사헬"은 ‘하나님께서 만드신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30 용사 중 한 사람으로, 달리기를 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아사헬”은 다윗의 헤브론 재위시에 벌어졌던 기브온 전투에서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 17절. “아비가일은 아마사를 낳았으니 아마사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사람 예델이었더라”
a. "아마사"는 ‘짐(burden)'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마사”는 압살롬의 반역에 참가했지만, 다윗은 “아마사”를 용서하고 요압을 대신하여 그를 군대 장관으로 등용했습니다. 그러나 “아마사”는 유다 사람을 3일 이내에 소집시키라는 다윗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요압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삼하 20:1 ~ 13).
b. "에델"은 ‘풍성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델”은 ‘아마사’의 아버지입니다.
가르침 :
1) 에스라는 드디어 족보에 다윗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놀라운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거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윗이 등장하는 족보의 상황에서 다윗의 위치는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고대의 왕들의 족보는 신비하고 영웅들의 이야기가 담기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가난한 베들레헴 목자의 가문의 막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의 누이들이 아버지가 이새가 아닙니다. 즉, 다윗은 다윗의 모친이 두 딸을 데리고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재가해서 다윗을 낳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무엘이 이새에게 찾아와 아들들 중에서 기름부을 자를 찾고자 했을 때 다윗은 배제했던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서자인 다윗이 이새의 정실 소생의 아들들과 동일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시간에 형들의 양들까지 다 담당해서 사자와 곰이 출현하는 광야에 나가 양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다윗의 등장은 결코 요란하지 않습니다. 아주 미약하고 다른 왕들과 비교해서 부족하기 그지 없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족보에 이방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이 여인들은 모두 결격 사항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윗의 족보에 들어와 다윗 왕이 태어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너무나 미약한 모습이지만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된 것을 명심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구유에 누이는 미약함으로 태어나지만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왕의 왕이 되시는 것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의 방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아주 미약하고 부족하고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패턴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은 세상의 조건이 아무리 미약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면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미약한 것들을 통해서 세상의 위대한 것들을 거꾸러 뜨리시고,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십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을 보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사는 것이 신자의 합당한 태도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며, 미약한 나일지라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위대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2) 하나님이 일하시는 관점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다른 관점을 소유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일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는 자입니다. 내가 그렇게 쓰임받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간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