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련 순양함 상공을 비행 중인 Tu-16. 해군 소속 초계기형으로 보인다.
핵폭탄은 나만 보유했을 때는 무소불위의 필살기지만 남도 가지고 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련이 핵폭탄을 보유하면서 군비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폭탄을 많이 보유하는 것만큼이나 보유한 폭탄으로 상대를 확실히 가격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그런데 오늘날의 ICBM, SLBM 같은 다양한 수단이 등장하기 이전의 유일한 핵폭탄 투하 방법은 폭격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폭격기 분야에서 미국과 소련의 기술 격차는 상당했다. 1949년부터 일선에 공급된 소련 최초의 전략폭격기 Tu-4조차도 일본 폭격 도중 피격당해 극동의 연해주에 불시착한 B-29를 나포해 나사 하나까지 그대로 베껴 만든 것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 또한 항속 거리가 짧아 소련 본토에서 미국 한가운데로 날아가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오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반면 소련이 Tu-4를 제식화할 때 미국은 B-29보다 강력한 B-36, B-47, B-52 같은 다양한 차세대 폭격기의 개발을 거의 완료한 상태였다. 초조해진 소련은 곧바로 이에 맞설 수 있는 후속 폭격기의 제작에 착수했다. 비록 남의 기술을 베끼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했지만 Tu-4의 제작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소련은 마침내 자체 개발한 최초의 전략폭격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 바로 투폴레프(Tupolev) Tu-16이었다.
제2차 대전을 겪으며 장거리 폭격기의 위상은 엄청나게 높아졌다. 전쟁 발발 당시에 독일은 최강을 자부하는 강력한 공군을 보유했지만, 지상군 지원에 특화되어 상대 후방의 깊숙한 거점을 타격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반면에 연합국, 특히 미국은 폭탄의 비를 뿌려댔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폭격기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전략폭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현실화했다. 그 절정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핵폭탄 투하였다.
후방에 장착된 방어용 기관포탑. 만일 실전에서 사용할 일이 있다면 아마도 최후를 앞둔 상황일 것이다.
당연히 냉전 시대의 한 축을 이끌게 된 소련에게 이런 현실은 우려스러운 부분이었다. 핵폭탄과 이를 운반할 수단의 확보에 서둘렀으나 겨우겨우 미국을 쫓아가기 바빴을 뿐이었다. 벤치마킹을 넘어 그대로 복제한 수준의 Tu-4도 단지 외모만 같다 뿐이지 가장 중요한 폭장량과 운항거리가 B-29의 65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엔진처럼 아무리 베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Tu-4의 이런 성능으로는 핵폭탄을 미국 본토에 투하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소련의 외곽을 둘러싼 수많은 해외 기지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미국에 비해 전략적으로 열세였던 소련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원거리에서 상대를 신속히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이런 상황은 결과적으로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을 촉진시켰다. 하지만 1960년대 이전에는 대륙 간 횡단이 가능한 폭격기가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러시아 로길라트 과학박물관에 전시 중인 Tu-16. 전방에 장착된 23mm AM-23 기관포와 엔진 공기흡입구를 볼 수 있다. <출처: (cc) ShinePhantom at Wikimedia.org>
후속기 개발에 착수한 소련은 제트 엔진에 주목했다. 이미 미국도 프로펠러 엔진으로는 더 이상의 성능 향상이 어렵다고 보고 제트 엔진을 장착한 폭격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1950년을 전후로 미국은 B-45, B-47 전략폭격기를 일선에 배치했다. 이는 소련에게 초조함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되기도 했다. 소련은 비록 조금 늦기는 했지만 충분히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ELINT 정찰형 기종인 Tu-16R. 최초의 전략폭격기였지만 이후 다양한 변형 기종의 플랫폼이 되었다.
사실 소련이 개발한 초창기의 제트 엔진들은 서방제에 비해 성능이 많이 부족했지만 1947년 소련에 우호적인 좌파가 정권을 잡은 영국으로부터 당대 최고의 롤스로이스 넨(Rolls-Royce Nene Mk 1) 엔진을 제공받으면서 기술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듬해에는 미쿨린(Alexander Mikulin)의 주도로 중장거리용 기체에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AM-3 터보 제트 엔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를 이용해 1952년 투폴로프 설계국이 만든 모델 88기가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중폭격기임에도 MiG-15 같은 소형 제트기에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 날렵한 후퇴익을 가져 미국이 이제 막 도입한 B-47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모델 88은 일류신(Ilyushin) 설계국이 만든 Il-46과 경쟁을 벌여 속도, 항속거리, 폭장량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며 채택되었다.
이집트 공군이 운용 중인 Tu-16. 이외에 이집트, 인도네시아, 중국에도 공급이 이루어졌다.
일사천리로 개발을 끝낸 모델 88은 소련군 당국으로부터 Tu-16이라는 제식부호를 부여받고 양산에 들어가 1954년부터 본격 배치되었다. 이를 포착한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배저(Badger)라는 코드네임을 부여하고 관리에 들어갔다. 미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수단을 최초로 확보했다는 기쁨 때문이었는지 소련은 이듬해 7월 모스크바의 군사 퍼레이드에서 무려 54기로 이루어진 대편대로 공중분열을 벌여 서방 세계를 긴장시켰다.
Tu-16 배치 직후부터 소련은 전략폭격기를 이원화하여 운용했다. 대략 5,000km 이내의 중거리용으로는 Tu-16을, 그 이상에서 작전을 벌일 장거리용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제식화한 Tu-95를 배치했다. 이는 공교롭게도 당시 미국의 B-47, B-52의 조합과 유사했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미국을 의식한 배치는 아니었다. 현재도 러시아는 중거리용으로 Tu-22M을, 장거리용으로 Tu-95와 Tu-160을 나누어 운용하고 있다.
KSR-5 대함미사일을 장착한 Tu-16G.
Tu-16은 애초의 개발목적인 핵폭탄 운반용으로 공군에서 운용했지만 양산이 종료된 1963년 전후로 본격 배치되기 시작한 각종 장거리 미사일 때문에 효용성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일선 배치 10년 만에 점차 전술폭격기로 임무가 바뀌었고 정찰기, 전자전기, 공중급유기의 플랫폼이 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 해군은 장거리 대함미사일을 장착한 다목적 해상초계기로 애용하기도 했다.
임무가 바뀌면서 수시로 북해나 극동에 출몰하곤 했는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비행 목적이 폭격인지 정찰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동해 상공에서 한국 공군의 비상 출격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1987년에는 일본 오키나와 영공을 무단 침범하는 바람에 일본 항공자위대의 F-4EJ가 사격을 가해 쫓아낸 경우까지 있었다. 이는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소련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극히 드문 사례가 되기도 했다.
1963년 4월 서태평양으로 전개 중인 미해군 키티호크 항공모함을 정찰하기 위해 출동한 Tu-16을 미해군 소속 F-4B 팬텀기가 요격 중이다.
Tu-16은 이집트, 이라크, 인도네시아, 중국에도 수출되어 해외에 가장 많이 공급된 폭격기가 되었다. 이라크의 Tu-16은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등에서 활약했다고 알려지지만 전과는 확인된 것이 없다. 당연히 이들 국가에 공급된 Tu-16은 전술폭격용으로 사용되었지만 사실 폭장 능력이 F-4 전폭기 정도에 불과해 작전 효율이 좋지 않았다. 현재 Tu-16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퇴역한 상태다.
중국은 1959년 H-6이라는 제식명으로 라이선스 생산에 나섰으나 중소분쟁으로 소련 기술진이 철수하면서 양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자력 개발에 나서 1968년부터 총 160여 기가 생산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 중 일부는 현재도 전략폭격기로 활동 중이다. 때문에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단지 구닥다리 작전기들만 많은 낙후한 중국 공군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사실 이는 오해다.
현재 중국 유일의 전략폭격기인 H-6. 대대적인 개장을 거쳐 장거리 미사일의 발사 플랫폼으로 사용 중이다. <출처: (cc) Li Pang at Wikimedia.org>
2,000년 이후 대대적인 현대화 개장을 실시한 H-6은 장거리 순항미사일이나 대함미사일을 운용하는 플랫폼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미국의 B-52, 러시아의 Tu-95가 아직도 일선에서 사용 중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H-6이 단지 오래전에 개발된 기종이란 이유로 성능을 폄하할 수는 없다. 어쨌든 덕분에 중국은 미국, 러시아 외에 유일하게 전략폭격기를 운용하는 국가가 되었다.
Tu-16은 상당히 의미 있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의 자체 기술로 개발이 이루어진 최초의 전략폭격기라는 점, 그리고 1,509기의 총생산량이 제2차 대전 이후 등장한 모든 폭격기 중에 최대라는 점 등이다. 또한 1953년 소련과 중국의 우호를 위해 상징적으로 공여한 10기의 Tu-4와 달리, 중국이 처음으로 실전 배치해 운용한 전략폭격기이기도 했다.
소련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Tu-104. <출처: (cc) Lars Söderström at Wikimedia.org>
하지만 그보다 재미있는 점은 소련 최초의 제트 여객기 Tu-104의 베이스였다는 사실이다. 제작된 시점을 기준으로는 세계에서 6번째지만 정기 항로에 취항한(1956년) 2번째 제트 여객기이며 1981년까지 운항했다. E-737, P-3C처럼 민항기를 기반으로 군용기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흔하지만 그와 반대로 사용 목적이 극히 제한된 고성능의 전투기나 폭격기를 베이스로 민항기를 제작하는 일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Tu-104는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군용기를 개조한 형태다 보니 경제성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안정성이 뛰어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라이벌이었던 영국의 드 하빌랜드 코멧(de Havilland Comet)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나름의 성공작이었다. 동서 대립이 첨예했던 냉전 시기에 소련이 한편으로는 Tu-16으로 서방을 위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Tu-104로 연결을 시도했던 모습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모니노 군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Tu-16K. <출처: (cc) Jno~commonswiki at Wikimedia.org>
전장 34.8m / 전폭 33.0m / 전고 10.36m / 최대이륙중량 97,000kg / 최대속도 시속 1.050km / 항속거리 7,200km / 작전고도 12,800m / 무장 9,000kg 폭장 또는 KSR-5 대함미사일 2기 외, 23mm AM-23 기관포 6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