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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신앙의 여정 원문보기 글쓴이: 디모데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선, 그리고 죽음과 악을 네 앞에 두어,
16 그 안에서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길에서 행하고 그분의 계명들과 그분의 규례들과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네가 살고 번성케 하려 함이라.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가 차지하러 가는 그 땅에서 너에게 복
주시리라.(신 30:15~16,한글킹)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길에서 행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길을 가야하는데, 이 길은 하나님의 것으로만 가야 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것으로만 가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가미하여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 곧 인본주의이다. 이 인본주의는 의지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고 결국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단절된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본질을 말하는 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신앙인의 생활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생활, 즉 하나님이 목적인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설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왔던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 구호에 그치고 있다. 저들이 개념을 옳게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구호에 그치는 이유는 목적을 지탱하는 수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공급자가 하나님이라면 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으로 밥상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밥뿐만 아니라 숟가락, 젓가락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거짓신앙의 문제는, 밥은 하나님에게 공급받고 숟가락은 자신의 것을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자신들은 인본주의가 아닌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밥은 깨끗한데 독이 묻은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지 않으신다.
인본주의에 대한 고찰은 신앙 생활 전반에서 성경과 다르게 형성된 모든 것들에서 살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내용과 다르게 말하는 교리는 물론이고, 성경의 내용과 다르게 시작되어 지금은 종교적인 관습으로 굳어진 모든 것들을 색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에 바탕을 두고 논리적 귀결에 따라 본질적인 부분에만 치우치는 것은 사탄의 계략을 피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본주의를 논하는 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본질적인 부분, 즉 중요 부분의 문제뿐만 아니라 중요 부분 이외의 부분에서도 중시되어야 한다는 논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교회나 학계에서 인본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그들도 인본주의 속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올무 속의 올무를 보지 못하고 말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색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교리의 잘못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 들어와 마치 성경의 내용인 것과 같이 행세하는 종교적 관습으로 굳어져 있는 세상 것들로 골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1. 인본주의에 의해서 가미된 것들
하나님과 계어진 괸계를 회복하는 길은 인본주의에 의해서 가미되어 성경의 내용과 다른 모든 것들을 색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신비안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말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인본주의적인 것들을 가려내어 온전하게 성경적 생활을 회복하는 일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 일은 절대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회복하는 방법이 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생활을 복원하는 일이 이 속에 있다.
인본주의에 의해서 가미된 것들을 색출하는 기준의 성경이다. 사도행전 속의 초대교회와 지금 교회의 다른 모습을 찾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였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초대교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그 원리를 찾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이다.
<인본주의의 사례>
가. 인본주의의 시작
"사도들과 에언자들에 관해서는 복음의 지침에 따라 이렇게들 하십시오.
오는 모든 사도는 마치 주님처럼 영접 받을 일입니다. 그는 그러나 하루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됩니다. 만일 사흘을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
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
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본문은 A.D.100년경 시리아 지방 어느 시골 교회의 규범서로 사용하였던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는 제호의「디다케 」의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 가운데 성경의 내용과 다른 것은 "빵은 받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성경에는 떠돌이 사도들에게 빵도 받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막 6:8) 그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이 여행을 휘하여 지팡이 한 개 외에는
짐 보따리나 빵이나 돈주머니나 아무것도 취하지 말게 하시며
(눅 9:3) 그들에게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취하지 말라. 지팡이
들이나 짐 보따리나 빵이나 돈도 취하지 말고 덧옷도 두 벌 취하지
말라.
이 내용을 살펴보면 속사도 시대에 이미 인간의 생각이 가미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명령은 빵도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세기 이후 속사도들은 먼 길을 떠나는 사도들을 생각하여 약간의 양식인 빵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각을 덧붙여 가르친 것이다. 「디다케 」의 저자가 누구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기록 속에 성경과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빵은 받아도 괜찮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까마귀를 통해서 먹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한 인간의 생각이다.(왕상17:6)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빵은 받아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금 교회에 적용한다면, "식사비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들 수 잇다. 그러나 성경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고 말한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피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빵은 받아도 괜찮다." "식사비 정도는 받아도 된다."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이 변질된 생각이다. 복음의 변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본주의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지금 기독교의 실상을 보면 사례비를 받지 않고 부흥회라는 것을 해주는 목사는 없을 것이다. 성경의 기록과는 무관한, 성경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인본주의를 따르는 자들이다. 인본주의의 바탕이 사탄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나. 침례와 성찬을 약식으로 간소화시킨 것
"세례에 관해서 여러분은 이렇게 세례 주시오. 미 모든 것들을 먼저 말하고
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살아있는 물로 세례 주시오. 만일 살아
있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로 세례 주시오, 찬물로 할 수 없으면 더운 물로 하시오.
둘 다 없으면, 아보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부으시오. 세례 전
에 부세자와 수세자는 미리 단식하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할 수 있으면 미리
단식하시오 당신은 수세자에게 하루나 이틀 전에 단식하라고 명하시오."
「디다케 」의 내용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것은 침례에 관한 의식이다.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한 의식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의 방법은 온몸을 완전히 물에 담그는 것이다. 그러나 「디다케 」의 본문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약식 세례가 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은 것이다.
A.D. 100년겅 성경의 기록과 다른 침례, 즉 머리에 물을 묻히는 약식 세례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가려는 인간의 혼적인 근성이 드러난 인간의 생각의 산물인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음의 길은 쉬운 길도 아니고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길도 아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세례를 살펴보면 침례를 고집하는 교단도 있지만 대부분 약식 세례로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침례를 세례로 간소화시킨 것은 대표적인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세례'라는 단어도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세례(洗禮)라는 단어도 씻는다는 의미이고, 침례(浸禮)는 몸을 담근다는 의미이다. 성경적 방법은 몸을 물에 담그는 침례가 옳다. 성경에 머리에 물을 뿌리는 약식으로 행해진 세례의식은 없다.
따라서 지금 교회의 관습으로 굳어진, 물을 뿌리는 약식 세례는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 세례는 성경의 기록된 대로 온 뭄을 물에 담그는 침례로 바꾸어야 한다. 요한은 물이 많은 곳에서 침례를 행하였다.(행 10:47,한글킹)
"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어느 누가 물로
침례를 받는 것을 금하리요?" 하며
여기에 덧붙여, 세례를 받기 전에 행하는 학습문답이나 세례문답도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았다면 세례를 안 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지금 교회가 형식의 극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마찬 역시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지금 교회에서 행하는 약식 성찬으로 바뀐 것이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 성만찬은 한 끼를 먹는 푸짐한 식사였다. 바울 사도는 "만찬을 먹을 때 다른 사람보다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했다."고(고전 11:21) 말한다. 또 '먹으려고 모일 때는 서로 기다리고, 시장하거든 집에 가서 먹으라고 말한다.(고전 11:33~34, 한글킹)
33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너희가 먹으려고 함께 모일 때면 서로
기다리라.
34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으라. 이는 너희가 함께 정죄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나머지 일들은 내가 가서 정리하리라.
이 기록은 성찬이 풍성한 식사였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지금이 성찬과 같이 손톱만한 빤 조가리하나와 병아리 눈물 같은 몇 방울의 포도주가 아니었다. 취할 정도로 마셨고 만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식사였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만찬의 내용이다.
이와 같이 식사가 인간의 생각으로 간소화되기 시작하였다. 1세기와 2세기 초에는 만찬을 "love feast(사랑의 향연)"로 불렀다. 이레니우스 A.D.(140?~200)는 떡과 잔을 "제사"라고 불렀던 최초의 사람이었고, 떡과 잔이 식사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터툴리안(150/160-222/223)때부터였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즉, 성경적인 방법이 아닐 때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만찬에는 영적인 능력이 함께 하였다.
29 이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함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의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라.
30 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었으며 상당수가
잠들었느니라.(고전 11:29~30,한글킹)
본문의 내용은 많은 사람이 만찬을 잘못하여 약하고 병들었으며, 상당수가 잠들었다(죽었다)는 내용이다. 만찬에 참석하였는데 병들었고 죽었다는 것은 한 끼 식사를 하고 사람들이 병들었다는 것이고, 한 끼 식사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초대교회의 모든 의식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능력이 함께 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의식은 단순한 형식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다. 성경에 없는 직분들
인본주의 사례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에 없는 직분들이다. 지금 교회에 있는 권사, 안수집사, 목사, 강도사, 전도사 등은 성경에 없는 직분이다. 이 직분들은 교화 운영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목사라는 직분이다. 목사라는 직분은 성경에 없다. 성경에서 목사라는 단어가 등장한 곳은 에베소서 4장 11절(엡 4:11)의 오중 사역인데, 오중 사역 가운데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직분이 목자라는 직분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우산 지금 성경에 기록된 '목사(pastor)'라는 호칭은 성경적 호칭이 아님을 밝혀둔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목사로 번역되어 있는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포이맨(poiman)'으로 그 뜻은 목사가 아니라 '목자(shepherd)'이다. 목사라는 표현이 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의 원뜻은 목사가 아니라 목자라는 것이다. '목사(pastor)'라는 단어는 원래 성경에 없는 단어이고, 번역과정에서 나타난 비성경적인 단어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목자와 지금의 목사의 역할을 비교해보면, 우선 성경의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이다. 양 위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고 양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양의 필요를 체우고 늑대나 이리로부터 양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의 역할이다.
라. 기타 인본주의의 사례
지금의 기독교는 사도행전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내용이 지금 성도들의 생활과 맞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배운 자들은(갈 1:12) 누구나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이 해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된 것이라.
설교의 제한도 없었다. 세례를 주는 것, 성찬을 하는 것 등 모든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A.D.39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평신도는 성직자들 앞에서 설교하지 못한다."는 규정에 의해 그 자유함을 박탈당했다. 성직자들 없이는 세례나 성찬 등도 금하였다. 이런 제약들이 이미 2세기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의 생각이 가미된 인본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맹위를 떨친다.
1517녀뉴 영국의 코벤트리(Coventry)에서는 다섯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이 자녀들에게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화형장에서 불태워졌다. 주 기도문과 십계명을 가르쳤다는 것이 죽을 죄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초대교회의 형태인 가정교회가 완전히 말살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잔재는 지금도 남아 있다.
성경 말씀은 신학교를 나온 직업 목사에게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평신도가 성경을 가르치고 공부하면 이단이라고 말한다. 평신도가 받은 계시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환경이 아니라 평신도는 성경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지금 환경의 대부분이다. 이런 분위기는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의 환경이 아니다.
교회 속에 들어와서 안 될 것은 이교의 풍습과 전통이다. 교회에서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입는 목사들의 가운, 즉 성직자 복장은 구약의 제사장복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레코 로만(Greco-Roman)의 세속적인 의상에서 유래헸다. 알랙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150?-215)는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더 나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역자의 의복은 단순하고 흰색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흰색은 수세기 동안 성직자의 색깔이었다.
흰색이 성직자의 색이 되게 만들었던 관습은 "흰색은 신들의 색깔'이라고 주장한 이교 철학자 플라톤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이; 사상에 충실히 영향을 받은 클레멘트와 카르타고의 터툴리안(150/160-222/223)은, 둘 다 염색한 옷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속사도 ㅅ대에 이미 성직자를 구별하는 의상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제롬(342/345-420)의 경우는 성직자가 평상복을 입고 성소에 들어가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헀다.
이렇게 이교 사상에 의해서 자리 잡게 된 성직자 의상은 5세기 이후로는 감독들이 자주색을 입게 되었고, 6세기와 7세기에서는 특별한 예복이 보편화되었다. 7세기와 8세기에 와서는 예복이 구약의 레위 제사장의 의복을 물려받은 신성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이교 관습을 정당화시키려고 한 비성경적인 행위였다.
성직자의 역할은 구약으로 보면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의 역할이다. 구약의 선지자는 정해진 의복이 없었다. 그 예로, 마지막 선지자인 침례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다는(마 3:4) 것을 생각한다면 저들의 주장이 비 성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세기 무렵에 와서는 성직자들이 평상시에도 사람들과 구별되는 평상복을 입기 시작했다.
이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야생꿀이더라.(마 3:4)
종교개혁 이후로 성직자 예복 대신에 학자들은 검은색을 택했고, 검은 복장은 곧 개신교 목사들의 의복이 되었다. 루터교 목사들은 검은색의 긴 가운을 입고 다녔고, 그들은 둥근 칼라를 목에 두르고 다녔다. 17세기에는 이 칼라를 "연자 맷돌 칼라(the millstone ruff)"라 불렀다. 루터교 일부에서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19세기에 와서는 검은색의 칼라와 넥타이를 사용했고, "dog collar"라고 불렀던 성직자용 칼라를 들렀다.
성직자용 칼라의 기원은 18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카톨릭의 고안품이 아니라 성공회에서 나온 것이다. 이 칼라는 빼서 움직이게 할 수 있었는데, 성직자들은 이 칼라를 빼서 평상복 위에 걸치고 다녔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사람드에게 나타내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어떤 개신교 목사들도 성직자용 칼라를 두르는데, 자신이 성직자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출처: 성경적 구원(박찬빈 저)중에서 발췌>
첫댓글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올여주셔서 넘감사합니다 샬롬
귀한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