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恨中錄]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기록하다.”
*역사적 사실에 의한 픽션입니다.*
#.31 서찰
“세자저하..!!! 저하!!!”
“무슨 호들갑인게냐.”
“서둘러, 서둘러 전하께..!!!!”
한상궁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 다급함의 이유를 알아냈다. 아버지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일까. 분명 궁에서보다 훨씬 호전되시었다고 어의의 장담을 들었는데. 세자는 문짝이 떨어지도록 세차게 밀쳐내고는 곧바로 상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바마마-!!”
“왜 이리 법석들이냐. 소란들 피우지 말라 하였거늘-”
상석에 앉아 심장 언저리를 오른손으로 짚어내며 왕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뭔가의 충격으로 인한 호흡곤란, 그것이 원인인 듯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버지의 손에 구겨진 채 들려있는 낯선 서찰이겠지.
무슨 서찰이시옵니까, 물어오는 세자에게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일단 모두 나가있으라, 주위를 물리고 아들과 단 둘이 남게 되자 상왕은 서찰을 내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읽어보아라. 그리고 네가 나의 후계자임을 잊지 말거라.”
무슨 말씀이신지, 그 안에 어떤 뜻을 담고 하시는 말씀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표정으로 보아 서찰에 담긴 내용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님이 확실해 보였다. 심장이 즉시 반응했다. 두근두근, 제발, 이 순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만 아니라면-
[ 소첩 조 귀인 아뢰옵니다.
온궁으로 행차하신지가 벌써 스무날이 가까웠사온데 전하의 옥체 강령하신지, 아무도 연통하는 사람이 없어 궁에 남은 이들은 그저 걱정으로 보내고 있사옵니다. 청산이 뿜어내는 더운 기운을 보아 여름이 다 되었음을 전하께오서도 보고 계신지요. 어서 강령하신 모습으로 돌아오시어 소첩등에게 형용 못할 기쁨을 주시오소서.
궐 안은 중전마마를 비롯한 모두가 안녕(安寧)하시옵니다. 다만 근자에 또한번의 슬픔이 있어 남겨진 이들만 쉬쉬하며 가슴을 죄고 있사오니, 이 일은 전하께 반드시 고해야 할 일인지라 소첩이 붓을 들었나이다... 세자저하 이후의 종사(宗嗣)가 위태롭게 되었사오니 이 슬픔과 이 고통을 어찌 알려드려야 한단 말입니까... ]
사락- 하고 세자의 손에서 하얀 서찰이 미끄러져 나갔다. 서찰의 내용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음인데, 더 읽지 않아도 알만한 내용이었다. 아니, 더 읽었다가는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앞선 이유도 있었다. 보내온 사람도 그러하거니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내용들. 흔들리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심장이 몸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 세차게 진동하였고, 그 떨림이 손끝까지 전해져 온 감정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서찰은 오늘 아침에 도착하였느니라.”
“........”
“세손까지 잃게 되다니 종묘의 성조들께서 나의 부덕을 꾸중하고 계심이니라..
더 지체할 것 없이 환궁할 것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준비를 서두르라.“
“..예, 아바마마.”
‘네가 나의 후계자임을 잊지 말거라-’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였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후계자, 한 나라를 책임질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강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이제 갓 한 살을 넘긴 아들을 잃었다. 그 연약한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자’라는 이름을, 나는 가지고 있다.
‘젠장..!!!!’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탁상위의 모든 것들을 쓸어내듯 내쳐버렸다. 그 바람에 날아간 두터운 서책이 도자기를 깨뜨리는 날카로운 소리. 바깥의 한상궁은 그 모든 소리에도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섰을 뿐이다. 저것은 저하의 목소리이다. 내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아비로서 눈물 한 줌 흘려주지 못하는 한을 담은 목소리이다.
//한중록 恨中錄//
한밤중, 궁 안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남자의 발걸음이 있었다. 손에 꼭 쥔 서찰을 들고 환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향하는 곳은 동궁전. 온양에서부터 말을 달려 방금 도착한 전령에게서 받은.. 이미 늦었을 세자저하로부터의 서찰이다.
“아니, 이 늦은 시각에 어쩐일이시오.”
“..서찰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서찰이라니..”
“세자저하께오서 보내시었습니다. 은밀히 빈궁마마께 전해주시지요.”
“...!!!”
정상궁이 급히 주위를 살피며 서찰을 품안으로 받아 넣었다. 이미 궐 안의 모든 처소가 소등을 하고 잠에 빠져든 시각. 호위무관은 제 역할을 마치고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사라지고, 정상궁은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전각의 내방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하루종일 말씀없이 적막만이 가득했던 동궁. 품에 안은 세손마마의 이불은 며칠째 놓을 줄을 모르시는데, 언제쯤 그 기억을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나시려나.
“..마마, 소인 정상궁이옵니다. 침수 듭시었는지요.”
정상궁이 문 밖에서 평소보다 배는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기대하면서. 안에서 바스락- 하는 인기척이 나서, 소인 잠시 들겠사옵니다, 고하고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누웠다가 이제 막 일어난 듯, 빈궁이 자리에 앉은채로 물끄러미 정상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마, 소인이 무엇을 가져왔는지 아시옵니까.”
“.......”
..
“자, 이것 좀 보십시오. 마마, 세자저하께오서 보내신 서찰이옵니다.”
정상궁은 분명히 보았다.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세자저하- 라는 말에 일순 동요하던 눈빛을. 품안에 넣어와 온기가 남아있는 서찰을 빈궁의 손에 가만히 쥐어준다. 봉투에서 꺼내 활짝 펼친 모양으로 양 손에 쥐어드리고, 제가 읽어드리오리까- 하고 물으려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빈궁의 손이 서찰의 양 끝을 구겨질 듯 거머쥐었다. 물 흐르듯 유유히 흘러가는 이 필체는 얼핏 보아도 그 이가 보낸 것임이 틀림이 없기에, ‘온궁은 고요하고 푸르고 시원하고, 그대가 그리운 곳입니다’ 하는 첫 구절은 그 이의 마음임이 틀림이 없기에.
[ 온궁은 고요하고 푸르고 시원하고, 그대가 그리운 곳입니다.
시간이 느리다가도 어느새 빠름을 느끼고 있습니까, 빈궁. 온궁에 도착한지가 벌써 보름이 다 되었는데 연통한번 하질 않은 무심한 나를 용서하세요. 환궁하거든 이 잘못을 다 갚기로 하지요. 세손은 물론 건강히 잘 지내리라 의심치 않겠습니다. 빈궁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이니 응당 그러하겠지마는. 어서 돌아가 함께 하고 싶은 마음만 벌써 십리를 달려간 듯합니다. 아바마마께서도 크게 차도를 보이시어 효험이 좋다 안팎으로 다들 말이 많습니다. 기회가 되거든 세손도 함께 이곳에 올 수 있기를.
하고싶은 말을 다 하려거든 이 밤은 너무 짧은 것 같아 더 긴 이야기를 할 수 없겠습니다. 머지않아 궁에서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기를 약조하겠습니다. 마음과 기원을 담아 보내니, 부디 사랑하는 나의 연꽃이 시들지 않기를. ]
우리의 아들이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아직 모르는 나의 정인이 보낸 연서에는, 다시 만날 날의 희망이 가득했다. 저하- 목이 메여와 입을 열어 소리를 내어 보려 했지만 역시 입모양뿐이었다. 또한번의 좌절. 이 못난 나는 무슨 염치로 그 분 앞에 서야한단 말인가. 벙어리나 다름없는 면목없는 생을 어찌 보존해야할까.
“마마, 소인 드옵니다.”
들여놓는 것을 깜빡 했다는 양, 지필묵을 들고 다시 들어 온 정상궁이 탁상 위에 그것들을 조용히 내려놓고 빈궁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기다리실것이옵니다- 하고 웃으며 벼루위에 까만 묵을 적당히 갈아놓고는 또 다시 자릴 비운다. 하시고 싶으신 말씀, 모두 하시옵소서- 라는 말을 남겨놓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하나. 적어도 이 서찰에 기뻐하며 나 또한 신이 나서 재회의 희망에 찬 연서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손이 이제 다 나아서 언제 그랬냐는 듯 후원도 거닐고 제법 말도 한다고 적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상궁이 갈아놓은 새까만 먹물에 붓을 적셔두고도 한참 첫머리를 어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결국, 붓이 대신 전하여 줄 망설임의 첫 줄은 그리 시작하였다.
소첩, 죄인이오니 돌아오시는 길을 서두르지 마시옵소서...
첫댓글 첫댓글인가요 ^^.. 내일있을 시험 공부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잠시 들렀는데 이야.. 첫댓글 남기는 기분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네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기대되고 있는 거 아시죠^^? 늘 덧붙이는 말이지만 건필하시길 바랄게요.!
장마철 몸조심하세요 윤애 님★ 이미 시험은 다 보셨겠네요~ 윤애님 특유의 차분함으로 잘 보셨으리라 믿어요^^ 윤애님 첫 댓글덕에 저도 자신감이 막 생기네요^^ 기대해주시는 만큼 좋은 글로 보답하고 싶어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오오~ 이런,, 결국 빨리 환궁하는군요ㅠㅠ 얼마나 슬플까?ㅜ 빈궁이 쓰는 서찰의 글귀가 ,,, 마음이 아프네요.. 소첩,죄인이오니.....
장마철 몸조심하세요 ,llskljoijhrs 님★ 사극이나 시대극의 특성중에 가장 난해한게 시간 흐름이 일정치가 못하다는 것 인거 같아요^^ 당초 한달 계획했었던 온궁행차도 시간을 훌쩍훌쩍 뛰어넘어서 이렇게 지나가버리고- 저는 또 두사람의 감격의 재회scene을 위해서 바빠졌습니다^^ 꼬릿말 감사해요^^
빈궁은 너무 자괴감을 많이 겪어요.! 전 잘 모르겠지만 그게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인가요? 오늘도 재밌게 읽고 갑니다.~~
장마철 몸조심하세요 사랑한단그말 님★ 좋은 지적 해주셔서 감사해요^^ 돌이켜보면 빈궁은 정말 순진하다못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괴감이 심하긴 했죠;;;;; 앞으로 그 부분에 주의하도록 해야겠어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ㅠㅜ 세자랑 빈궁 너무 불쌍해요 근데 세자는 세손이 죽은걸알면서 왜 그런 연서를 보낸거죠?? 그리고 그 이란 말 너무 좋아요(쌩뚱맞죠?-_-;)
장마철 몸조심하세요 얄루우우 님★ 음, 질문해주신 내용에 대한 답은, 이미 요아래 최지인 님께서 해주신듯 하네요^^ 하핫, 저도 '그 이'란 말의 어감이 꽤나 좋아서 요즘 남발하고 있습니다>_<;;;;; 자제해야죠^^ 꼬릿말 감사합니다^^
음..세자가 보낸 서찰이 먼저 빈궁에게 도착하고 세자가 뒤늦게서야 세손의 죽음을 안것이 아닐까..하는..생각을 해봅니다
아~하!! ^ ^ 그럴수도 있겟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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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몸조심하세요 푼수쟁이 님★ 네^^!! 지적 감사합니다!! 궁안에도 안좋은 일들만 자꾸 생기고 (제 나름대로는 위기의식을 가져보고자 했던건데;;;;) 내용이 점점 우중충해지는걸 느껴요^^ 지금부터라도 조금 활기찬 분위기로 바뀔 수 있게 노력해보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해요^^
세자가 알았버렸내요. 빈궁 이제 입 좀 열게 해주세요. 답답해요. ㅜ ㅜ 귀인 하는 짓 너무 앙큼하네요 ㅋㅋ -_-
장마철 몸조심하세요 요호린♪ 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빈궁이 몇회째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제 입장에서도 답답하기 그지없네요^^;;;; 빈궁이 입을 열게 되는 계기는 이미 생각해두고 있지만 쪼금만 더 기다려주셔야 할 듯 합니다^^ 너무 길게 끌지 않을테니까 지켜봐주실거죠? 꼬릿말 감사합니다^^
28회에서 세손의 죽음이후..30회에서 세자가 지필묵을 준비하라고 하잖아요..그리고 다음 장면이 귀인이 서찰을 쓰는것으로 봐서는..세자가 빈궁에게 서찰을 보냈다→귀인이 보낸 서찰이 영조에게 왔고.부자는 환궁할 준비를 한다→세자의 서찰이 빈궁에게 전달되었다(어디까지나 제 생각이니 개의치 말아주세요--;)
장마철 몸조심하세요 최지인 님★ 역시 쎈쓰쟁이 최지인님!! 조오기 제 대신 답글도 달아주시고 감사해요^^ 예상하신 그대로가 제 의도였어요~ 아직 모든 독자님들이 한번에 이해하실 수 있는 내용을 담지 못하는걸 보면 아직 한계가 많이 남아있나보네요^^ 좀더 분발하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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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몸조심하세요 김매력 님★ 시험기간 아직 안 끝나셨나보네요~ 모쪼록 힘내시고 시험 대박나시길 빌께요^^ 화이팅>_<!! 시험 다 끝나고 다시 오시면 더 흥미로운 내용으로 뵐 수 있게 저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