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샤넬 패션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샤넬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이다. 패션은 철 지난 것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타일은 결코 그렇지 않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의해 “20세기를 이끈 가장 영향력 큰 여성 25인(25 Most Powerful Women of the Past Century)”의 한명으로 선정된 코코 샤넬(Coco chanel, 1883년~1971년)이 생전에 자주 강조하던 말이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세기의 인물들과 사랑을 나누며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는 20세기의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코코 샤넬의 본명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프랑스어: , 본명: 프랑스어: Gabrielle Bonheur Chanel, )이다. 그녀는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소뮈르라는 시골 마을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알베르 샤넬은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포도주를 파는 장돌뱅이였는데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라곤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12살 무렵 어머니가 결핵으로 인해 사망하자, 아버지는 샤넬과 2명의 여동생을 수도원으로 데리고 가 맡긴 후 미국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샤넬에게 얼마 후에는 동생 줄리아마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이 닥친다. 샤넬은 슬픔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냈으며, 심한 몽유병을 앓기도 하였다. 이때의 영향으로 샤넬은 성인이 된 후에도 수녀원 시절의 이야기는 절대로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18살이 되자 샤넬은 파리 물랭의 기숙사로 옮겨 졸업을 한 뒤 낮에는 양복점 보조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불렀던 ‘코코가 트로카데로에서 누구를 만났던가(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 ‘코코 리코(Ko Ko Ri Ko)‘ 와 같은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그녀는 ’코코‘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1910년, 가수생활을 중단한 샤넬은 당시 교제중이던 장교 에티엔 발잔의 후원으로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가게를 개업하게 된다. 얼마 후 1913년에는 아서 카펠의 도움을 받아 파리의 캉봉거리 21번지에 라는 모자 전문점을 개업하였다. 샤넬이 만든 모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녀에 가게에는 끊임없이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동안 샤넬은 여러개의 부띠끄들을 새로 오픈하였으며, 사업영역을 모자에서 드레스, 모조보석과 액서사리, 향수와 화장품 등으로 확장하며 성공을 다져나갔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가 "밤에 잘 때 무슨 옷을 입고 잡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샤넬 No.5'라고 대답한 향수는 1921년 5월 5일에 처음 선보였다. 숫자 5가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 준다고 믿었던 샤넬에 의해 ’No.5‘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어느 덧 그녀는 파리 사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그녀를 소개받고 싶어했고, 그녀가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순탄한 삶이 지속되던 1939년, 샤넬은 가혹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근로자들의 파업이 발생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샤넬은 패션계를 은퇴하였고 그로부터 15년동안 일체 사업에 나서지 않았다.
1954년, 샤넬은 패션계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녀는 실용적이면서도 미적 감각이 넘치는 슈트를 선보였고, 낮은 굽이 달린 두가지 색으로 된 슬링 백 펌프스 구두, 체인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숄더 백, 쉬폰으로 만들어진 이브닝 드레스를 연이어 출시하였다. 이후 샤넬 브랜드는 20세기 패션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1971년,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7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라고 전해진다.
코코 샤넬의 삶은 그녀보다 조금 앞서 세상을 살다간 맨발의 댄서, 이사도라 던컨을 많이 연상시킨다. 두 사람 모두 당시의 시대관념에 저항했으며, 여성의 자유를 노래했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한 사람은 춤으로, 다른 한 사람은 스타일로 세상의 흐름을 바꿨다. 아울러 비극적인 인생을 살다 간 이사도라 던컨처럼 코코 샤넬의 삶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샤넬은 정관계를 비롯해 피카소, 달리,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등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어울렸고 여러 명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눴지만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샤넬의 첫 사랑이었던 아서 카펠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샤넬은 “카펠을 잃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채울 길 없는 공허를 남기고 카펠은 떠났다”고 말했다. 1923년 영국의 대부호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열애에 빠졌으나 결혼 대신 일을 택하기로 결심하며 관계가 중단되었다. 1935년, 결혼설이 나돌던 동갑내기 연인 폴 이리브는 테니스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 외 나머지 연인들도 대부분 사망하거나 파산하는 불운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샤넬은 항상 외로움을 느꼈고 그럴수록 더욱 일에만 몰두했다. 한번은 샤넬이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친구들! 사실 친구란 없어.”
반면에 코코 샤넬이 디자이너로서 남긴 업적은 실로 지대하였다. 그녀는 코르셋을 착용하던 1910년~192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자들은 쓸모없는 복장을 갖추어야 하는가?’라며 반발하였다. 그리고 몸을 꽉 조이던 코르셋과 무거워 보이던 헤어스타일 대신 샤넬 스타일(Chanel style)이라는 독창적인 시그니쳐 룩을 선보였다. 샤넬의 핸드백은 최초로 어깨 끈을 부착하여 가방을 들어야하는 불편함으로부터 여성의 손을 해방시켰고, 저지 소재의 짧은 스커트와 심플하고 스포티한 샤넬 수트는 여성들의 걸음과 동작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20세기 초반만 해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일종의 혁명이요, 해방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코코 샤넬은 20세기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물해 준 것이다. 1955년, 코코 샤넬은 로서 모드 오스카 상을 수여하였다. 1910년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된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세계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샤넬의 브랜드 가치는 2011년 3월 기준으로 7.5조원에 달하고 있다.
가난한 장돌뱅이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고아로 성장한 코코 샤넬은 어떻게 눈부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일까? “일할 시간과 사랑할 시간. 그밖에 또 다른 어떤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라는 그녀의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일과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성공을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평소에 필자가 강조하는 인맥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의 옷 입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지만 그것이 바로 내 성공의 비결이었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코코 샤넬의 성공 비결을 한마디로 말하지면 남과 달랐다는 점이다. 그녀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여성복에 대한 관습을 타파하고 자유롭고 편한 옷을 만들었다. 그녀의 디자인은 실용적이면서도 심플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담겨있었다. 20세기 초반은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어나고 양성평등에 대한 인권의식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불편하고 틀에 박힌 옷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여성들은 혁신적인 샤넬 스타일에 열광하게 된 것이다. 샤넬은 여성들의 욕구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스타일을 제시한 것이다. 꿈의 동산을 만든 월트 디즈니,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코코 샤넬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어제와 다르게 일해야 한다. 아래에 적는 코코 샤넬의 말을 명심하고 성공을 향해 스스로를 차별화시켜 나가 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늘 달라야 한다.”
2011년 9월 20일
푸른고래 양광모
첫댓글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