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참, 남자는 팜무파탈(Femme Fatale)에 자꾸 유혹되고 여자는 스트레스를 주는
남자 나쁜 남자와의 연애를 반복 한다 네 요. 더 흥미로운 점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자꾸 이런 연애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연애 상대에게 항상100%를
잘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50%정도를 잘 대해주거나 보통은 무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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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봐야하지요. 순간순간 들었다 놨다 를 하는 전략이 있을
뿐입니다. 행동경제학을 적용하면 후자가 연애에 훨씬 효율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지막 10분 동안에 대한 기억과 느낌을 간직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헐. 여러 이유 댈 것도 없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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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중요한 대목이니 허투루 듣지 마시라. 연애할 때 상대가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두고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착각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오셀로 장군이 등장합니다. 오셀로 장군은 아내가 자신의 부관
카시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단정하고 질투심에 불타 둘 다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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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사악한 부하 이아고의 계략에 빠져 둘을 오해한 사실을 알고 후회하며
자살하는 비극을 맞지요. 유진 피터슨은 ‘사랑과 집착의 차이’라는 시에서 좋아하는
것은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 내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런데 이 마음이 건강
하게 자라나지 못하면 집착이 될 수 있다고 합디다. 사랑이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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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지나치면 사랑이 아니라 병이지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를 쓰고 뒷조사를 하는 일은 안 될 말입니다. 사랑하면 그냥 다
믿어야 하지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장고를 별도로 하지
않아도 이 이론이 대충 맞다 고 생각하는데 동의해 주실래요?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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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5시에 부산행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창녕에서 중부
내륙 고속도로를 올라타 생각 없이 고, 고씽을 했습니다. 박통이 만들어놓은 우리
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드는 생각은 아, 내가 맨땅에 해딩하러 가는 구나
누가 반겨준다고, 경부고속도로는 차관을 들여와 만들었으니 우리 형님 누님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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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눈물의 도로입니다. 그리고 한반도를 가르는데 가장 지름길은 서울에서
부산행 경부고속도로일 것입니다, 아스콘이 아마도 대구까지 깔려있었고
중부내륙고속도로는 시멘트 포장을 했습디다. 아스콘은 달러가 들어가야 하지만,
시멘트는 자급자족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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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까지 약400km, 시간으로는 4시간거리인데 저는 휴게소마다 들려 영업을
하는 통에 6시간이 걸렸습니다. 빨리 가려면 비행기를 타시라.
50분이면 주파할 것입니다. 휴게소 마다마다를 들려서 카타 로그를 전달했습니다.
건50곳을 방문했는데 발열 내피 한 장 팔았습니다.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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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좀 늦게 영업을 한 것은 인정합니다. 우리 업종은 10월에 물건을 거의
대부분 받기 때문에 저는 그저 내년을 기약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영업 30년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국토
남단 맨 끝에 왔으니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pm6시에 영업을 접고 태종대를 6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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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고서 갔습니다.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로 석양이 아름다웠습니다. 판타스틱!
레일이 없는 관광기차를 타는 삯으로 3,000원 받습니다. 때마침 노을이 주제부를
딱 채우네요. 저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시는 모양입니다. 등대부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해서 전망대에 내려, 맘 놓고 남쪽 망망대해를 스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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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색깔이 아주 고급스런 회색입니다. 노을이 컬러를 입히면서 황홀한 비경이 금 새
펼쳐졌습니다. 자연은 질리지 않고 늘 신비스러운 것 같습니다. pm6시가 됐으니
잠시 고민이 생겼어요. 해운대 백사장을 들려 모바일셔터도 누르고 담배도 한 가치 피웠지요.
폐널티가 5만원인데 모르고서 말입니다.주차비 4,000원이 아까워 조선 호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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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가 보이는 끝까지 모래사장을 걸었는데 싱글은 나 혼자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코란도에 태극기 달고 에스더 7살쯤 아내와 함께 국토대장정을 펼쳤을 것입니다.
마산 쯤인가 에서 캐리어에 매달아놓은 아이스박스를 떨어트리는 바람에 회차를
해서 찾아온 황당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해운대는 '태종대'랑 또 다른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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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에 이 백사장이 바글바글 했을 것입니다. 이런 섬에 도시를 건설하다니
그저 놀랄 뿐입니다. 그것도 폐허된 도시를 겨우 70년 만에 말입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조각 동상으로 세워져 있었고요,'친구'의 준석이가 상택이랑
놀던 그곳일 것입니다. "동수야, 물개랑 조오련선수랑 수영시합하면 누가 이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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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련 그 양반 참 허무하게 간 것 같아요. 인생이 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아무래도 오늘 상경은 무리일 것 같아 해운대 투어를 마치고 찜질방을 찾아갔습니다.
다행이 멀지 않은 곳에 12,000원짜리숙박이 있다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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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을 들러 기웃기웃거리다가 새꼬치집을 찾아갔어요. 우리나라 경기가 그닥 좋지
않은데 이곳은 다른나라처럼 느껴졌습니다. 젊은이들이바글바글 했어요. 퍼포먼스도
하고 있었고요. 중국, 러시아, 서울피플,부산피플 꼭 물좋은 나이트클럽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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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유난히 다리나 고가도로가 많은 것 같습니다. MB가 이곳 고가는 손대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퍼진 차에 이곳에 눌러 살까요? 셀카를 찍어서 예주에게 보냈더니
0,1초 만에 답장이 왔어요. 오예, 그래 리액션은 이 정도로 해줘야지."공주야 보고 싶어 많이"
"잘지내고 있어요." "고마워 답장해줘서." "아니에요. 정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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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미칠 것 같은 그림움을 어쩐답니까?
수시 두 곳 다 떨어지고 멀영과마저 떨어진 것 같은데 정시를 생각하고 있는 내 딸
예주가 고맙고 기특합니다. 그래 공주야, 인생은 길단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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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다오. 해운대와 태종대 중에 이야깃거리는 해운대보다 태종대가 훨 낫습니다.
태종대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신라를 통일한 김춘추 대왕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인맥으로 왕좌를 거머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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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는 경주김씨로 진지왕의 손자이며 김해 김 씨인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를
아내로 맞아 김유신과의 돈독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문희는 언니에게 오줌 꿈을
산 일화가 있습니다. 김춘추는 선덕여왕 때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와 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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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임무를 갔다가 감금을 당하는 등 왕족으로는 드물게 많은 고초를 겪으며 성장해
왔습니다. 진덕여왕이 후손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 동안 왕이 되었던 성골의 대가
끊어져 버렸지요. 많은 학자들은 성골의 순수성을 위해 근친을 강조했던 풍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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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지 못하게 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
들로부터 촉망받던 상대등 알천과의 경쟁이 있었는데, 알천에게는 군사가 없다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춘추는 처형인 김유신이 어마어마한 군사 권력가였기
때문에 그를 등에 업고 결국 왕으로 추대 받아 51세의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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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이가 55인데 난 뭘 했데? 이로써 무열왕 대에 왕권은 전제 화 되어 이후의
신라의 왕은 무열왕계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열왕은 백제와 매우 큰 악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열왕의 사위와 딸이 대야 성을
맡고 있었는데, 백제가 대야 성을 취하는 과정에서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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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려는 비원을 품게 되었습니다. 660년에는 그가
진덕여왕 때부터 인맥을 쌓아왔던(?) 당나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치게 됩니다.
이 역시 김춘추라는 인물이 인맥으로 자신의 비원까지 해결했다는 점에서 매우 처세가
좋았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지요. 결국 상대등으로 임명된 김유신을 주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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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는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 내고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을 받는 왕이지만 한 편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왕이 됐다기보다는 인맥을 통해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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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고 신라 자체의 힘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기보다는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에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며 반쪽짜리 삼국통일을 시켰다는 평도
있습니다. 당을 통한 삼국통일로 인해 고구려의 많은 영토를 빼앗기는 등 의 단점
같이 중요한 일들을 모두 그런 식으로 해결을 한다면, 당장은 편할 수 있으나 추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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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매우 좋지 않을 수 도 있다는 얘긴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외교 전략으로는 김춘추의 삼국통일, 서희 장군의 강동6주 담판,
이제현의 입성책동(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키는 책략) 저지, 광해군의 균형외교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두 번의 통일을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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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그것입니다. 당시 삼국에서 가장 국력이
약한 신라가 삼한일통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신라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과 조국을 위한 충의의 자세로 결속한 국민의 ‘총화단결’이었습니다.
김춘추는 가야계인 김유신을 포용하고 당태종과 일본과의 등거리 외교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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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했지요. 그가 648년 당나라로 건너가 나당연합을 위해
당태종을 설득한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문화전입니다.
70년대 초 미중수교 당시 핑퐁외교처럼 “공자를 배우고, 신라에 가르치고 싶다”는
‘중화정책’ 제안입니다. 귀국한 김춘추는 관복을 당의 관제로 바꾸고, 당의 연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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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였습니다. 기타 당의 선진 제도를 받아들여 유교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 운영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정 개혁은 당의 신뢰를 얻는 데에도 기여하였지만,
무엇보다 신라사회의 기존체제를 발전적으로 재편하는 데 유용하였습니다.
둘째, 심리전입니다. “군량미 평양 이송을 신라가 보급하겠다.”는 제안은 안시성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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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에서 고구려에 패한 당태종이 백제가 신라를 병합하는 것은 고구려 이상의
화근이 될 수 있으며, 한반도 동쪽 구석에 치우친 신라가 후환이 없다고 판단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당태종은 억강부약, 원교근공의 병법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진덕여왕이 손수 비단에 당나라 황제를 찬양하는 "태평 송"을 수놓아 바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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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전의 일환이었습니다. 셋째, 인질전입니다. 자신의 제안에 대한 신뢰구축을
위해 아들들이 당에 볼모로 남는 제안입니다. 좌 무위 장군(황제 측근의 경호 담당)
에 제수된 문왕( 김춘추의 3남)은 당조정의 고위관리들과 관계를 강화하고 신라에
유리한 여론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했으며, 국학에 유학 온 신라학생들의 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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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이용해 당을 둘러싼 전 세계의 정보를 수집해서 신라에 보냈습니다.
651년 문왕이 귀국하고 형인 김인문이 입당해 그 자리를 맡았습니다.
김춘추에 대해 “외세를 빌려 동족 국가를 망하게 함으로써 민족의 무대를 축소했다”
는 역사학계 일부의 평가가 있으나 신라는 통일 이후 당과 결전을 벌여 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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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도독부 등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설득력이
없으며, 김춘추는 신라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본류가 되도록 한 영걸입니다.
북한은 자신들이 ‘고조선-고구려-발해’를 계승했다고 강변하며 민족주의 사관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북의 ‘신라 삼국통일’ 폄하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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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연료비 30만원에 3000km를 뛰었습니다.
우씨, 돈이 필요한데 돈만 못벌었어요.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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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9.sun.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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