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유관 전(柳灌傳)
공의 휘(諱)는 관(灌)이요 자는 관지(灌之)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사헌부 장령(掌令) 정수(廷秀)의 아들로서 성화(成化) 갑진년에 태어났다. 장령공은 연산조(燕山朝)에 바른 말을 한 까닭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힘써 배워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다. 홍치(洪治) 병인년에 국운이 새로워지자(중종 반정을 가리킴) 이듬해 정묘년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높은 벼슬에 올라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가정(嘉靖) 을사년에 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우의정에 뽑혔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좌의정에 올랐다. 7월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장차 윤임에게 묵은 감정을 통렬히 갚으려고 하였다. 8월 21일에 이기(李芑)들이 충순당에 입대(入對)하고 윤임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으며, 공에게는 조금 죄의 혐의가 있다고 이르고 처음에는 정승을 해임하기를 청하였다. 며칠이 못 되어 서천군(舒川郡)에 부처(付處)시켰다가 온양(溫陽)에 이르러 곧 사약이 내렸으니 같은 달 29일이었다. 정순붕(鄭順朋)이 상소(上疏)하여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따라서 극전(極典 사형)에 처하였다. 전지에 이르기를, “유관은 본시 윤임과 더불어 서로 교제가 친밀하였는데 대행왕(大行王 인종을 가리킴)의 병환이 위중할 때를 당하여 정통(正統)이 자연 돌아갈 곳이 있는데, 유관은 마땅히 세울 후계자를 품정(稟定)할 것을 말하였다. 내가 대위(大位)를 이은 뒤에 수렴 청정(垂簾聽政)하는 것은 옛 제도가 있는데, 유관은 모후(母后)가 조정에 임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몰래 다른 뜻을 품고 마음의 욕심을 이루려고 꾀함이라,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니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어 사약을 내린다.” 하였다. 공의 성품이 곧고 밝으며 일을 만나면 강개(慷慨)하였다. 조정에서는 낯빛을 바로하고 꼿꼿이 하며 아첨하지 아니하고 내궁(內宮)에 관계되는 일이라도 반드시 극진하게 말하고 꺼리지 않으며, 마음이 전일하여 나라 일을 반드시 남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청탁하지 못하였다. 중종(中宗) 말년에 어진 사람과 늙고 덕 있는 신하로서 조정에서 물러났던 이들을 모두 다시 기용하여 울연(蔚然)히 조정에 들어가서 모두 공을 중하게 여겨 서로 행실을 갈고 닦으며, 기강을 바로잡아 청의(淸議 맑고 올바른 언론)를 확장하니 당시의 불순한 무리들이 눈을 흘겼었다. 일찍이 이조 판서로서 친정(親政 임금이 친히 인사행정을 보는 일)에 입시(入侍)하니, 중종(中宗)께서 특별히 이기(李芑)로써 병조 판서를 삼으려 하니 공이 곧 아뢰기를, “이기는 부정한 관리의 사위로서 높은 관직에 기용되지 못하오니 명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기 때문에 정지되었다. 대저 공은 벌써 이기가 음험하여 나라를 흉하게 할 것을 염려하였으며 이기의 원한도 여기에서 싹텄다. 공이 신축년 겨울에 찬성(贊成)으로부터 평안 감사로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조정에서 만류하였으며 계묘년 겨울에 다시 전명(前命)이 내렸으나 삼사(三司)에서 내직과 외직은 경중이 다르다는 이유로써 연명으로 상소하여 굳게 반대하였다. 공이 듣고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노신(老臣)이 어느 곳에서나 충성을 다하여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해야 하는데 이제 조정 논의가 이와 같으니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하였다. 아들 광찬(光纘)의 자(字)는 종백(宗伯)이다. 원래 사도정(司導正) 엄(嚴)의 아들인데 의정공(議政公 유관을 가리킴)이 아들이 없어서 데려다가 후사를 삼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바른 행실이 있었다. 을사의 변에 의정공은 처음 옥결(玉玦)을 받을 적에 이미 화(禍)가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을 알고 파계 문권(罷繼文卷 파양하는 문권)을 만들어 주어 노륙(孥戮 연좌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이는 형(刑))의 형을 면하게 하였다. 대개 공이 입계(入繼)한 뒤에 의정공의 서자가 곧 났으므로 이를 파계의 핑계로 삼았으니 정리로 보나 법으로 보나 다 근거가 될 만하였다. 연좌의 법률을 적용하는 날에 가족들이 이 사실을 가지고 관에 고하여 죽음을 용서하게 하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한 번 아버지와 아들로 이름을 하였으면 좋은 일이나 궂은 일에 어찌 마음을 달리하리오.” 하고, 드디어 그 문서를 소매에 넣고 내어놓지 아니하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으니 같은 해 9월 11일이었다. 죽을 적에 직접 글을 써서 그의 생모 및 가족에게 주어 영결(永訣)하고 또 스스로 만사(挽詞) 두 장을 지었는데, 글뜻이 매우 슬퍼 듣는 사람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덕(正德) 병자년에 태어나서 나이가 겨우 서른이었으며 일찍 음보(蔭補)로 시직(侍直)이 되었다. 공의 배(配)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인데 예빈시정(禮賓侍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본디 의리를 알고 서사(書史)에도 약간 통하여 공과 의정공 섬기기를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하였다. 집안의 재앙을 당하여서는 어린 종과 그리고 작은 재물까지도 모두 적몰되고 말았는데, 신씨는 외로운 한 몸으로서 형벌의 화를 무릅쓰고 의정공의 유해를 수습하여 공의 관(棺)과 같이 선영(先瑩) 밑에 장사하고 서울서 수십 리의 거리가 되는 곳인데도 삭망에는 반드시 무덤에 올라가고 비와 눈을 가리지 않았다. 두 신주를 받들고 남의 집을 빌려 살면서 품팔이 하고 꾸어서도 제사를 마련하는데 예절과 제물이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며 조금도 음식을 입에 넣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슬피 울기를 항상 초상 때와 같이 하였다. 정미년 가을에 벽서(壁書)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죄인의 여러 아들들의 가산을 추가로 적몰할 때 금졸(禁卒)들이 이르러 신씨를 몰아내었는데, 더할 나위 없이 여위어서 길에서 쓰러지면서도 두 신주를 가슴에 안고 잠시도 버려두지 않았으니 원근에서 칭찬하며 그의 의열(義烈)에 모두 감복하였다. 마침내 성은을 입어 다시 하늘의 해를 보면서 늙어서 죽었다.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철(澈)을 후사로 삼았는데 조정에서 녹용하여 의정공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고, 선무종훈(宣武從勳)에 참여했고 공에게는 좌승지(左丞旨)를 증직하였다. [출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유관 전(柳灌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