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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의 감개무량한 뜻을(男兒感慨志) 불평스런 울음으로 쏟아내야 하리(應費不平鳴)
한포재집 제2권 / 시(詩)
동지 정사로 가는 소재 종형께 추후에 부치다〔追寄疎齋從兄冬至上使之行〕
서쪽 교외에서 서둘러 작별하니 / 草草西郊別
북쪽 변방으로의 아득한 노정이라 / 悠悠北塞程
천시는 통곡할 만하고 / 天時堪慟哭
인사는 몇 번이나 변했던가 / 人事幾遷更
수악의 구름은 항상 어둡고 / 壽嶽雲常暗
난하의 물은 절로 맑다오 / 灤河水自淸
남아의 감개무량한 뜻을 / 男兒感慨志
불평스런 울음으로 쏟아내야 하리 / 應費不平鳴
[주-D001] 동지(冬至) …… 종형(從兄) :
‘소재 종형(疎齋從兄)’은 이건명의 사촌 형인 이이명(李頤命, 1658~1722)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이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고 대사헌 이민적(李敏迪)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6)에 문과에 급제한 뒤 수찬ㆍ교리ㆍ지평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다가 갑술옥사로 인해 조정에 돌아왔다. 평안도 관찰사ㆍ예조 판서ㆍ이조 판서 등을 거쳐 1706년 우의정에 올랐다. 1708년 숙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면서 좌의정에 올라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 실패해 다시 남해(南海)로 유배되기까지, 15년 동안을 노론 정권의 핵심적 존재로 활약하였다. 1721년(경종1)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패하자,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남해에 유배되어 있던 중,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이듬해 4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여기서 ‘동지 정사’는 1704년 겨울에 갔던 동지사를 말한다.
[주-D002] 수악(壽嶽) :
현재 중국의 북경(北京) 시내에서 서북방으로 40km가량 떨어진 창평현(昌平縣)의 천수산(天壽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천수산 남쪽에 명십삼릉(明十三陵)이 있다.
[주-D003] 난하(灤河) :
만주(滿洲) 열하성(熱河省) 지방을 흐르는 강 이름으로, 보통 상도하(上都河)라고 불린다.
[주-D004] 불평스런 울음 :
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사람이 불우하게 지내야 좋은 시문을 짓는다는 뜻을 말하면서 “만물은 평정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라고 하였다. 《韓昌黎文集 卷19 送孟東野序》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황교은 (공역) | 2016
追寄疎齋從兄冬至上使之行
草草西郊別。悠悠北塞程。天時堪慟哭。人事幾遷更。a177_356b壽嶽雲常暗。灤河水自淸。男兒感慨志。應費不平鳴。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6
한포재집 제1권 / 시(詩)
심양에서 옛날을 회상하며〔瀋陽懷古〕
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눈 먹던 곳을 / 吾祖昔年餐雪地
소손이 오늘 얼음물 마시며 가네 / 小孫今日飮氷行
천시와 인사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 天時人事今猶舊
야리강 가에서 곱절이나 슬프구나 / 耶利江邊倍愴情
[주-D001] 옛날 …… 곳 :
할아버지는 이경여(李敬輿)이다. 눈을 먹는다[餐雪]는 것은 사신으로 가서 고초를 겪음을 말한 것이니, 한 무제(漢武帝) 때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 갔다가 굴속에 갇혀 눈을 먹고 연명한 일에서 유래하였다. 《漢書 卷54 蘇武傳》 1642년(인조20)에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계(李烓)가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항상 명나라에 뜻을 두고 있다고 이경여를 밀고(密告)함으로써 이경여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다. 1644년에 사은사(謝恩使)의 정사(正使)로 연경에 갔을 때 이 일로 원한을 품고 이경여를 구금하였는데, 꿋꿋하게 절의를 지키다가 돌아왔다. 《宋子大全 卷157 白江李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13輯》
[주-D002] 소손(小孫)이 …… 가네 :
할아버지가 사신 갔던 그 길을 오늘날 자신이 감을 말한다. ‘얼음물을 마신다’는 것은 사신 가는 고초를 말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내가 오늘 아침에 사신의 명을 받고는 저녁에 얼음물을 마셨다.[今吾朝受命而夕飮氷]” 하였다.
[주-D003] 야리강(耶利江)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니, 심양에 있는 강 이름으로 보인다. 한국문집총간 171집에 수록된 《옥오재집(玉吾齋集)》 권3 〈사은사 서장관 이중강을 전송하며[送謝恩書狀李仲剛]〉에 “야리강 가는 곧 심양이다.[耶利江邊卽瀋陽]” 하였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황교은 (공역) | 2016
瀋陽懷古
吾祖昔年餐雪地。小孫今日飮氷行。天時人事今猶舊。耶利江邊倍愴情。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6
* 한포재집[寒圃齋集]
편저자 이건명{李健命)
제작시기 1758년
권수·책수 10권 5책
간행·발행·발급자(처) 홍봉한
소장처 규장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민대학교 도서관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건명(李健命)의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758년(영조 34) 홍봉한(洪鳳漢)의 주관으로 간행되었다. 권말에 이건명의 손자 이복상(李復祥)의 발문이 있다.
서지적 사항
10권 5책. 활자본. 규장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국민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권1·2에 시 311수, 권3∼7에 소차(疏箚) 108편, 계사(啓辭) 19편, 권8에 수의(收議) 20편, 전(箋) 4편, 과제(課題) 2편, 교서(敎書) 7편, 비답(批答) 3편, 애책문(哀冊文) 1편, 권9에 서(序) 5편, 기(記) 2편, 제발(題跋) 4편, 잡저 4편, 묘갈명 2편, 묘지명 2편, 묘표 1편, 행장 3편, 권10에 제문 34편, 애사 4편, 서(書) 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자연을 읊은 것과 청나라에 사신으로 내왕하면서 지은 서사시(敍事詩), 그밖에 차운시(次韻詩)·만시(挽詩) 등이다. 소는 대개 사직소·서원청액소(書院請額疏)·건의소(建議疏)로 나눌 수 있다. 1697년(숙종 23) 응교(應敎)로 재직할 때 올린 「진계소(陳戒疏)」는 시폐(時弊)를 지적하여 제왕이 취해야 할 도리 및 경세(經世)·이민(理民)의 방책을 건의한 것이다. 왕이 솔선하여 예(禮)와 의(義)로 다스려야 이민이 되며, 병제(兵制)·양역(良役)·전정(田政) 등 3대 강령 및 역대 성군의 치적을 본받아야 치세(治世)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논양사소(論兩司疏)」는 1694년 갑술옥사로 인해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 등에게 육지 이배(移配)의 감형을 취한 데 대해 그 부당함을 주장한 것이다. 「청균견조지령소(請均蠲租之令疏)」는 1701년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여역(癘疫)으로 인해 향민이 많이 희생되었음을 알리고, 부역을 면제해 줄 것과 조적(糶糴)을 합리적으로 처리해 주기를 청원하는 내용이다.
「논군제소(論軍制疏)」는 군제의 개선에 관해 논한 것이다. 부병제(府兵制)가 가장 합리적이며 장정제(長征制)가 가장 불합리하다고 설명하고, 송나라의 장정제와 유사한 훈련도감의 개혁을 청원하였다. 「청변통정례소(請變通政例疏)」는 관료의 전임을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지방 수령들과 무관직에 치중하여 차선(差選)을 개선하기 위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밖에 「진소회차(陳所懷箚)」·「기해의상차(己亥擬上箚)」·「인헌부계사인구차(因憲府啓辭引咎箚)」 등 수십 편의 소차가 있다
계 중 「청기전제역지폐일체혁파계(請圻甸除役之弊一切革罷啓)」는 대사간에 재직할 때 올린 글이다. 기전에 부역을 면제해 주는 폐단을 모두 혁파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소차·계사·수의·교서 등은 당시 정치 및 사회 사정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한포재집 [寒圃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건명[李健命]
출생-사망 1663 ~ 1722
조선 중기~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세종의 별자(別子)인 밀성군(密城君)의 8대손으로, 조부는 이경여(李敬輿)이고, 부친은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민서(李敏敍)이다. 외조부는 좌의정 등을 지낸 원두표(元斗杓)이다. 송시열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하였으며, 김창집(金昌集)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 · 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68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찬 · 교리 · 이조정랑 · 응교(應敎) · 사간을 역임하였으며, 1698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연행 후 우승지 · 대사간 · 이조참의 ·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하여 김창집 · 이이명 · 조태채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진력하였다.
1722년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1)이 있다고 발설하였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1725년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
이건명은 평소 옛 선인들의 필적 및 이름있는 서가들의 글씨를 즐겨 감상했다. 이몽규(李夢奎)의 후손가에 소장된 《명현수첩(名賢手帖)》을 세 차례나 열람했으며, 이정신(李正臣)이 수장한 《해동필적(海東筆蹟)》(25책)을 본 소감을 자세히 적기도 하였다. 또한 당대 서예가로 이름을 떨쳤던 이수장(李壽長)의 <임성교서첩(臨聖敎序帖)>을 열람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건명은 그 진안(眞贗)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이수장이 왕희지의 글씨를 완벽히 임모했다고 주장했다. 이로 미루어 이건명은 노론의 수장격 인물이면서도 평소 서예에 깊은 관심과 안목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건명이 쓴 대표적 글씨로는 <김징신도비(金澄神道碑)>와 <조욱묘갈(趙昱墓碣)>의 묘비문이 있다. 먼저 <김징신도비>는 1718년 김징(金澄)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로, 권상하(權尙夏)가 비문을 짓고 이건명(李健命)이 그 비문을 썼으며, 민진원(閔鎭遠)이 전액을 쓴 작품이다. 다음으로 <조욱묘갈(趙昱墓碣)>은 1745년에 건립된 것으로 조익(趙翼)이 비문을 지었고, 이건명(李健命)이 글씨를, 이징하(李徵夏)가 전액을 쓴 것이다. 두 작품은 거의 비슷한 서풍을 보인다. 단정한 해서체에 행서체가 조금씩 가미되어 있다.
김영윤(金榮胤)은 『한국서화인명사서(韓國書畵人名辭書)』에서 이건명이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고 적었는데, 특히 파책을 길게 늘어뜨리거나 별획의 끝을 올리는 등의 모습들은 송설체와 관련되는 요소라 생각된다. 그러나 속도감 있는 운필, 직선적인 필획 등으로 이건명의 글씨는 이른바 '연미지태(姸媚之態)'가 강한 조선 전기 송설체와는 구분된다.
이들 비문 글씨 외에 초서(草書)로 적은 간찰이 몇 점 알려져 있다. 이 간찰 글씨들은 특정 서체의 영향을 논하기 어려우나 기교적으로 상당히 빼어난 글씨들이다.
집필자 이성훈(서예)
주요 작품
趙昱墓碣(경기도 양평), 金澄神道碑(1718, 경기도 시흥), 간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한(개인 소장)
[네이버 지식백과] 이건명 [李健命]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 이건명[ 李健命 ]
1663~1722. 조선 후기 문신.
자 중강(仲剛), 호 한포재(寒圃齋), 시호 충민(忠愍)
출생 - 사망 1663년(현종 4) ~ 1722년(경종 2)
본관 전주(全州)
저서(작품) 한포재집
대표관직(경력) 서장관, 우승지, 이조판서, 좌의정 등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이수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이며, 어머니는 정승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하였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자는 주장)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수령이 私用으로 쓰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해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한포재집(寒圃齋集)』
『당의통략(黨議通略)』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론의에 대한 검토」(정만조, 『동대논총』7, 1977)
이건명 [李健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