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톨을 까다가
추석 귀성을 이틀 앞둔 금요일 새벽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잠깨었는데 현관 앞에 종이신문이 닿지 않았다. 전에는 내가 사는 아파트 배달 구역이 먼저였었는지 새벽 두 시면 신문이 도착했다. 그런데 근래 배달 순서가 바뀌었는지 배달을 하는 사람이 게으름을 피워선지 다섯 시 가까이 되어야 온다. 방송은 관심 없고 컴퓨터를 켜 인터넷으로 몇 꼭지 뉴스를 검색해 봤다.
아직 날이 밝아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무료했다. 나는 일거리를 하나 찾아냈다. 스무날 전 고향 선산 벌초를 다녀오면서 햇밤을 가져온 게 있었다. 매년 추석 밑에 벌초를 가지만 사실 내가 예초기를 짊어지거나 낫을 들고 풀을 자르지 않는다. 형님이나 조카가 잘라 놓은 풀을 갈퀴로 긁어내는 정도다. 어쩌면 이보다 더 필요한 손길은 선산 주변 떨어진 알밤을 줍는 일일지 모른다.
밤나무도 과수지이만 농촌에서 전업으로 가꾸는 경우는 적다. 서부경남 하동이나 합천에서 몇몇 농가가 있으려나. 밤농사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가지치기는 신경을 쓰지 않으나 시비는 해야 하고 농약도 뿌려야 한다. 밤은 산기슭 넓은지라 농약은 헬기로 항공방제를 해야 한다. 거기다가 밤나무 그루 아래 풀을 잘라야만 떨어진 알밤을 줍는데 지장이 없다. 이 모두 쉬운 일이 아니다.
밤나무는 다른 과수와 달리 산에다 심기에 수확한 밤을 옮기기도 쉽지 않다. 고령화된 농촌에서 밤농사는 무척 힘들다. 그래서 예전 밤나무 그루가 있던 산들도 묵혀져 밤톨을 거둘 수 없는 형편이다. 거기다가 멧돼지로부터 피해가 가장 큰 과수가 밤농사다. 너른 구역에다 철사울타리를 쳐 놓지 않으면 멧돼지들이 시식해 정작 농사를 짓는 산주는 밤톨을 구경하기 어려운 사정이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누워계신 고향 선산 밤나무가 제법 된다. 밤은 수확 시기 따라 조생종과 중만생종으로 나뉜다. 조생종은 팔월 하순 밤송이가 벌어져 알밤이 떨어진다. 이 무렵이면 산에 짐승들 먹이가 제대로 없어 멧돼지들의 표적이 된다. 멧돼지 주둥이는 밤송이 가시도 아랑곳 않고 즐겨 먹는다. 멧돼지는 야행성이라 밤에 내려와 밤을 까먹고 동이 트면 숲속으로 가 잠을 잔다.
지난번 벌초 때 주워온 밤을 두 차례 걸쳐 깠다. 시골에서 온 밤이나 마늘을 까는 일은 내가 전담이다. 이런 일들은 힘은 들지 않아도 인내심을 요구한다. 새벽녘에 하기 좋은 일감이다. 전에는 과도로 까니 어려웠는데 이제 밤 가위로 까니 수월했다. 먼저 깐 밤이 좀 되었으나 일부는 서울 아들네로 올려 보내고 남은 것은 밥을 짓는데 잡곡처럼 넣어 먹고 아내가 간식으로 쪄 먹었다.
상온에 두면 말라 쪼그라지는 밤인지라 냉장고 보관했다. 거실 바닥 신문지를 펴고 밤을 꺼내왔다. 무념무상 밤 가위로 밤톨을 깠다. 먹성 좋은 멧돼지가 먹고 남은 밤이 용케도 내 손에 주워져 왔다. 벌초 이후 고향 형님은 아침마다 한동안 경운기를 몰아 선산 기슭으로 밤을 주우러 올라갔을 테다. 어떡하면 멧돼지한테 알밤을 덜 빼앗길까 궁리를 해 봐도 별 다른 수 없었을 것이다.
밤을 까다가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은 쥐들이 유난히 많았다. 녀석들은 겨울엔 먹을거리가 적은지라 사랑방 아랫목 고구마에 눈독을 들였다. 황토벽 구멍을 뚫어 방으로 침입하려고 애썼다. 그러면 어머님은 나 보고 밤송이를 주워와 쥐구멍을 막으라고 하셨다. 가시가 까칠한 밤송이로 쥐구멍을 막았더니 고구마가 온전했다. 밤송이로 구멍이 막힌 쥐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두어 시간 밤을 까니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현관 앞에 신문이 와 닿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밤톨까지 모두 깠다. 아직 베란다 밖은 미명이라 컴컴했다. 새벽이면 아파트단지에서 아침을 여는 소리가 하나 더 있다. 환경미화원들이 음식쓰레기와 생활쓰레기를 수거하는 벨트 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아파트단지를 밝힌 외등이 하나 둘 꺼지면서 날이 밝아왔다. 18.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