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요한 1,1-18
나는 절대 죽지 않아. 한 말씀만 있으면.
오늘 복음은 로고스 찬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빛이십니다.
말씀이 어떻게 생명이 될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말씀을 갈망합니다.
‘책도둑’은 나치 독일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인공 리젤은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자신의 삶에 들어온 ‘말씀’을 통해 글을 배우고, 이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당시 독일은 자신들의 잔인한 폭정에 반대하는 책들은 다 불태웠습니다.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은 리첼은 그래도 인간성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배우고 불타다가 남은 책들을 주워 읽습니다.
그가 글을 배우고 읽고 쓰는 작은 지하실은 독일에 남은 작은 인간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유대인을 숨겨주며, 훔친 책들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성장시켰습니다.
어느 날 폭격으로 인해 마을의 대부분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파괴된 순간에도 그녀는 살아남습니다.
그 작은 지하실에서 글을 쓰다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잔인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양식을 삼으면 결국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리젤의 이야기는 암흑 속에서도 빛으로 존재하시는 말씀의 생명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그녀의 삶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생명과 같은 사랑과 희망을 품게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와 오프라 윈프리의 가장 위대한 멘토가 되었던 흑인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야 안젤루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큰 고난과 차별 속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글과 시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왜 새장에 갇힌 새가 노래하는지 안다’라는 그녀의 시는 자유를 갈망하며 억압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의 영혼을 노래합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희망을 전파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마야 안젤루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의 말씀처럼, “주님을 바라는 이는 새의 날개처럼 힘을 얻는다.”라는 구절이
그녀의 삶에 잘 들어맞습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에는 피가 묻어있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수많은 역경을 거쳐오며 깨달은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가 “너는 네가 믿는대로 될 것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여 믿음을 키웠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오프라 윈프리를 절망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말씀은 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었습니다.
한 번은 성체를 영하면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삶의 방향을 사제로서의 길로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제직의 여정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동안 저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음을 느낍니다.
이는 시편 119편 105절에 나오는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제 길의 빛이옵니다.’ 라는 고백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이끄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진리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이를 믿고 말씀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생명이고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한 말씀은 나의 모든 고통을 치유해 줄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말씀으로 나의 길을 닦는다면,
“난 결코 쓰러지거나 죽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복음: 요한 1,1-18
충만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우리 모두 또다시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니 즉시 떠오르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
이 정도 선에서 올해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제주 항공 여객기 참사가 우리 모두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초대형 참사를 바라보며 너무나 안타깝고 안쓰러워 할 말을 잊습니다.
그 많은 꿈과 희망, 애틋한 사연들, 못다한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번 참사로 세상을 떠난 희생자 한분 한분을 당신의 크고 따뜻한 품에
꼭 안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리 황망히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 한분 한분을 따뜻이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합니다.
대형 참사를 접할 때마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할지라도,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 실감합니다.
우리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것, 그래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매일 매일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충만한 하루를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한해였지만, 돌아보니 지나온 한해, 비록 실패와 상처투성이, 죄와 십자가의 연속인 우리네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좋으신 주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폭포수처럼 받았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참 다양한 함의(含意)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하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 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완전 방전된 밧데리 상태의 제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 몸 서 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꼽아야겠습니다.
그것이 기도 생활이요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강론>
(2024. 12. 31. 화)(요한 1,1-18)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1) 지나가는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다가오는 시간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두 경우 다 하느님이 ‘시간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입니다(묵시 1,8).
시작하는 것도, 마치는 것도 전부 다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 4,13-16).”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내일’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아무 권한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일’이 나에게 주어질지, ‘내일’에도 내가 살아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내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다.” 라는 말은, 인간이란 정말로 보잘것없는(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인생은 참으로 허무합니다.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하는 인생이 아니라면......
2)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시작할 때, 그 일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계시를 받아서 명시적으로 허락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또 우리 입장에서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확신하는 경우라도, 결과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3) 바벨탑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창세 11,1-9).
하느님께서는 처음에는 인간들이 탑을 쌓는 것을 내버려 두셨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벨탑을 쌓는 것을 막고 사람들을 흩어 버리신 것은, 사람들이 한창 공사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거의 완성 단계까지 간 것을 하느님께서 허물어
버리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또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바벨탑처럼 허망하게 무너집니다.
건물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자랑하는 업적들 전부 다,
세속의 불의한 권력들도, 부정하게 모은 재물들도......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도 바벨탑의 경우와 같습니다(마태 24,1-2).>
4) 자신의 인생을 ‘바벨탑을 쌓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바람’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희망’인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욕망’인가?
<세속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라면 ‘선한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헛된 바벨탑을 쌓는 ‘악한 욕망’일 뿐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태도는,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총에 감사드리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진정한 감사는 참된 겸손과 하나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는 사람들의 경우에, 말로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서도 잘난 체 하고 교만하다면, 그리고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그 사람의 말은 ‘빈말’이고 ‘위선’입니다.
루카복음 18장 9절-14절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바로 그런 위선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