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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행간읽기〕그 첫 번째 이야기!
기행으로 시대의 허위와 위선을 파괴하라!
기행을 동경하던 시대, 위진남북조!
미소년을 황궁에 끌어들여 즐긴 황후 가남풍,
형장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거문고를 즐긴 죽림칠현의 혜강,
모친상을 당하고도 태연히 바둑을 두고 술까지 퍼마시며 집으로 향한 완적,
신하의 몽둥이찜질 앞에 술에 취해 줄행랑 친 황제 고양!
역사가의 중립적 시각으로 시대를 이해하다!
혼돈과 퇴폐, 난폭과 음란, 은둔과 기행으로 점철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혼란하고 부정시 되었던 위진남북조! 이 시대의 진면목을 밝히기 위해 기행을 동경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과 이유를 설명해주며 저자 특유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위진남북조시대를 관찰하고 있다.
위진남북조시대를 통해 오늘을 보는 역사 안목을 키운다!
우리는 이 책에서 400년간 이어 내려온 유교적 명교(名敎)의 굴레를 깨부수려는 저항적인 면과 지나치게 거침없는 행동이 가져온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배경과 상황을 이해한다면, 오늘날의 보혁(保革)·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서구로부터 들어온 자유분방주의의 양면성을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질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베일에 가려진
위진남북조시대를 사상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해부한다!
이 책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은 지금껏 혼돈과 퇴폐, 난폭과 음란, 은둔과 기행으로 점철된 것으로 평가 된 동아시아 위진남북조시대를 사상사적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동안 위진남북조시대에 벌어졌던 일탈된 행동을 개인적인 성격으로 보아 흥밋거리로 생각했던 종래의 시각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이를 역사적 진행과정의 하나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전·후한 400년을 지배한 유교 이데올로기가 예교(禮敎), 명교(名敎)의 형식으로 인간을 속박해 왔다.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유교를 뒷받침한 국가권력의 약화는 바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움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은 도가사상의 부활과 불교의 수입으로 나타났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연으로 가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임정(任情)의 태도는 한편으로 역동적이기도 하고, 지나친 경우에 반인륜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 상황으로까지 연출했다. 속박을 타파한 긍정적인 면과 인륜을 깨뜨린 부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더욱이 이른바 5호(五胡)의 남하로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한족(漢族)과 북방족의 지리적 경계선과 혈연적 경계선이 무너지고 지역적, 종족적 경계선이 와해되어 동아시아 문화의 대통합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는 현재 21세기의 상황, 즉 인적 교류, 물적 교류의 엄청난 증가로 국가간, 종족간, 문화간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전통적 의식을 속박으로 보고 자유를 추구하는 움직임과, 그 부작용으로 나타난 지극히 개인주의적 성향의 등장과 같은 것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이 책은 역사를 두고 선악의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진행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현상은 모두 그러할만한 이유가 있음을 말하려고 하였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판단할 수 있는 위진남북조시대는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상황을 선악이 아닌 중립적 시각으로 소개하려고 하였다. 형식으로 질서를 지키려고 한 유교, 극도의 자유를 추구하여 죽음까지 초월하려한 도교, 동아시아에 새로운 공(空) 개념을 들여 온 불교를 구체적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설명하려고 하였다. 또한 철학서처럼 논리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역사의 사건과 함께 그 이론이 나타나난 과정을 대중이 알기 쉽도록 서술하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위진남북조시대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질 것이며, 수준 높은 사상사를 일반대중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국가권력의 등장과 명교의 탄생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은 명교의 탄생과정을 추적하면서, 본격적으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통일 왕조인 한나라 시대를 연 유방이 새로운 예의 질서에 기초해 체제를 정비했음을 보여준다. 황제를 정점으로 한 신분위계질서를 공고히 하고, 고대 춘추시대의 의례들을 발굴하고 부족한 부분은 새롭게 발명하여 사회 전체에 예의 형식과 의례를 강조했던 것이다. 이처럼 국가가 명교를 국가이념화 시켰던 결정적 계기를 권중달 교수는 통치력의 절약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명교의 탄생이 이처럼 황실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의 필요성 아래 적극적으로 창안되고 보호되었음을 전한시대, 왕망시대, 후한시대 각각의 사례들을 통해 보여주며 또한 국가의 전폭적 지지 아래 명교를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화 시키는 작업을 병행하여 명실 공히 한나라의 통치이념을 유교로 관철하는 작업들이 이 시대 내내 계속되었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약 300~400년간 이어져 온 국가권력과의 밀착을 통한 명교의 성장과 확대는 역설적으로 명교가 가지는 이론적 생동성과 비판정신을 서서히 와해시켰다. 변화하는 현실에 걸 맞춰 제도와 사상적 개신(改新)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수와 복고를 꿈꾼 왕망시대에 드러난다. 즉 고대 주례에 기초한 명교적 전통의 부활이 오히려 왕망의 권력을 붕괴시켰던 것이다. 왕망 이후 후한시대에 들어서서 이러한 추세는 계속 이어졌고, 점차 내용보다도 내용을 표현한 형식인 명교의 의례가 강조되었다. 즉 의례에서 내용과 형식이 괴리되면서, 내용은 사라지고 허례허식만이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토양은 이후 명교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낳게 한다.
2. 기행으로 시대의 허위와 위선을 파괴하라!
후한시대 말 황건적의 난과 황실내부의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 연이어 터진 당고(黨固)의 화는 명교의 형해화(形骸化)를 더욱 가속화했으며, 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판을 더욱 확대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위진교체기에 본격적으로 이를 대표하는 ‘죽림칠현’이 등장했다. 이들은 매우 파격적인 행보로 당시 주목을 받았는데, 부모상을 당하고도 집에 가지 않고 바둑을 두거나, 술항아리를 직접 끌고 다니며 한평생을 보낸다거나,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가자 방문한 손님의 말을 잡아타고 그녀를 찾으러 가는 등 그때까지 명교가 강조해 온 의례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조롱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서 국가권력이 요구하는 명교적 형식과 의례를 비웃으며, 당시 형해화된 명교의 허위와 위선을 자신들의 기행으로 폭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림칠현(대나무의 숲의 일곱 현인)’의 의미처럼 특이한 행적과 언사들은 당시 많은 대중들이 공감과 동경을 받았고, 비록 쇠퇴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사회 저변에 자신의 힘을 떨치고 있던 명교적 전통과 의식에 대해 저항을 촉구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권중달 교수는 바로 이러한 과도기에 ‘황후 가남풍’이라는 인물에 주목해, 후대에 음란하고 악랄하며 냉혹한 여성으로 묘사되던 그녀가 본래 명교에 대한 저항의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인물임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서부터 이 책의 실마리를 열고 있다.
3. 자유와 방종의 기로에 서서
그러나 죽림칠현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행들은 어느 순간부터 명교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상실한 채, 이것이 시대사조를 이루자 형식을 깨는 형식만이 강조되어 끊임없이 개신(改新)되어야 할 자신의 길을 잃어버린다. 형해화된 명교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하며 자유를 표현했던 기행들이, 오히려 사회를 더욱더 혼란에 빠트리는 방종으로 흘러간 것이다.
부모에 대한 섬김이 모친상이라는 의례로서 드러남을 거부했던 태도는 더 나아가서 이제 부모에 대해 저주를 내리고, 심지어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으로 나타났다. 예론을 이야기하면서도 아래에서는 부를 축적하는 사회를 꼬집어 돈이 최고인 세상이 되었다고 비판하던 태도는 이제 일인지하의 만인지상에 있던 재상이 매일 돈주머니 차고 틈만 나면 이를 세고 다니고 심지어 황제 스스로 시장터에서 나가 물건을 팔며 이익을 챙기는 수전노로 나타났다. 죽음 앞에서도 태연히 거문고를 타며 형식으로부터 자유를 노래했던 태도를 존경했으나, 스스로는 막상 형장에서는 후회와 두려움의 눈물만을 흘리는 자기기만으로 나타났다.
권중달 교수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외래종교이자 학문이었던 불교가 동아시아에 도입·증진되었다고 설명한다. 황실이 직접 나서 승려들을 초빙하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불교서적을 번역하고 또한 거대한 규모의 절과 불상들을 제작했으며, 대승려를 모시고 국가사무를 자문할 정도로 불교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원리였던 인과응보론과 윤회론이 이제는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군림한 허무주의적 기행(노장사상)과 결합해, 개인의 해탈과 기복만을 목적으로 불교의 원리를 축소·왜곡시켰음을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에서 설명한다. 몇몇 황제들이 이런 흐름을 만회키 위해 불교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벌였음에도, 대세를 바꿀 수 없었으며 오히려 황실과 불교가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심지어는 황제가 7살도 안된 아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는 직접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형식만을 강조하는 명교의 억압과 굴종에 저항하며 등장했던 기행들의 본래 의도가 어떻게 왜곡되고 후퇴하였으며, 이를 다시 개혁하기 위한 불교의 도입이 기행의 조류에 휩싸여 흡수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4. 명교를 재발견하라!
권중달 교수는 이러한 혼란과 방종의 확대에 저항하며 새로이 명교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소개한다. 위진 시기와 5호16국 시기를 거쳐 남북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경의 안정화와 함께 점차 중원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민족 국가였던 북조가 중원 국가화하면서 이에 따른 안정된 통치체제와 한족에 대한 이민족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명교를 도입하려 했던 것이다. 특히 북위 황제 탁발굉과 신하들 간의 삼년복상론에 대한 논쟁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동시에 북위뿐만 아니라 남조의 국가까지 개입해 명교전통의 종주국을 가리려는 국제적인 논쟁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교에 대한 재발견의 시도를 비웃는 듯 다시 한 번 극단적 일탈이라고 할 만한 반동적 분위기가 중원 전체를 휩쓰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명교에 대한 반항과 의구심이 여전했고, 이를 지탱해줄 만한 확실한 국가권력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남조 제나라의 두 황제, 소소업과 소보권은 방종을 넘어선 일탈의 극치를 보여주며, 기행의 최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5. 위진시대의 일탈은 그 시대가 가지는 시대성이다!
위진남북조시대를 통해 권중달 교수는 이념과 가치관으로 역사와 시대를 재단하는 것을 경계하고 위진남북조시대를 대표하는 기행과 퇴폐가 실은 맥락적인 근거들이 있었음을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시대의 기행과 일탈의 타당성을 들어 이를 찬양하고 진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관과 대치되고 심지어는 대립된다고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 감성을 일단 접어두고,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려는 자세에서 나옴을, 그리고 이러한 자세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역사가의 윤리적 태도임을 위진남북조시대의 접근을 말하려는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은 위진남북조시대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 번 곱씹게 해주는 책이다.
◆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위진남북조 시대를 위한 변명, 권중달, 명교, 가남풍, 진문공, 후한서, 진서, 전한, 고제, 장락궁, 원굉, 자치통감, 예교, 보혁, 세대간의 갈등, 도가사상, 불교수입, 임정
속박과 타파의 중간에 서서
사회에는 전부터 내려오면서 인간의 행동을 속박하려는 규범이 있다. 그리고 그 규범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이러한 두 경향의 혼재 속에서 때로는 남·녀, 노·소의 대결로 나타나기도 하고, 보(保)·혁(革)의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면 갈등은 증폭되고, 상대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각자의 생각이 다른 것은 그들이 경험한 역사 환경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를 이해하지 못해 생긴 결과이다.
이를 멀찍이 떨어져 본다면 어느 하나만이 유일의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고, 그 나름대로의 사상적 배경과 그것이 나타나는 역사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쪽 발을 어느 한쪽에 담그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느 한편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이다.
이들 각기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중립적인 위치에 발을 딛고 상대편의 배경과 입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시각이다. 어느 쪽이 옳다는 주장에 발을 딛기 보다는 역사가적 중립을 견지하는 안목을 말한다.
현재의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시대에도 역시 이러한 갈등은 존재했다. 마치 오늘의 내가 나의 이해와 관련하여, 어느 한쪽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 목에 핏줄을 세우고 나의 입장으로써 다른 쪽을 공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나와 이해득실을 따질 것 없는 과거의 시대를 살펴본다면, 이로써 오늘날 어느 한편에 서있는 ‘나’와 다른 편에 있는 ‘너’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현재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역사 사실을 선택하여 바라보는 것은 오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안목이 상식이 된다면 갈등은 논의가 되고, 해결책도 나올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은 동아시아의 위진시대를 생각나게 한다. 동아시아의 위진시대에는 400년을 지탱해 온 한(漢) 왕조의 유교적 속박이 한 왕조의 몰락과 함께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유교적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대두되고 발전했던 시기였다. 사상적으로는 죽림칠현과 도교, 불교의 자유·평등주의가 등장했고, 현실적으로는 만리장성이 무너지고 한족(漢族)과 호족(胡族)의 경계도 무너졌다. 다시 말하면 사상적인 속박도, 현실적인 국경도, 종족의 경계도 무너진 시대였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東西)의 국경이 무너지고 서양으로부터 들어 온 자유·평등주의가 팽배한 오늘의 현실과 흡사하다. 그래서 전통에 익숙하고 전통적 질서를 온존하게 하려는 사람과 새로운 조류를 빨리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러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통일된 이념도 부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혼란과 무질서가 바로 그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의 기이한 행동들은 한대(漢代)로 내려오던 유교적 관습과 의례라는 명교에서 볼 때에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적 기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허식에 차 있지 않은 진정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행동해야 옳다는 명교적 가치를 무너트린 것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해탈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이 권력을 쥐고 아무도 제재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황제나 황후로부터 이런 행동이 나타날 때에는 엄청난 부정적인 파장을 가져왔지만, 죽림칠현(竹林七賢) 같은 사람에게서 실천되면 껍질만 남은 유교적 속박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이 되었다.
이렇게 기존의 틀을 깨려는 위진남북조시대의 풍조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것은 역사 진행에 있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오늘날의 보혁(保革)갈등과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서구에서 몰아닥친 자유분방함의 정부正負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 있다.
그러면 요즈음에도 우리사회에 기행같이 보이는 파격적인 일들을 이해하는데 일조(一助)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오늘날의 역사성 또는 그 시대적 성격을 스스로 가늠해 보고 이를 풀어가는 방법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해 본다.
-들어가면서 中에서
세월은 가고 기행도 끝나다
역사를 큰 눈으로 보면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무질서한 혼란의 시대에는 질서 있는 안정된 시대를 기대하며 그 논리와 방법을 강구한다. 그러나 안정과 질서란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는 부담을 져야 한다.
이 부담이 버겁게 될 즈음에는 이 속박을 깨려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속박을 깨는 것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모습으로 여겨지면, 극단적으로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여 그동안 존재했던 관습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끝은 방종과 또 다른 혼란이었다.
위진남북조 400여 년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기행과 일탈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전한시대 400년간의 유교적 명교가 지배하는 동안 명(名)과 실(實)의 괴리(乖離)가 가져온 역사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까 위진시대의 일탈은 그 시대가 가지는 시대성이다. 어느 한 사람의 행동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는 어떤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개탄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 500년간의 성리학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새로운 사조로 인식하고 조금도 개인의 자유에 구속받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점점 늘어 가는 이혼율과 묻지 마 범죄 현상 같은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반드시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갖겠다는 사상적 무장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많은 사상가들이 자유를 구가했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 조금씩 물들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하고,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치 위진시대의 일탈의 극치를 달렸던 제왕들이 유교적 속박은 나쁜 것이고, 초탈과 일탈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행동한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다만 죽림칠현에서 비롯한 노장계열 사람들의 행동과 불교가 갖는 탈속지향적인 이론 같은 것들이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높은 이상을 가진 사상이 존경을 받아 한 시대의 사조가 될 때에 보통사람은 그 이상이 갖는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시대조류에 떠밀려 흘러가기 쉽다. 알맹이인 정신은 도외시한 채 겉껍질만 보고 따라가는 것이다.
-마치면서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