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김용삼, 독일인, 오페르트, 흥선대원군, 남연군, 청말, 학자, 왕시지, 중국, 별기군, 민비, 묄렌도르프, 러시아, 갑신정변, 자립적근대화, 동학
5. 쿠데타·반란의 시대
고종이 국왕 친위부대인 별기군 소속 군인들만 챙긴 결과,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어갔다. 이들이 흥선대원군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아 일으킨 반란이 임오군란이다. 스스로 반란군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고종과 민 왕후는 외세의 힘을 빌리게 되고, 일본군과 청군이 조선에서 무력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를 올바르게 경영하지 못한 끝에 조선이 스스로 외세가 틈입할 만한 길을 열어준 셈이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는 제물포조약을 맺고, 청국이 경제적으로 침투할 만한 구실을 만들어주었으며, 영국과는 불평등조약의 전형인 파크스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6. 조선-러시아 밀약의 후폭풍
청국에서 보낸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러시아와 손잡는 구상을 시작하는데, 고종과 민 왕후는 이 구상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이 강대국의 손을 잡아 저 강대국을 막아낸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사대주의적 외교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위로부터의 혁명을 일으켜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과는 상반된 상황이었다.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이 일으킨 갑신정변도 실상은 일본의 물밑접촉에 의해 벌어진 것이었는데, 조선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넘어갈 경우 일본의 안보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즉, 조선이 러시아에게 의존하려던 것이 일본의 침탈을 부추긴 셈이었다.
7. 고종과 민 왕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
갑신정변을 겪은 후 고종과 민 왕후는 ‘개화’라는 말만 들으면 치를 떨었고, 자립적 근대화의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청의 식민통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고종은 묄렌도르프 주재로 러시아와의 수교를 단행하고 심지어 밀약까지 체결한다. 이 상황을 파악한 영국은 블라디보스토크 공격 준비의 일환으로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약한 해군력에 의존하기보다 육군력에 의존하는 정책을 추진하는데, 이것이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https://youtu.be/kR58yAE6WI4
8. 청일전쟁과 동아시아 대변혁
청일전쟁의 원인 제공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엇갈린다. 대륙 침공에 혈안인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농민봉기 진압을 위해 조선에 군대를 보낸 청나라가 청일전쟁을 벌였다는, 외세 때문에 조선이 고초를 겪었다는 주장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청일전쟁의 진정한 원인 제공자는 고종이라 할 수 있다. 영·미·일 등의 해양세력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시기에 국제 질서에 어긋나는 외교를 펼침으로써 외세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9. 일본은 무엇 때문에 청일전쟁을 했나?
청일전쟁의 원인으로는 동학농민봉기도 거론할 수 있다. 일부 역사학자 및 정치권에서는 동학농민봉기의 긍정적 측면만을 부각하려 하지만, 동학이 외세의 침략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은 세밀한 외교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종과 민 왕후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또다시 친러시아 행보를 밟았고, 이는 일본이 민 왕후 제거 계획을 세우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0.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꾼 러일전쟁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현실로 다가오던 무렵, 고종은 망명할 곳을 찾느라 바빴다. 러일 협상이 결렬된 후 미국공사관에 망명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고종은 국외중립 선언을 추진했다. 이 선언은 독일 공사와 프랑스 공사, 이탈리아 공사에 접수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지지 입장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전쟁이 발발해 러시아공사관이 철수하자 고종은 파블로프 공사에게 “대한제국은 러시아군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메시지를 전했으나, 일본은 러시아를 꺾고 조선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11. 을사오적이 나라 팔아 대한제국이 망했나?
이상의 근대사를 정리해보면 ‘평화로운 조선에 외세가 침략한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라는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가 명확해진다. 영·미·일 해양세력이 세계의 주류로 떠오르고 국력을 기반으로 한 국제 질서가 확립되던 시기, 목숨을 의탁할 나라를 찾아다닌 고종은 조선을 폐망으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이 같은 외교 실패의 역사를 직시하고 ‘남 탓’만 일삼는 버릇을 고쳐야 오늘날 대한민국은 올바른 길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범지구적으로 개방과 통상·교류의 토네이도가 일고 있는 대항해의 시대에 조선은 북벌이니 소중화(小中華)니 하면서 ‘환상의 세계’로 도피했다. 상황 분석을 해보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은 모두 사전에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조선 지도부는 과거의 화려했던 영화에 젖어 이민족들에 대한 헛된 우월의식을 앞세우다 전쟁을 자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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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시계’는 1637년 삼전도의 항복과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에 정지되었다. 그 결과 동시대에 쉬지 않고 문명의 시계를 돌려 국부를 쌓고 국력을 축적한 청나라·일본에 크게 뒤졌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조선과 일본·중국과의 국력 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조선이 19세기 말 일본보다 30여 년 개항 시기가 늦어져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는 크게 다른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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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구한말과 일제 시대를 살았던 윤치호는 고종의 통치에 대해 “어리석음과 실수의 연속”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고종의 정책에 대해 “조선 사람의 것은 빼앗고 타국 사람에게는 빼앗기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위정자들의 정책은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윤치호는 민 왕후에 대해서도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안전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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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조선과의 수교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 ‘신(神)의 한 수’였다. 조선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오매불망 눈독을 들이고 있던 부동항 확보의 적지였다. 러시아는 조선과의 수교를 통해 조영 신조약과 거의 비슷한 권리를 획득했다. 즉 러시아가 필요로 할 경우 러시아 군함이 조선의 어느 항구라도 입항과 기항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러시아는 조선과의 수교를 통해 영국 해군의 글로벌 감시망을 피해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마음껏 누빌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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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황제 즉위 및 대한제국 선포는 자주적인 결정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공사관에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우호적인 친러 정책을 수행한 대가로 고종이 러시아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공포와 고종의 황제 칭제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1899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긴 했지만 자주적으로 독립해 나가긴 힘들고, 주변국들에 의해 운명이 휘둘리고 말 나라”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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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벌이고 있는 한·미·일 해양동맹에서의 이탈 및 중국·북한 추종외교는 선조(임진왜란), 인조(정묘·병자호란), 고종(대한제국 패망)의 뒤를 잇는 자멸 외교의 제4탄에 해당한다. 그것은 루쉰의 소설 주인공 아Q가 말한 ‘정신승리법’ 외교의 완벽한 부활이다.
문재인 정부의 폭망 외교는 구한말 고종과 왕비 민 씨의 나라 말아먹는 ‘정신승리 외교’와 어찌 그리 닮은꼴인가? 그 결말이 어떻게 되리란 것쯤은 이미 우리 근대사가 그 정답을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 p. 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