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 1999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작 -
사진 〈Pinterest〉
적막이라는 상처
배 영 옥
적막은
꿈꾸는 자의 이름과 동일하다
다만 들을 귀와 마음이 없을 뿐
새벽 세시의 단면을 잘라보면
시간의 단층 사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의 화석을 보게 될 것이다
적막이라는 붉은 상처를 본다
풀벌레의 시간을 지나
새의 시간을 지나
매미의 시간을 지나
적막은 결코 텅 비어 있지 않고
적막은 결코 눈멀어 있지 않고
적막은 귀 막은 몸을 향해 발언하는
빈틈없는 소리들이다
사진 〈Pinterest〉
언제나 지척에 있다
배 영 옥
자작나무 가로수들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며칠 전 책 읽어주던 단풍나무도 없어지고
민둥치만 남았다
단풍나무 그늘도 함께 사라졌다
자작나무 잎들이 하얗게 들떠 있다
바람이 슬쩍 건들자
몇 안 남은 이파리들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댄다
눈여겨보면 곧 죽어 없어질 것들....
죽음은 언제나 지척에 있다
stick mantid / 사진 〈Pinterest〉
수 치 羞恥
배 영 옥
그것은 전속력으로 한 생을 덮어버린다
예고 없이 불쑥 솟아나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달라붙어
수시로 나를 곁눈질한다
내가 나에게서 발견한
내가 나에게서 멀어지게 한
전생과 내생을 돌고 돌아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것
나날이 어두워지는 내일처럼
약 먹을 때도
왼손으로 밥 먹을 때도
정리되지 않는 시구(詩句) 속을 헤맬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그
깊고
검은 빛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