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表忠祠)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서산대사는 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서울에 올라와 절에 기거하며 글과 무예를 익혔다. 그러던 중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훗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명종 4년(1549)에는 승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유명한 산을 돌아다니며 후학들을 만나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묘향산에서 1,500여명, 그의 제자인 유정은 금강산에서 700여명, 처영은 지리산에서 1,200여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 평양 등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그는 승려로서 최고의 존칭과 정2품 당상관 작위를 받았으며 묘향산에서 선조 37년(1604) 입적하였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고 그 법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선(禪)과 교(敎)의 종원으로서 자부하였다. 이에 1788년에 사액사우의 건립을 추진하여 표충사로 지정되었고 정조대왕이 직접 쓴 표충사(表忠祠) 편액이 내려졌다.
표충사의 외삼문인 호국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보련각이 눈에 들어온다. 보련각은 초의선사가 1852년(조선철종3년)에 역대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이곳에 처음 건립하였다. 1920년 이 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태능 (1562~1649)스님과 편양영기 (1581~ 1644) 스님의 법손들이 두문파의 선사 22위의 진영을 보련각에 공동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내삼문인 예제문(禮齊門)을 지나가면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과 조사전이 보인다. 1669년(현종 10)에 건립된 표충사(表忠詞,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의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처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고,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 편액 2개가 걸려 있다. 표충사는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외부는 다듬어진 2단의 원형 초석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1ㆍ2분합의 격자창호로 장엄하고 있으며, 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남 대흥사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