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이거 자비단 왕궁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은 걸?"
"..........."
"화려한 건 별로인데 이 집 인테리어는 괜찮다....나중에 써먹어야지."
그러니까 자작소설에...;;
"식사는 제대로 주나요?"
".....가, 감옥에 가두는 건 아닙니다."
"내맘대로 못나가면 감옥이죠, 뭘. 뻔한 얘기 돌려서 하시네."
"..........;;"
"워낙 방콕 체질이라 방안에 갇혀있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하루종일 뒹굴
거리다보면 군살붙을텐데.... 쩝..."
".........;;"
"운동기구나 책같은 거 없나?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사람을 납치(?) 왔으
면 최소한 심심하지 않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람이 제일 못견
디는 게 심심한 거라고요. 그건 인질범으로서의 양심이에요."
".....대체 누가 인질범이라는 거지!"
오옷! 오옷! 드디어 돌아봤다.
"......너 바보야?"
".........."
이거이거, 재밌다. 살군 데리고 노는 거 보다 저 녀석이 더 재미있어!
그렇게 잡힌 이후로 버몬트는 한번도 술탄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델라이데와 죠엘의 정중한 감시속에서 계속해서 여유만만 쓸데없는 소
리나 지껄인지 어언 1시간.
드디어 버몬트가 유나의 폭설망신진(爆舌亡身陳)에 걸려든 것이다!
(....방금 무협지를 보고 왔더니 제 정신이 아니군.....;;)
한번 걸리면 정신오염에 정신붕괴를 일으키며 패인이 되어 빠져나간다는
극악한 진법!
........이 극악한 술법을 2년 넘게 당하면서도 멀쩡하게 제 페이스로 살고
있는 경님과 소연은 과연 고수들이었다. (--;;)
"나는 인질, 너는 인질범. 오케이?"
"....그러니까 누가 인질범이라는 거야! 당신이 맘대로 잡혀온 거잖아!"
"어머나? 방금 전까지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던 분이 누구시더라?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라
고요. 설마 이 전쟁이 어린애 땅따먹기 게임이라고 말씀하실 건 아니시지
요?"
"........말을 말지."
얼레? 이쯤에서 발을 빼? 그건 말도 안되지.
"솔직히 말해서 인질범 맞잖아."
진지하게, 진지하게~ 아무리 신난다지만 술탄전권대리인으로서 품위는 지
켜야지. ..........그게 가능할 지는 차후에 논하도록 하고....
"재주 괜찮으셔. 하긴, 그 재미매니아 아저씨가 없었으면 있을 리가 없는
작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댁 머리 잘 돌아간다는 사실에 흠집이 가는 건
아니지. 내 오라버니도 해결하지 못했던 오래된 골칫덩이를 끌어들일지는
몰랐어."
"쿠쿠쿠쿠쿠쿠쿠......."
.........뭐야, 갑자기 들려오는 이 재수없게 음침하고 컬컬한 웃음소리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님... 아니, 이제는 술탄이시군요."
에.......?
저 꼬장꼬장하게 늙은 할아범이?
말도 안돼! 키는 나보다, 아니 세라자드 보다 작고 말라비틀어진 난쟁이
무 같은 게?!
"당신이 사막의 늙은 여우야?"
갑자기 그의 표정이 변한다.
".........많이 변하셨군요."
"얼레... 하는 짓으로 보아 삼류악당같지는 않길래 나름대로 외모를 기대했
거든.... 실망이네."
윽, 갑자기 왜케 말이 맘대로 나오는 거지? 이봐이봐, 사람은 좀 속마음을
숨길 줄 알아야 하는 거야.
그럼에도 멈출 줄 모르는 이 혀가 기특하군.....(--++)
"근데 당신, 오라버니랑 만났을 때 나이가 이미 환갑이었다며? 지금 대체
몇살인데 살아있는 거야? 무슨 불로초나물에 가베라샐러드라도 먹었어?"
".............."
............왜 다들 말을 못잇고 있는 거야?
"하하하하하하하하!!!!"
으~~~~~~~ 가래끓는 것 같은 소리내며 호탕하게 웃지마. 너무 웃다 질식사
할까 두려우니까. 난 송장 치우는 데는 관심없어. 내버려두면 풍장에 몬스
터 먹이도 되고, 땅도 비옥하게 해주고... ......어째 점점 나 오버하는 것 같
네...;;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 허나 잘못 아신게지요. 이 육신이 늠름했다면 제
게 늑대나 사자라는 호칭이 붙지, 어째서 여우이겠습니까?"
"그야 사자는 내 오라버니이고 늑대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방법
을 모르니까."
"............"
이런 식으로 받아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보다. 그는 그 늙은 나이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신이 감히 인사가 늦었나이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신의 누추한
처소에 머물러 주시는 것을 광영으로 알겠나이다."
.....어매?
뭐, 대답할 말이 없을 내가 아니지.
"무슨 말을.... 오히려 짐의 복이지."
용의 눈물, 허준, 왕건에.... (멋지다. 방송사!) 이제는 여인천하에 사극 퍼레
이드, 바보상자도 때론 쓸모가 있다.
"경과 같은 신하가 있다는 사실을... 난 언제나 앙그라께 감사드리곤 하지."
그의 보기 싫을 정도로 늙어버린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웃는 것이 아닌 건 확실한데...
"그 무슨 과찬의 말씀을..... 여봐라! 폐하를 처소로 모셔라! 폐하를 모시는
데 일말의 무례가 있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감지덕지였을 텐데......
"그리고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버몬트 대공."
어머나? 이 할아버지, 갑자기 마음에 든다.
"군주와 군주일세. 상호간의 예의는 지켜주길 바라네."
---------------------------------------
"흥! 얼굴을 마주 대하니 감회가 새롭던가?"
"뭐야? 삐진 겐가?"
".........무슨!"
얼굴을 붉히고 자시고 하는 것도 없이 당장 노기가 충만하여 일어서는 버
몬트를 보며 노호를 혀를 찼다.
"술탄에게 가까이 가지 말게."
"뭐?"
"자네는 그 여자한테 못당해."
".......노망이 났나?"
"굳이 망가지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게."
".....아까는 나라고 해도 무례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옳은 말이야. 하지만 난 사랑싸움에는 끼어들 생각없네."
"........!"
"어차피 그녀를 살려서 데려온 건 그때문아닌가. 하객자리나 하나 내주게.
주례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역시 기분나뻐. 당신."
"그런 건 면전에서 말하는 게 아니지. 대공."
---------------------
"아자아자아자아!!!!!!!!"
퍼얼쩍!
침대 매트리스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온 몸을 그대로 내던져 다이빙!
푹신-----
"아~ 넓고 푹신해~"
카디스 요새의 간이침대에 익숙해져 있던 근육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렸
다.
"거의 내 방 만큼 큰 침대다아~~~~ 소연이랑 경님이랑 세라자드님까지 다
같이 자도 되겠다."
그 외에도 광란의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싶은 친구들의 이름이 줄줄이 떠
올랐다 사라졌다.
하연, 영애, 희경, 유경이랑 민영, 정민...... 그외 너무 많아 생각이 안난다.
"여기에 비디오랑 야한 영화 한편이면 딱인데. 아쉽다~~~~~~"
대체 저 머리속에 뭐가 있는 지 서술자는 매우 궁금하다!
"하긴 혼자 보며 야시런 상상해서 뭐하자는 거야?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읽었던 책이나 들고 올걸. 괜찮은 판타지 소설 10권만 쌓아놨으면...못
읽었던 만화책도 읽고.... '바람의 나라'라면 속 터지지만 그래도 멋진 대사
들이 많으니 실전(?)에서 써먹을 수도 있고...."
CDP도 없고 컴도 없고...
"바쁘니까 몰랐는 데..... 그러고보니 난 전자파 없이는 못 사는 인간이었
지.."
- 난 전자파를 하루라도 안쐬면 돌아버려.
....이건 내 사촌동생 말이고....
그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창작도구이자 놀이감이자 의사소통수단인
컴이 없다는 현실이 서글프구려.
요새 기종도 좋은 걸로 갈았는 데...
음냐.... 떡볶이 먹고 싶다... 칼국수도.... 그 집 김밥 맛있는 데...
투르 음식은 단백한 맛이 덜해서.....
양젖은 최악이야.... 2% 마시고 싶어....
".......쿨."
결국은 잠투정이었냐? 애로군. 애야....
마지막이 먹을 거라니, 너 답다.
------------------------------------
- 오차율이 점점 커지고 있어.
- 나쁠 건 없지. 우리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던가?
- 이대로라면 100%를 넘어버리니 문제겠지.
- 오차율의 한계는 어디까지나 99.9%. 뫼비우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
결되어야 해.
- 허나 지금은 때가 아니야. 너무나 엉망으로 망가져가는 반복의 고리다.
무턱대고 쥐어 비틀었다간 문제가 커져.
- 잠깐, 그것에 대해서라면 내게 맡기는 게 어떤가? 현재의 내 위치가 가
장 안정적이라고 판단되는 데.
- .........나쁘지 않군.
.
.
.
.
.
"아저씨!"
".......으, 음....."
"이......이 트러블메이커! 빨랑 못 일어나요!"
"음.... 아, 닭다리 튀김에 밀크티 한잔....."
"이 아저씨가 정말!"
참지 못하고 소연은 일 사담의 멱살을 확 잡아올렸다.
"그 눈탱이 빨랑 못 떠요! 당신 때문에 일 틀어진 것도 용서못하는 데 어
디서 그따위 느끼한 메뉴나 불러대고 있는 거얏!"
"소, 소연아.... 겨, 경로사상을......"
"난 그딴 거 몰라! 죠엘 탱이 개박살낼 때 갖다 집어던지지 오래야!"
죠엘탱이.... 죠엘 영감탱이의 줄임말이군...
이런 어휘들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내 자신이 두려워져....
"......유경이 별명 마구 부르지 마....."
"냅둬! 그 녀석도 없는 데 뭘."
죠엘 탱이? 이 간단한 어휘에 또 다른 친구의 별명이 들어있단 말인가?
................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 이런....--;;)
그런 와중에 어느덧 눈이 떠진 일사담....
"음? 여긴 어딘가? 아가씨들은 또 누구신지?"
"..........이, 이, 이, 이, 이.......!!!!!!!"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소연은 주저없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안돼애애애! 환자란 말이야, 소연아!"
"암매장하면 돼!!!!"
퍼억-------!
.
.
.
"이제 좀 정신이 드세요?"
"끄응...."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어퍼컷을 맞아버린 중년환자 일 사담은 힘없이 고개
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원래 이렇게까지 폭력적인 분들은 아니신데...(정말?)...폐하의
일 때문에 많이 흥분해서....."
"..........."
툭, 눈에 대고 있던 냉습포가 힘없이 떨어졌다.
"폐하.... 어떻게 되셨습니까........."
".........."
무릎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사이로 잡힌 치마자락이 구겨진다.
"......끌려가셨군요."
".......예."
울음을 토해내는 것 같은 대답에 일사담은 물끄러미 그녀를, 세라자드를
바라보았다.
"......가지....말라고 했는 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지만 그리 쉽게 울지는 않았다.
"잃는 건..... 정말 싫은 데....."
일사담의 손이 세라자드의 어깨를 짚었다.
"괜찮습니다."
"어떻게요! 어떻게 괜찮을 수 있는 데요!"
저도 모르게 화를 터트려버리고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 머뭇머뭇 사
과의 말을 꺼내놓으려던 세라자드는 이어지는 일사담의 말에 솟아나오려
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당신이 기다리니까요."
-----------------------------
"비켜, 마르자나!"
"못 비킵니다."
"마르자나!"
"말씀드렸어요."
지나칠 정도로 여유만만하던 술탄의 진지내 연병장에는 어울리지 않게 냉
랭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너라도 더 이상 날 막으면.......!"
"베고 지나가신다고해도..... 비킬 수는 없어요!"
스릉- 스릉-
두 자루의 검이 찬란한 빛을 뿌리며 햇살아래 그 위용을 드러냈다.
"대, 대장....!"
"대장, 흥분하셨습니다. 진정하십시오. 거기가 어디라고 가신다는 겁니까!"
"혼자서는 무리십니다. 병사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은 뒤 폐하를 구하러
가도 늦지 않습니다!"
스릉-
다시금 들려오는 칼뽑는 소리에 발라와 무카파, 이븐 시나들 시반 슈미터
들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마르자나를 바라보았다.
"마, 마르자나.... 너까지....."
"폐하의 명령이세요."
두 개의 검을 엇갈리게 든 채 마르자나는 뿌리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막으라고 하셨습니다. 폐하를 구하려고 하는 이들을."
"그, 그런......."
"말도 안돼! 세라자드님은 투르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시다! 그 분이 적군의
손에 잡혀계시는 데......."
"전 그런 것은 모릅니다."
"마르자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 진심이셨어요. 자비단에서....이 라샤미아까지
세라자드님을 따르면서.... 뭔가 아주 소중한 변해버린 것만 같아 안타깝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겁니다. 그래도..... 그래도 저는 그 분이... 제
가 사랑하고, 대장이 사랑하는 세라자드님이라고 생각했어요. 계속.... 섭섭
하고 어색하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그분은 세라자드님이니까... 다른 누
구도 아닌 그 분이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폐하의 명령
을 지켜야 해요."
두자루의 검을 뽑아들고 있는 기세등등한 여검사의 대사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정이 깊고, 절절한 울림이 배어있었다.
그것은 세라자드와 함께, 아직 세라자드가 세라자드로 존재할 수 있었던
시절을 공유한 자들의 심정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 누
구도 감히 부정하거나 끼어들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살라딘은 조금은 묘한 느낌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그녀가 하는 말에는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그녀의 심성
사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투명한 눈동자...
세라자드와 늘 함께 있었던 그녀였다.
실은 살라딘보다도 그녀가 세라자드를 더욱 잘 이해하고 있었는 지도 모
른다.
언제..... 저렇게 컸던가...
언제나 여동생같이만 여겼는 데.... 언제나 나와 함께 복수를 위해 검을 배
우는 어린 동생같이만 여겼는 데....
"저 역시.... 그 더러운 오스만 자식과 세라자드님이 마주 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요. 그러나.... 말씀하셨어요. 돌아가서.... 지키라
고.... 나를 구하러오지 말라고.... 대장을 막으라고 하셨어요."
".........!!"
유나가 잡혀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라샤미아로 와버린 세라자드가, 일사
담을 간병하다가, 연병장의 소란스러움을 듣고 달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
다.
"대장을.......지키라고요."
- 지켜드려야 하잖아요.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니까...
울고 싶지 않았다.
약하다는 건.... 옛날부터 꽤나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힘들게 하고,
함께 하고픈 사람을 잃어버리며,
지키고 싶은 사람조차 곁에 두지 못하는.....
약하다는 게 너무나 싫었다.
"바보........같은 사람......."
약해서.... 오직 그 이유만으로....
피해 다니는 건 이제 지쳤다.
------------------------------------------------
"우물우물, 꿀꺽... 그러니까 내 말은... 우적우적, 와그작와그작..."
식사시간. 먹는 사람은 기껏해야 열명을 안 넘는 데 차려지는 식탁은 환갑
잔치 상이었다.
"동맹이라고 해도 좋고.... 꿀꺽. 아, 이 닭고기 맛있네. 향료가 뭐예요?"
"...아, 로, 로즈마리입니다."
"얼레? 흔한 거네."
술탄이 묻는 데 씹을 수도 없고,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은 만인들의
시선속에 대답해야만 했다.
"소연이한테 해달라고 해야지. 아, 할 말은 이게 아니고, 아무렇게나 생각
해요. 휴전, 종전, 평화회담, 타협....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 내
가 원하는 건 당장 이 무의미한 전투를 끝내는 것 뿐이에요. 하쉬쉬에 미
친 어쌔신들이야 백이든 천이든 죽어나가는 거 내 알 바 아니지만 내가
총애해 마지 않는 투르의 병사들은 다치고 죽는다고요. 어차피 이대로 나
가봤자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전쟁이 될 텐데 굳이 이렇게 질질 끄는 이
유를 모르겠네요. 지금 현재 퍼붓고 있는 돈도 팬드래건에게는 좀 벅찬 거
아녜요? 클라우제비츠왕이 친 게이시르적 정책을 편 데다가 제국여제 크
리스티나와 친분이 있길래 망정이지, 어쩔 뻔 했어요? 크리스티나는 둘째
치고 능구렁이 리슐리외가 가만 있을지 의심스러운 데요? 더군다나 댁들
의 대공나으리가 잡아족치고 온 커티스는 슬슬 일어날 기미가 보일 테
고..."
엄청난 말들을 잔뜩 풀어놓고는 옆에 있는 포도주스(술을 못 마시니 즙이
나 짜오라고 했다.)을 들이키는 술탄을 보며 죠엘은 점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대체 무슨 수로 클라우제비츠님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 분을 이용하고
있는 걸까? 저 정도로 안타리아의 정세에 정통하다는 것도 섬뜩하다.
"원래 남의 나라가 옆에서 전쟁하면 떼돈버는 거고.... 꺼억... 이 스프 맛있
었어요. 다음에도 이걸로 부탁해요."
"아, 예..."
또다시 동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대답하는 시종...
"자, 내 제안은 이게 다예요. 전쟁보상금도 필요없고 무역협정도 맺기 싫
으면 관둬요. 그냥, 조용히 사뿐하고 가볍게 이 투르땅을 떠나주시기만 하
면 됩니다."
한동안의 침묵.
우다다다 쏟아져나오던 말이 뚝 끊기자 실내는 순식간의 침묵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디저트가 맛있네, 과일이 다니 시니 하며 술탄의 긴장감없는 음식품평이
한참 이어진 후에야....
"후....."
깔끔한 선을 자랑하는 하얀 얼굴위로 조소가 스쳤다.
"정말로 그 조건이 받아들여질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
대체......;;
버몬트는 순간적으로 치솟아오르는 살기를 누르려고 애썼다.
도대체 저 여자앞에서는 무조건 화부터 내게 된다!
탐스런 열대과일에서 흘러나온 과즙이 손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걸 품위없
이 핥아 먹으면서 술탄전권대리인은 대답했다.
"넌 뭔가 이익을 보려고 투르에 쳐들어온게 아니니까. 애시당초 손해를 강
조하는 것으로는 넘어올 건덕지가 없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이때까지 혼자 떠든거지?"
"내가 안떠드면 아무도 떠드는 사람이 없잖아? 난 침묵하는 분위기는 딱
질색이야. 게다가 말이라도 해야지 덜 심심하지."
"........두번째 생각하는 거지만 그 장사꾼이 왜 너한테 붙었는 지 이해가
가는 군."
"헤에, 유유상종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당연하지. 인생은 즐기면서 사
는 거니까, 너한테는 이해가 안될지 몰라도."
"........!!"
일사담에게서도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는 버몬트는 약간 민감하게 반
응했다.
"....무슨 뜻이지?"
"네가 더 잘알잖아? 왕으로서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스
스로의 야망과 신념을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꼴불견이야, 좀비도 스
켈레톤도 아닌 주제에 죽은 척 하고 사는 거."
"............당신...!"
"핏대 세우고 칼 뽑아봤자 안 무섭다고 이야기했지? 쓸데없이 박력낭비하
지 말고, 밥먹는 데 앉아!"
"......나더러 인질범이라고 비난했으면 자신이 인질이라는 걸 자각하시지
그래!"
"인질이잖아. 유일한 인질. 그렇기에 아주아주 소중하고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인질. 이거 아마 오스만이 일사담을 못 건드린 것과 똑같은 상황일
걸?"
거의 두 눈에 희열을 담아가며 말대꾸를 하고 있는 유나....;;
버몬트와 박력면에서 동등, 정신체계의 강도면에서 월등, 전투력면에서는
하등이라는 성적표가 날아와야 될 지경이다.
"아 참, 개인적으로 누리파샤 일족에게 어린애가 없었던 걸 다행으로 생각
해. 난 대량으로 피를 보는 데는 별 감흥없지만 애가 죽는 데는 굉장히 예
민해서.... 기분이 안좋거든. 그런 고로.... 쿠에틀란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어,
대공. 언젠가 유그드페인 광장에서 시체의 목으로 블록쌓기 놀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물론 어린애나 부녀자는 빼고 성인사내의 목으로
만. 난 노약자에게는 관대해."
벌떡---
이 정도 참아주고 있었던 것도 버몬트로서는 용한 일이다.
사자의 분노를 보여주니 마느니 할 것도 없이 당장 칼을 빼어들어 잘 정
돈된 식탁을 내리쳤다.
와장장창!
"대공! 무례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침묵하고 있던 노호의 일갈에도 버몬트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정말 입을 놀리는 게 못봐줄 계집이로군!"
"피차일반이야. 내 입이 꼴사납다면 네 행실은 개차반이야. 먹는 거 버리
면 벌받는다고 네 형이 가르쳐주지 않던가?"
거의 살기와 투기가 핵반응을 일으키고 있던 가운데 산소공급한 꼴이 되
어버렸다.
부모님대신 형을 들먹인 게 완전히 급소를 노려버려서는 버몬트는 그야말
로 어떻게든 손을 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상대를 노려보
았다.
"상당히 무례한 손님이 아닌가. 케샤 이븐 라힌 앗달라흐마. 그동안 당신
이 고생이 많았겠군요."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폐하."
"금방 짠 포도즙은 시지 않고 맛있군. 한 잔 더 부탁해요."
"아, 예..."
팬드래건의 대공에게는 반말을 찍찍 갈기면서 일개 시종에게는 존댓말을
쓰는 의사소통방식의 기묘함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노호의 시종들은 널부
러진 음식들과 반쯤 잘려진 식탁을 어떻게 해볼 엄두도 못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식사예절같은 건 형이 아니라 누이가 가르쳐주는 거였
나?"
.......아주 기름을 부어라.
"뭐, 당신에게 형이나 누이가 있다면 말이지만."
"................"
어째서 일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을 텐데....
저 여자가 하는 말은 하나하나가 거슬린다.
지나가는 듯이 툭툭 내던지는 게 속을 확 뒤집어버리는 느낌이다.
그러나.....
버몬트는 천천히 칼을 내렸다.
당장이라도 쳐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는 없다.
다루는 게 만만치 않겠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난 저 여자의 껍데기만 필요
할 뿐, 나머지야 될대로 되라지.
"....................."
남의 식탁을 깽판내고 돌아서려는 버몬트의 등 뒤로 유나가 입을 열었다.
"참, 버몬트 대공!"
그냥 무시하고 가려는 버몬트.
"난 연하한테는 관심없어."
우뚝-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져버렸다.
"연하인 주제에 날 꼬시려면 적어도 10살아래야."
한참동안, 북풍한설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사라졌다.
"큭......."
웃음을 터트린 것은 노호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호뿐이었다.
"큭큭큭큭..... 쿠하하하하하하하!!!"
그 듣기싫은 웃음소리에도 불구하고 술탄은 새로 시종이 따라준 포도주스
를 마시며 미소지었다.
.
.
.
.
".....정말 많이 변하셨군요. 폐하."
"시간이 가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 그게 진화든 퇴화든."
노호의 손이 순간 조금 움찔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독대를 청한 데는 이유가 있겠지?"
"........버몬트 대공이란 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야? 날보니까 죽어있던 애국심이 좀비가 되서 일어나기라도 했나?"
"무슨 대답을 기대하십니까?"
"아무것도. 기대와 실망은 양면이라서."
"일사담 녀석의 흉내를 좀 내볼까 합니다...."
".......내 주변엔 온통 거래매니아들만 있군."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폐하정도시라면 그 구질구
질한 예니체리들을 포섭하는 게 가능했을 텐데요."
그, 글쎄.... 높이 평가해주는 건 고맙지만...
"......구질구질한 것들과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썩어버린 아집과 자만이 되
버린 자존에는 관심없다. 언제까지 예니체리의 무용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
나? 전쟁은 압도적인 화기와 병력으로 상대를 물러나게 하면 그걸로 충분
한 거야. 쓸데없는 낭만파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일
이겠지만."
....어째 둘러대는 말도 이 모냥이냐....
"매서운 말씀이시군요."
"사람이 죽고 시체가 쌓여가는 데 무슨 얼어죽을 결투에 명예란 말인가.
난 이나드 지슈카가 아니고 버몬트도 라시드가 아냐. 전쟁이 어린애 닭싸
움인줄 아나. 질 것 같으면 도망가는 거고 이길 것 같으면 붙어서 왕창 깨
부수면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팬드래건과 우리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
려던 그 작전은 꽤 내 취향이었어."
그 마지막 발언.... 꽤나 의미심장하군..
"....송구스럽습니다."
"전혀 송구스럽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해봤자 소용없다구. 그리고, 당
신... 그 제안이 내게 통할 거라고 내놓은 건가?"
"오호? 충분히 내키실 만 할텐데요?"
".....확실히 그렇지. 제길..."
"솔직히 그 젊은 대공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뭘 원하고 있는 지 종잡을 수
가 없다고 할까요.... 그래봤자 젊다못해 어린 나이인데......"
"그 광기가 신경쓰인다고?"
".....정확하시군요. 꼭 그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암, 캐릭터 분석까지 했는 데 뭘....;;
"그딴 놈은 생각하는 게 뻔해."
선명한 핏빛의 광기.... 자신뿐만 아니라 팬드래건과 온 투르를 끝으로 몰
고 갈 파멸의 카리스마...
'그걸 멈출 수 있는 게 뭔지.... 나는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못하지. 제기랄....
돌아와..... 주겠지?
투르로 돌아와 주겠지?
저 자식이 울고불고 매달려도.... 세라자드의 슬픈 미소한번이면.... 돌아와
주겠지?
"폐하의 제안.... 아마 대공쪽은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충분히 솔깃
한 제안일 겁니다."
"사실.... 나도 그걸 기대한 거지...."
이 할아버지 꿍꿍이는 또 뭐래? 갑자기 왜케 친한 척이야?
뭐, 친한 척이라면 나도 어느정도는 자신있어.
"솔즈베리 남작이었던가... 죠엘 장군말일세. 그 노익장이 버몬트에게 강하
게 반발할 수 있을 것 같던가?"
".....그에게서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듯 합니다."
"음.... 뒤집을 변수가 있기는 하지."
"예?"
"비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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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엘, 창세기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개긴 캐릭터로 개긴 역사로만 따지
면 전 시리즈에 이름 넉자라도 등장했던 베라모드와 거의 호각을 이룬다.
병사에서 괴도, 장군까지... 노익장의 끝은 어디인가 라고 묻고 싶다.
그러나 그런 그의 운명은 어차피 조연.
버몬트는 '죠엘 아저씨'라고 부르는 주제에 기껏해야 방패막이로 밖에 생
각 안하지, 벨제부르는 그가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을 줄 거라고 기대도 않
하고 있고(그러니까 그냥 버몬트 옆에 냅뒀지.) 소연은 경로사상따위 어디
다가 떨이로 팔아넘겼는 지 죠엘 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막나가는 술탄전권대리인은?
"댁들은 어째 전부다 고생을 사서 할 팔자들인가 보네요."
".......남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협박하고 있었다. 잘 나간다.....;;
자비단 왕궁만큼이나 으리으리한 노호의 저택안에서 한밤중에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곳을 찾기란 버몬트 열받게 만드는 것 만큼이나 쉬웠다.
(예를 들어도 꼭....;;)
"아, 걱정하고 있을 내 친구들에게 연락을 좀 전해달라고요."
"...........어째서 내게 부탁하는 거요?"
"웬 반말이죠?"
명랑하던 억양이 순식간에 깔아지는 것을 듣고 솔즈베리 남작은 저도 모
르게 움찔했다.
노호의 깍듯한 존대를 받더니 경로사상이란게 머리속에서 포맷되었나, 동
방예의지국의 어엿한 예비납세자의 일원이었던 주인공은 술탄의 탈을 쓰
고 술탄에게서 받아든 전권을 무소불위로 휘두르며 남의 나라를 떡 주무
르듯 주무르더니 간이 배밖에 나와서 덤블링을 하는 지, 감히 적국의 최고
장수에게까지 존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것도 나이가 자신의 3배는 가뿐히
넘는 사람에게!
"......먼지만큼이나 가벼운 자존심으로 내게 이러는 거라면 나도 할 말 없
지요. 내 친구들은 한족출신이고 한족은 노인은 공경하니까. 하지만 당신
의 그 얄랑한 충성심이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겁니다."
"무슨......!"
무인은 대대로 언변에 약하다.
술탄전권대리인은 이 늙은 무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지 바로 이 순간
결정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포즈로 (그러니까 허리에 한손을 턱하니 올려놓고 눈
을 내리까는....;;) 죠엘 남작의 면전에 서찰을 들이댄 유나는 너무나 뻔뻔
하게 선언했다.
"내 정보원을 걸레로 만들어놨으니 당신이 수고 좀 해줘야 겠습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건지.....!"
"정말 모릅니까?"
".......!!!"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보를 빼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안부편지이
니 전해줄려면 전해주고 싫으면 불태워버리든지. 판단은 당신에게 맡깁니
다."
".................."
죠엘 남작, 유나가 버몬트와 얼굴마주대고 살 동안의 팔자가 결정지어지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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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부터 정보은폐에는 능력에 없던 술탄전권대리인이다.
살군이 그렇게 난리굿을 부린 데다가 마르자나가 장단까지 맞춰줘서 현재
투르인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인종중에 술탄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모르
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투르군 진지내의 분위기는........
"....................."
"..................."
볼꽃맨이란 제목의 전대물이라도 찍는 지.... 오가는 사람들마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온 몸에서 붉은 오오라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엘핀스톤, 본명 로날드 팬드래건이 보았다면 자신의 상징적인
아이템 드래곤 하트가 복제되어 나돌아 다니는 게 아닌 가 의심했을 것이
다. 분명..... 의기소침하다던가 침체되었다던가 하는 부정적인 상황은 아니
었다.
하지만....
"쿠쿠쿠쿠쿠쿠.....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다...."
--;;;;;;;;;;;;;
병사들은 지휘관의 성격에 전염된다던가....;; 투르병사들의 정신상태 엽기
도 그래프가 나날이 솟구치고 있었다.
검 수련용 나무기둥에 '팬드래건'이라고 써놓는 가 하면, '버몬트'나 '노호'
라는 이름을 붙인 제웅을 다트판으로 삼아 심장과 머리를 정통으로 맞춘
사람에게 제웅을 불태우게 한다던지 하는 무시무시한 행태가 만연했던 것
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이게 과거 술탄전권대리인이 심심하면 하던 짓이었단
점이다. --;;;;
철가면은 사태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뒷목이 서늘해졌다...;;
크리스티앙과 죠안은 이 투르 전체가 이미 흑태자교의 영향권아래 든 것
이 아닐까 의심하며 식은땀을 훔쳤고 시반 슈미터 일행들은 죽은 듯이 고
요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
"..............."
잠이 오질 않았다.
이틀 새에 병자처럼 하얘진 안색으로 세라자드는 떨리는 손을 맞잡고 있
었다.
믿는다. 그녀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 거다.....
수십번씩 되풀이되는 주문에도 손은 여전히 떨렸고 불길한 상상은 끊임없
이 뇌리를 파고 들었다.
죽은 것은 그녀인데....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자신의 시체다.
즉, 다시 말하면...
세라자드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이 죽은 모습을 내려다보게 되는 것이다.
뻔.뻔.스.럽.게 그녀의 몸속에 살아서....
그것이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혔다.
살아만 있어달라는 것.
어떻게 되도 상관없으니 제발 목숨만 붙어있으라는 것.
어쩌면 이 상황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고비였다.
힘이 있다.
그녀의 몸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전투력과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볼 수 있다.
언제나 힘이 모자라 움직이지 못했던 그녀에게... 지키지 못했던 그녀에
게...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이나마 주어져있는 것이다.
때때로 자문해본다.
강했어도.... 무슬림의 강함이 아닌 검사의 강함이 내게 있었더라도....
나는 과연 살리는 쪽을 택했을 까...
한번도 의문 품은 적 없다.
한번도 망설인 적 없다.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대해서.
과연 다시 묻는다.
지금 내 앞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그 팬드래건의 대공이라 해도....
나는 그를 살릴 것인가....
"세라자드님!"
남이 들을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지, 소연과 경님이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
는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유나에게서.... 유나에게서 서신이 왔어요!"
"......!!"
진짜냐고 되물을 여유도 없이 세라자드는 미친 듯이 달려갔다.
시반 슈미터와 철가면단, 케먈들이 모두 모여있는 곳으로...
흐트러진 머리에 어딘가 혼이 나가있는 듯한 모습에 모두가 놀라서 다가
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떨리는 움직임으로 망설이며 손을 내밀었다.
"보여......주세요...."
아마도 그가 가장 먼저 읽고 있었던 듯 했다. 살라딘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든 눈으로 조용히 서신을 세라자드에게 건네주었다.
입술을 깨물며... 마치 무슨 심판이나 판결이라도 내려진 듯, 세라자드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들어 펼쳤다.
눈에 보이는 것은 글자,
느껴지는 것은 어깨위의 따뜻하고 커다란 손.
"........너무 걱정할 필요 없소. 강한 사람이니까."
너무나 익숙한.... 그의 목소리...
그가 '세라자드'에게 말하는 목소리.
"세, 세라님....!"
"서, 설마... 안좋은 소식이라도....!"
갑자기 우는 그녀를 보며 주위사람들이 웅성웅성 대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세라자드가 힘없이 탁자위에 놓은 서신을 소연이
집어들었다.
".........하!"
"....?"
"쿡.... 쿡쿡쿡...."
"?????"
"푸하하하하하! 그럼 그렇지! 정말 못말릴 녀석이로군...."
"어디어디...?"
소연과 경님의 손에서 웃음과 함께 종이가 넘어갔다.
케먈에서 철가면으로, 철가면에게서 시반슈미터들에게로 시반슈미터들에게
서 크리스티앙과 죠안에게로... 그들에게서 다시 일반병사들에게로...
웃음은 웃음을 부르고, 안도의 한숨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과연 여왕님이시군...왠지 그 '녀석'이 불쌍한데?"
"이 사람 머리속에 뭐가 들어있는 지 진짜 궁금하네."
"폐하께선.... 무사하신 듯 합니다."
"그냥 무사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 데요....;;"
<안녕! 술탄인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인질로 남았던 건 내 인
생 최대의 행운이었어! 맛있는 음식! 끝내주는 대우! 무지무지 넓고 푹신
한 침대! 쿄쿄... 거기에다 갈구는 재미까지.... 버몬트 이거 완전 내 밥이다.
아~ 이러다 완전 새디가 되는 게 아닌가 몰라... 카디스의 간이침대.... 흑,
용서해줘, 하지만 널 버릴 수 밖에 없었어.... 난 이 끝내주는 생활을 좀 더
즐기고 돌아갈테니까 쓸데없이 구하러오면 연병장 오리걸음으로 30바퀴닷!
그럼 나없는 동안 도박하지 말고 쓸데없이 술 축내지 말고 전력낭비하지
말고 꼼짝없이 엉덩이 붙이고들 있어~~~~~! 바이바이~~~!>
"어? 요 밑에 뭐라고 적혀있는 데요?"
"엥? 이게 무슨 말이래?"
"....이거 글자 맞아...?"
".......!!! 잠깐만요!"
소연이 확 가로챘다.
"........고래마왕 주제에....."
"엥? 무슨 일인데?"
"..........깔보나라 스파게티 소스보다 느끼하다. 그 다음 줄이나 읽어봐."
<부디 울지 마시길... 울면 미워할 꼬야~~~~~>
쩡- 하니 얼어버리는 경님.
"이거.... 진심일까?"
"진담일까 겠지. 이 인간 갇혀있더니 머리 속이 이상하게 된 모양인데..."
"..엥? 요 밑에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미오 레지나
"글쎄?"
영어인가? 뭐지?
암호는 아닌 것 같고....
잠깐만....!
그거 분명....!?
"고래녀석, 꼭 이런 데서 자기 유식한 거 자랑해요....쯧쯧..."
"뭔데 이게?"
"내 기억이 맞다면 이탈리아 어야. 전에 그 녀석이 말해준 적 있지. 어쩐
지 느끼하게 써놨다고 생각했더니만....내가 기억못했으면 어쩔 뻔했나?"
미오 레지나....
"이건 세라님께 온 거예요."
"예?"
"미오 레지나. 그 뜻은...."
나의 여왕.
"그러니 우시면 안돼요. 세라자드님."
나의 친구.
내 평생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최고의 친구...
정말.... 당신에게 받은 빚을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