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일(목)
* 시작 기도
주님...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아담입니다.
나를 쳐서 벌하소서.
‘무트 타무트’,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게 하소서.
내 안에 주를 경외함이 넘쳐흐르게 하소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주의 말을 듣고 떠는 자를 돌보신다 하셨사오니 이 하루도 주의 말씀 앞에서 존재로 서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을 나에게 뿌리사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내 안에 굳은 마음을 제거하사 부드러운 마음을 허락하소서.
주를 기뻐하는 자가 되어 오늘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상 18:10-16
제목 :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는 것,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afraid)하는 것이다.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서 출입하며
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 나의 묵상
블레셋의 용사인 골리앗을 죽이고 전쟁에 승리한 이스라엘은 승전개선식을 한다.
그 개선식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 이라고 노래한다.
이 노래를 들은 사울 왕은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여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사실 이 노래의 뜻은 다윗과 사울을 비교해서 다윗이 더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라 두 장수가 많은 적을 죽이고 승리했다는 노래인 것이었다.
우리 풍문에 ‘부러운 사람이 지는 거다.’라는 말이 있다.
사울은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 그 노래에 분노를 일으키며 부러움을 표시한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는 벌써 다윗에게 1:0(빵)으로 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울에게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힘 있게 임하자 그는 집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자 다윗은 평소와 같이 그를 위하여 수금을 탔다.
바로 그 때 악령이 임한 사울은 그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들자 그의 손에 있던 단창을 그에게 던졌다.
다행히 다윗은 사울이 던진 창을 두 번이나 피하였다.
사울을 떠난 하나님의 영은 다윗과 함께 하셨다.
그럴 때마다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곁에 둘 수 없어서 그를 떠나게 하여 천부장으로 삼았다.
왕의 곁을 떠나 천부장이 된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부대를 이끌고 전쟁에 출전하였다.
그는 주께서 항상 함께 하셨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항상 이겼다.
이것을 성경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기록한다.
다윗이 매번 이처럼 전쟁에 승리를 하는 것을 본 사울은 다윗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이 늘 앞장서서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그를 좋아하였다.
다윗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였다.
아버지의 양을 칠 때도 그러했고,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와 늘 함께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전쟁을 하러 가는 곳마다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보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기뻐해야 할 그 나라의 왕인 사울은 그와 함께 기쁨을 나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가는 곳마다 전쟁에 승리를 하며 모든 백성들에게 칭송을 듣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늘 함께 하는 자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의 완전한 차이가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며 또한 그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겸손인데 말이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며 지금 현재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여전히 그 자리의 위태로움을 느끼며 다윗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 어떻게 평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그런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상태인 것이다.
그런 마음은 오직 경계와 비교의식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밖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의 자리를 위협하는 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역시 칼로 상대하는 것이다(11절).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박수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볼 뿐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항상 아버지 품속에 있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렇게 늘 아버지의 품속에서 아버지와 늘 함께 하신 아들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셨다.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 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신 주님은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와 같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아들에게 아버지는 당신의 영광을 주셨는데 그것을 가리켜 ‘본질의 계시’라 한다.
이 본질의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행하는 이들에게 나타내신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이를 본 수많은 이들은 기뻐하고 그를 사랑하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사울은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거나 그를 사랑할 수 없었다.
이는 그 영광이 그를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기가 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복으로 나타나고 부요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구약 시대로 끝이 났다.
예를 들면 다윗이 수많은 전쟁의 승리나 많은 자녀들을 두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는 것이나 욥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전에 비하여 두 배의 물질의 축복을 받은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을 가리켜 실물예시(實物例示)라 한다.
이런 실물예시는 구약시대로 끝이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성경 어디에도 구약의 선진들이 받았던 그런 부나 자녀들의 다수를 복이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 중의 복은 십자가임을 역설한다.
이 땅에서 내가 죽는 것이 복이며 그럴 때 완전한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나는 신약의 시대를 살고 있는 자다.
그것도 목사요 선교사로서 주님이 주신 양 떼들을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알지 못하여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이 떼를 쓰고 울부짖으며 무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부어달라고 했던 자가 아니던가?
그것을 받으면 좋아하고 받지 못하면 응답 받지 못함으로 인하여 원망하거나 분을 일으킨 자였다.
이런 내가 다윗을 보고 좋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1차원적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보고도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쾌하여 경계를 하며 분노를 일으키는 사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내가 바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임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주셨으니 그야말로 나는 복받은 자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복음을 알게 하시고 그 복음을 나의 복음으로 삼아 날마다 주님과 교제케 하시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그렇기에 나 또한 우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되어 날마다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기 원한다.
나 비록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순간순간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아들을 힘입어 일어나 담대하게 파레시아로 아버지 품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은혜이며 복음임을 알기에...
* 묵상 후 기도
주님...
날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그 사랑을 내가 어찌 받을 수 있었나요?
나의 행위로는 도무지 받을 수 없는 사랑인데, 내가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았는지요?
창세전 언약에 나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심을 믿습니다.
지금도 그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믿사오니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내가 붙드는 그 힘의 강약에 의해서 붙들리거나 놓치는 것이 아님을 아오니 오직 날 붙잡으신 우리 주님의 은혜만이 나를 그 나라로 이끄시는 힘임을 믿습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욱 주를 믿는 믿음이 단단해지게 하시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게 하소서.
나의 고약한 죄성을 덮고 있는 우리 주님의 보혈의 옷만 보시어 그 은혜로 나를 붙드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