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 이언호, 이세민, 당태종, 건곤일척, 수양제, 이연, 태원유수, 반란, 이혼, 이건성, 이원길, 당고조, 당나라, 이건성, 돌궐, 낙양, 이전투구, 연전연승, 왕세충
https://youtu.be/pWoofKPW-X4
제목의 「정관」은 태종의 연호, 「정요」란 '정치의 요체'라는 뜻이다. 당 태종이 신료들과 정치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를 엮은 책으로서 예로부터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여겨져 왔다. 당 중종 때에 상정된 것과 당 현종 말기에 그것을 개편한 것이 있는데, 양자를 비교하면 제4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원나라의 과직(戈直)이 송나라의 구양수나 사마광의 평을 교부해서 정리한 것을 명나라 때에 발간하여 증보된 「과직본」과, 당나라 때에 일본에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구본(舊本)의 두 가지가 있다.
정관 연간은 당의 전성기로 중국의 역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시기였기에, 후대에서는 이 시기를 칭송하여 정관의 치라 불렀으며, 중국 이외에도 한국과 일본, 여진, 서하(西夏)에 전해져 각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의 고려와 조선에서는 과거 시험의 필수 학습 도서였으며 일본에서는 지도층의 필독서였다. 군주의 도리, 인재 등용, 간언의 중요성, 도덕의 표준, 학술과 문화, 형벌과 부역, 조세 등이 당나라 초기의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꼽히지만, 당 태종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편찬 배경[편집]
《정관정요》의 편찬은 현종 때의 학자 오긍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태종 사후 40~50년이 지난 뒤로, 측천무후가 퇴위하고 중종(中宗)이 복위하여, 당 왕조가 재흥한 무렵이었다. 이전부터 역사 편찬에 종사하여 태종 시대의 치적을 잘 알고 있었던 오긍은 중종의 복위를 몹시 기뻐하고, 정관지치라 불린 당 태종 시대의 모습을 올바른 정치의 표본으로 삼고 싶다는 소원을 담아, 《정관정요》를 지어 중종에게 바쳤다. 그 뒤 재상 한휴(韓休)에 의해 이 책은 높은 평가를 얻어, 후세의 표본이 되도록 오긍에게 명하여 다시 개편해 올리도록 했다. 이로써 《정관정요》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오긍이 중종에게 처음 바쳤던 것은 중종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천자가 알아야 할 「보필편」(輔弼篇)이나 「직언간쟁편」(直言諫諍篇)이 있었고, 현종에게 바친 것은 후세의 표본으로 삼기 위한 목적하에 태자나 제왕에 대한 경고를 담은 편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내용[편집]
주된 내용은, 태종과 그를 보좌한 중신(위징 · 방현령 · 두여회 · 왕규 등) 45명과의 정치 문답을 통해, 정관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가져온 치세의 요체를 다루고 있다. 태종이 걸출했던 것은 자신이 신하를 훈계하고 지도하는 영명한 군주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신하의 직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항상 최선의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매일 자각하며 노력했던 점에 있다는 것이 《정관정요》의 주된 내용이다. 고대 중국에는 진나라 이래로 천자에게 충고하고 정치의 득실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간관(諫官)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당나라 때의 간관에게는 매달 200장의 용지가 지급되어 이것을 통해 간언을 올리게 했다(당나라 이외에도 역대 왕조 모두가 이러한 간관을 설치했으나, 태종처럼 그 충고를 적극적으로 들어주었던 황제는 몹시 드물었고,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거나 살해당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정관정요》에 따르면 당 태종은 신하의 충고 · 간언을 얻기 위해 먼저 자신에게 진언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였다. 예를 들면 태종 자신의 용모가 엄하고 딱딱하여 신하들이 겁을 먹는다는 것을 잘 알았던 태종은 진언하는 백관들이 압도되지 않도록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신하의 의견을 들었고(구간편) 관리들을 교대로 궁중에 숙직시키며, 늘 가까운 곳에 그 관리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 정치 교화의 이해와 득실에 대해서 알고자 했다. 신하들도 이에 호응해 태종에게 잦은 간언을 올렸는데, 태종이 지나치게 음란하다며 직언하거나(납간편), 태종의 딸을 시집보내는 과정에서 그 준비가 몹시 사치스럽다는 것까지 지적하였다(위징의 간언). 태종은 줄기차게 올라오는 신하들의 진언과 충고를 매우 기뻐하고 아주 지당한 말이라 칭찬하며 즉시 수정하는 등, 여느 군주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를 보였다. 또한 태종은 검소, 검약을 장려하며 왕공 이하에게 신분에 맞지 않는 지출을 허락하지 않아, 백성의 재산은 풍족해졌다. 공경들이 태종을 위해 피서용 궁전을 짓도록 제안해도, 태종은 비용이 너무 든다며 듣지 않았다(태종을 보좌한 위징 등 중신들도 오늘날 각 부처의 장관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사리사욕을 채우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집에 제대로 된 응접실조차 없다고까지 칭해지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 태종의 국가와 만민을 위해 성의를 다한 언행은 유교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유교 도덕에 기준을 두고 황제는 하늘의 뜻을 실행하여 인자(仁者)의 마음으로 만 백성을 어루만져 길러야 한다는 이념이 있었고, 신하에게도 그들이 섬기는 천자를 보필해 이상적인 성군으로 만드는 것을 책무로 여기는 생각이 있어, 천자의 정치에 결여되거나 모자라는 부분이 없도록 자신의 몸도 돌아보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도 각오해야 했다.
본서는 오랫동안 교양인의 필독서로서 중국에서는 당나라 당대의 헌종(憲宗), 문종(文宗), 선종(宣宗) 뿐 아니라 당 이후 송의 인종(仁宗), 요(遼)의 흥종(興宗), 금(金)의 세종(世宗), 원(元)의 쿠빌라이 칸, 명의 만력제(萬曆帝), 청(淸) 건륭제(乾隆帝) 등의 군주들이 애독하였다. 또 일본에도 헤이안 시대에 오래된 사본이 전해져, 호조 씨 · 아시카가 씨 · 도쿠가와 씨 집안 등 정치 중역에 있던 사람들에게 애독되었다.
구성[편집]서문(序文)
권제4초진본(初進本) - 중종 때 처음 바쳤던 것이다.
재진본(再進本) - 현종 때 다시 개수하여 바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