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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랑이라면
너의 사랑은 정말로 무미건조하고 밋밋해서 느낄 수 없었다.
그가 내 앞에 서있다.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담배를 문다. 그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을 내가 먼저 해주기를 바라는 듯한 모양으로. 그러나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으로는 받아들인 지 오래이지만 머리로는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어서, 내가 먼저 말을 하는 것 보다 그의 입으로 드러낸 결론을 내 자신에게 강제하는 편이 차라리 편할 듯해서 나는 그가 나를 보지 않는 틈을 타 그를 슬쩍 훔쳐본다.
순간 나는 지금의 그에게서, 예전의 그를 느낀다. 그가 피우는 싸구려 디스플러스의 냄새. 씁쓸했던 첫 키스의 기억, 그의 입에 맴도는 디스플러스의 잔향, 가까워지는 그의 체취와 멀어지는 그의 체취. 그 모든 것이 씁쓸하고 쓸쓸했다. 나는 그의 쓸쓸함을 사랑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겨울의 냄새,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메마른 눈.
나는 그의 쓸쓸함을 사랑했지만, 그 쓸쓸함을 증오했다. 내가 곁에 있든 없든 그는 항상 쓸쓸함의 감정에 머물러 있었다. 변화한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항상 이유는 없었고 그는 싸구려 디스플러스의 담배 연기로 주변의 모든 것들에서 멀어짐으로써 잠시 쓸쓸함에서 벗어났다. 3분이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주변과 완벽히 단절된 그만의 시간. 그 3분의 시간이 그와 내가 함께 있는 그 시간들에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일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임을 깨닫고 난 후부터 나는 그의 쓸쓸함이 서서히 나에게도 묻어나는 것을 자각했다.
나의 몸과 마음의 일부가 쓸쓸함의 색으로 물들었을 때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정말로 사랑이었을까? 목적이 존재하는, 말 뿐인 사랑도 사랑이라면 그것도 사랑이었으리라. 그 때 하늘은 그런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날 나의 안은 뜨거웠다. 필요 이상으로 틀어놓아 과 냉방된 실내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차가웠던 그와 나의 표면, 그러나 뜨거운 은밀함이 그렇게 맞닿았다. 뜨거웠지만 어딘가 차가웠던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내 몸에 남아있어서 나는 이따금씩 그 기억에 몸을 떨었다. 그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때마다.
'정말 나를 사랑해?'
'응.'
'정말?'
씁쓸한 웃음과 짙은 담배 연기로 대답을 대신했던 그. 그리고 언제나 예외 없이 그런 식의 대답을 들을 것을 알면서도 그의 사랑을 확인하려 했던 나. 왜인지 그의 앞에서는 나일 수 없었다. 나의 입은 그의 어둠과 우울에 압도되어 버려서 그 어둠의 무거움만큼 무거워졌다. 나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적절한 무게를 잃음으로써, 내가 잃은 무게만큼, 딱 그만큼만. 나는 그렇게 나를 잃어갔다. 분명히 사랑을 하고 있는데 웃은 적도, 행복한 적도 없었다. 불안함이 익숙해지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되고, 그 이후로 불안함은 느끼지 못했지만 대신에 항상 슬프고 아팠다. 이상하게도 그 감정만은 당연시 되지 못했다. 그래도 놓을 수 없는 그런 외롭고 쓸쓸한 연애를 억지로 여기까지 끌어왔다. 그를 완전히 얻지도 못한 채. 감정의 극한까지. 꽤 오래전에, 낯선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었다. 나의 눈에서는 쓸쓸함이 묻어 나온다고, 그렇게 깊어서 안쓰럽다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 날 그 남자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를 닮아버린 눈으로 나의 쓸쓸함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냥 웃었고, 그 남자는 나와 다른 형태의 웃음을 허공에 터뜨리고, 그 웃음이 부서진 후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웃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는 이미 나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나는 나의 색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나의 색은 그의 색을 닮아가고 있었으나, 나는 그 남자가 나를 닮지 않길 바랐다. 내가 그의 색을 닮아버린 것에서 느끼는 이 우울과 같지는 않아도, 그 비슷한 어둡고 아픈 감정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어쩌면 나는 연속적인, 그럼에도 단절이 존재하는 그 아픔을 누군가가 잇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그 남자의 우울을 원치 않는지도 몰랐다. 그 때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었고, 그 남자는 나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담배 연기였을까, 타 들어가는 담배였을까, 아니면 나의 깊은 곳 어딘가에 있을 미래의 자신이었을까. 그 남자가 그 때 보았던 것은 미래의 그 자신이었으리라. 그 때의 나와는 달리 밝고도 맑아 그 자체로 빛이었던 그 남자의 색은 점점 어둡고 탁해져서 나와 비슷한 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남자의 빛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어서 나는 그 남자에게 떠나라고 말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돼달라고, 나와의 연결고리를 끊어서 당신의 빛으로 돌아가라고. 나의 색은 내가 나 자신에 연민을 느끼도록 했고, 그런 나를 보면서 느끼는 아픔에 나는 울어야만 했다. 그 남자가 그렇게 아프지 않길 바랐다. 당장의 아픔으로, 더 큰 아픔을 막을 수 있도록. 그 때 그 남자는 나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너는 아마도 아프지 않겠지?'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 남자라는 피사체 주변의 것에 시선을 두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저 그 남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왜 나를 사랑했냐고, 어째서 나를 닮아버렸냐고. 내 쓸쓸함을 사랑했다면서 어째서 내가 아프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것에 대한 원망도 함께. 그러나 늦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남자는 나에게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했다. 담배 한 모금을 피우고 나서 그 남자는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바보같이 담배연기가 매워서 눈물이 나온다고. 나는 그 남자가 울고 있는 이유를 알았지만 그저 담배가 독하다고 대답하면서 웃었다. 그것도 사랑이었을까, 아니, 사랑이었던가.
그 남자는 떠났고, 나는 그의 곁에 남았다.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그를 소홀히 대했던 시간이 꽤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딜 다녀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의 방에 내가 들어왔을 때 나는 그의 냄새에 안정감을 느낌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에게 있어 나는 내가 느끼는 '그'만큼의 존재가 아니었다. 사실 내가 그의 곁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도, 그리고 얼마간의 외도 아닌 외도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내가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곁에 남았다.
이따금씩 나는 내가 떠나보낸 그 남자를 생각했다. 그립다거나 하는 감정은 없었지만,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었을지도 몰랐으나 왜인지 나는 아주 가끔씩 그 남자를 생각하면서 울고는 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낄 때마다, 나는 그 때 그 남자가 나를 원했을 때 그를 떠났더라면 조금이라도 행복했을까 하고. 하지만 연애는 내가 원하는 대로 소설처럼 쓰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내 사랑을 떠나올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할 수 없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머무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이상을 위해 그의 곁에 남았지만 그는 언제나 쓸쓸한 상태였고, 나도 그랬다. 그가 곁에 있음에도 나는 외로워해야만 했다. 그의 뒷모습에 수도 없이 나의 결핍을 외쳤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번도.
'당신은 내가 보여?'
'응.'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하는 그에게 계속해서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내가 보인다고 말하면서, 어째서 보고 있지 않은 거냐고. 분명히 곁에 있는데, 가까이에 있는데, 왜 내가 외로워해야만 하는 거냐고. 그래도 보이는 곳에 있을 때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달라고.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 사랑 받을 거란 기대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사실 이 모든 것은 그의 탓을 하기보다는 그를 놓지 못하는 내 탓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어째서 나를 놓지 않고 있는 걸까. 아주 가끔씩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알게 되더라도 그것이 결코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없음을 알기에, 나는 그의 앞에서 왜 나를 놓지 않느냐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마다 그러는 것을 대신하여 웃었다. 나를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분노였을까, 좌절이었을까. ‘어떤’ 것에서 나온 웃음이었을까.
언제나 그랬듯, 긴 시간 동안 나는 입을 열지 않고 그에게 말 하고 있었다. 그가 알아주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나는 언젠가는 그가 나를 알아주길 바랐다. 그것이 지금이라도 좋았다. 그렇지 않고 이 관계가 여기서 끝나더라도 , 그래도 그가 나를 알려고도 하지도 않고 놓지는 않길 바랐다. 그래야 조금 덜 슬플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나는 분명 슬프리라. 알아줬음에도 놓는 것은 잔인해서 슬프고, 알아주지 않음은 외로워서 슬프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이대로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아서. 창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얼마간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오늘은 잠시 그치고,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창문 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온다.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가, 다시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로 돌아와 버린 나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축 늘어져버린다. 천천히 내 앞에서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7시쯤에 나 일하는 데로 와라.'
그가 오라 하면 나는 항상 갔고, 그가 가라고 하면 나는 항상 그를 떠나왔다. 그의 말 하나하나의 의미가 나에겐 너무 커서 나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연애를 하면서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던 이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사랑이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그가 미웠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 컸다. 그래서 난 내 일부를 포기해야 하더라도 그가 곁에 있다는, 물론 마음과 몸 둘 다가 곁에 있는 것은 아니었어도 그가 있다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나를 합리화 시켰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꼭 있어야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있든 없든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있어왔던 존재이니까 필요로 해야 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의 말보다는 그의 말이 이 연애에 있어서 더 무거웠다. 갈 수 없어도 어떻게든 갈 테니 떠나지 말고 거기에 있어달라고 마음으로 수십 번 외치면서도, 그가 간다고 하면 나는 그냥 알았다고만 했다. 괜찮다고 했다. 나의 상황은 그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고, 그에게는 그저 결과만이 중요했다. 나의 상황이 어떻던, 어찌됐든 원하는 시간에 오느냐는 것에 대한 대답. 그것만이.
'당신도 언젠가는 변할까?'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내가 바랐던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말은 같지만 의미가 다른 말을 나는 원했다. 그가 느끼는 나의 존재에의 변화를 나는 요구했지만, 그는 내가 모든 상황을, 변화 없는 이 차가운 관계에서 발생할 나의 결핍을 스스로 외면하고, 그의 애정 없는 그 상태를 받아들이기를 바라, 그는 정지 신호를 들어올렸다. 내가 말한 변화가 무엇인지 그가 알았는지 알지 못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임의대로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바에 대한, 내가 원하는 대답일거라 판단한 대답으로 나와의 대화뭉치를 스태플러로 박아버렸다. 그러면 그 대화는 끝이 났다. 언제나 시작은 어려웠지만 끝은 쉽고 간단해서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공허함을 느껴야 했다.
나의 체온은, 체온을 표면으로 한 내면의 나의 체온은 항상 차가웠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체온에 익숙해져야만 했었는데 나는 그 차가움에 더 예민해져서 더 절실하게 따스함을 갈구했다. 오직 그만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애정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있든 없든, 그저 그가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나를 안아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내 체온에 익숙해지려 노력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요구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나를 죄어오는 어두운 방에 처박혀 우울함에 잠식당해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위였다. 물론 ‘어두운 방’은 나의의지가 개입되어야 어두워질 수 있었으나 그 어둠은 우울이라는 감정을 동반하였고 그렇게 방구석에 주저앉아 스스로의 무게에 질식할 것 같은 감정의 상태가 나를 뒤덮으면 나는 눈을 감았다. 죽어버리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으나, 나의 감정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극단적인 상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원하지 않았다. 분명 나는 그로 인해 괴로웠지만, 내가 그로 인해 느끼는 이 감정 때문에 죽어버린다면, 그것은 내 안에서 그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죽어버린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나의 죽음의 이유가 그가 아니더라도, 나에게는 죽음의 동기가 있다면 언제라도 나의 목숨을 나 스스로 끊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유일하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내가 책임감과 의무감 따위를 느끼지 않아도 좋은 자유였으나, 책임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불완전한 자유. 그러나 책임이 없는, 그리고 의무가 없는 자유라는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자유의 무게로 인해 떨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내가 실현하지 못하여 타인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현시켜 준다 해도 그것은 마치 강간과도 같은 슬프고 우울한, 그런 어두운 성질의 죽음이 돼버릴 것이고, 나는 그런 죽음을 원하지 않았기에 떨었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것이 금방 닥쳐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도 그랬다. 나는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가라앉아있는 이 방안에 누군가가 침범하여 나를 죽일 수도 있고, 건물이 무너져 그 아래 깔려 죽을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비현실적인 상황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런 사실은 어떤 의미로 나를 슬프게 한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든 아니든 내가 죽어버린다면, 언젠가 그가 굳이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나의 죽음의 이유에 대한 생각을 할 것인가에 관한 우울한 감정, 확신이 없는, 그러니까 나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만든 죽음의 우울에 그가 침전하리라는 확신이 없는 감정의 상태는 또 다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삶이라는 것은 타인이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론 타인의 의지가 개입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타인에 영향을 받는 삶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나의 의지의 비중이 크기에 내 것일 수 있는 것이므로 지금의 감정은 내 자신이 스스로 추슬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에게도 되돌아 갈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됐다. 내가 정리를 하던 하지 않던 그가 내게 가진 감정이 사랑이 아님은 확실하지만, 나라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살아있지 못한다면 그런 상태로 그의 곁에 남은 나는 분명 감정적으로 죽어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그러나 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사랑 때문에 무너져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 내가 나를 어떻게 추슬렀는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현재의 나는 불안정했다. 그러나 왜인지 나는 울 수 없었다. 왜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눈물이 나오지 않아’하고 단순하게 나의 상태를 자각할 뿐이었다. 눈물이 말라버렸나. 글쎄, 눈물샘을 인위적으로 떼어내지 않는다면 울지 '못하는'일은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울지 '않음'이 분명하다. 무의식적인 통제. 자발적 의지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아마도 그런 말이 현재에는 적절하리라.
'나는 네가 너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우는 일은 없었어. 앞으로도 없을 거고.'
'하지만 넌 항상 울고 있잖아.'
'뭐?'
언젠가부터 나와 닮아갔던 나의 과거로 남은 그 남자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나를 사랑하라고? 글쎄,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애와 같은 말이다. 자기애는 프라이드에서 나온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확신. 그러나 그 '삶으로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울지 않음은 분명 자기애라고 표현될 수 없다. 나도 그런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남자에게 나를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의 모든 것을 보인다면, 그 때에 나는 나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누군가가 곁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외로운 동물이라 나에게도 기댈 곳은 분명 필요했고, 지금도 필요하다. 그에게 기댈 수는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타인일 수밖에 없는 타인이었고 내가 적정선을 넘어 그에게 기대버리면 그 역시도 나를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존재했다. 물론 그 상황을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어서 자신이 타인의 감정에 물들어버렸을 때 자신의 삶을 잃을 위험에서 삶의 위협을 느끼고, 그것을 '성가심'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홀로 되어 떠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하고 감성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남자들은 더더욱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기댈 수가 없었다. 없었다기보다는 두려웠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을 택했다.
물론 지금의 나와 그는 형식적으로, 문서상으로 확실시 된 것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연인'이라는 말로 정의되었고, 그 말도 안 되는 말로 그와 나는 하나였다.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던 '연인'이라는 단어는 외부에서 정의하는 그와 나의 관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인’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지만 어찌됐든 그와 나는 연인이었다. 그런 감정과 같이 '연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감정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와 나는 그런 단어로 불합리한 강제로 정의되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며 그 사랑을 내게 주고 있는 그와,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를 사랑한다 말하는 나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그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이 감정을 '행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그와 나는 '연인'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나의 판단으로, 그와 나는 '사랑'했던 적도, 그리고 '행복'했던 적도 없었으며, '연인'이었던 적도 없었다. 적어도 나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분명히 나는 나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지금도 필요로 한다. 나는 그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며 좌절해버리는 사람으로서 존재해서는 안됐다. 나는 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기에 스스로 땅 위에 서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을 나는 감성을 배제한 이성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워서 이성으로 다잡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나는 아직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를 놓는다면 나는 분명 언젠가는 오랜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행복과 안정을 꿈꿀 여유가 없을 정도로 그를 놓은 후의 내가 두려워서 그럴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항상 생각을 한다. 그가 옆에 있든 없든 언제나 생각한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이다. 그가 옆에 있을 때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가 없을 때는 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것에서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존재와 사유하는 대상의 차이에서. 그것이 나의 감성을 자극하여 우울이라는 감정으로 변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나를 자극하는 우울한 감성은 나를 가라앉게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나를 살게 한다.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면에서 대단하다고 평해도 좋을 것이나 그것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우울은 토성의 공전과도 같다. 가볍지만 느리다. 그리고 지속된다. 그래서 우울한 것이다.
'가끔은 내가 혼자였으면 좋겠어.'
'그럼 혼자 있으면 되잖아.'
'하지만 외롭잖아.'
'모순이야.'
'원래 감정은 이중적인 거니까.'
감정이 이중적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래서 모순이 생겨나고, 그래서 그 모순됨을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그가 말하는 '외로움'과 '고독에의 욕구'는, 단지 그가 그의 약한 일면을 숨기기 위한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 것은 그의 그런 쓸쓸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굳이 그의 그런 면을 숨기지 않아도 좋았다. 공간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그가 살고 있는 곳, 그가 사랑하는 그 곳에서 나오려하지 않고 머물러 있음으로써 느끼는 모순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고독. 창문이 없고 비좁은 그의 방. 그러나 쓸데없는 것 하나 없어서, 텅 비워져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의 내면의 방. 나는 그 방에 그와 함께 있고자 했다. 또는 그를 그의 방 밖으로 끌어내 함께 있어도 좋았다. 그렇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랬기에 더 원했다. 동굴에 처박혀있는 남자는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자들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해 버려야만 하는 그 상황을 합리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정이 없을 때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동굴에 처박혀있는 남자를, 그리고 그들의 고독을 여자들은 원한다. 그 동굴을 남자와 공유하고, 그 동굴 속에 있는 것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여자다. 나는 여자다. 그래서 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있기에는 너무 좁은 그의 방에 억지로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의 어둠에, 그의 고독에, 그의 무게에, 그의 존재에. 그래서 나는 그의 방을 그와 공유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와 그의 관계는 좀처럼 좁혀질 수가 없었으며, 나는 그의 방문 너머에, 그는 그의 방안에 있는 상태로 여기까지 왔다. 그도 나도, 항상 외로웠으리라. 나는 나의 외로움을 그가 채워주기를 바랐으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의 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아니, 문을 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나는 그런 존재였다. 그는 나를 위해 방문을 열 여유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세상이 너무나도 어두웠고, 그래서 그의 고독을 알지 못했던 나 역시도 그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없었다. 그도 그랬듯이.
그의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었고, 지금도 알 수 없다. 영원히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세상을 알려고 노력했던 적이 없었다. 그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해서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고, 그 문 앞에 앉아서 그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돌아서서 내 방으로 돌아와 그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하는 것으로 모든 상황을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나의 탓을 하기보다는 그를 탓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생각이 합리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비난했던 행동을 나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인간이어서 우울하고 감성적인 것을, 그리고 남자라는 여자와 다른 존재의 낯섦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가. 그런 모순이 많은 것을 틀어지게 만들었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 대부분의 것들은 비뚤어져있다. 이제 와서 똑바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비뚤어져있다면 끊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편하리라. 그러나, 어떻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강의 상류와 같이 격하고 빠른 감정의 흐름을 끈을 자르듯 쉽게 끊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의미가 없다. 실제로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강줄기를 완전히 끊어버릴 수 없듯이. 그렇다면 먼저 끊어버리고부터 생각을 하자. 그 말을 머리에서 끄집어내어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입으로 옮기기 위해, 나는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할까.
생각은 길어지고 고독에서 시작된 나의 우울은 깊어져간다. 왜 혼자서 연애를 하느냐고, 연애라는 단어는 ‘그러한 애정’을, 그러니까 뭔가를 당연시 하게 된다는 정도의 안정적 의미인데 왜 그런 식의 연애를 하느냐고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뭐라고 답했던가.
나의 연애, 그리고 고독. 스스로 서있지 못함에서 자각하는 감정의 위태로움이라는 내면의 압력에 숨이 막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끊어지기 직전의 감정을 ‘사랑’이라는 이름의 ‘애증의 끝에 놓인 집착’으로 억지로 이어오면서 누적된 외로움과 우울로 인한 과로사의 원인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연애.
그를 만난 이후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해보면 행복했던 기억이, 추억이라기보다는 기억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때도, 사실은 항상 나는 혼자였으나 어느 순간 까지는 나의 감정과 그의 감정을 합리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계속 두드리면 언젠가는 열리겠지. 아니면 내 곁으로 와서 내 손을 잡고 거기에 부드러운 힘을 가해서 문을 열어줄 지도 몰라. 물론 나는 후자가 조금 더 낭만적인 것 같다고 생각해. 또 그걸 바라고.’
그러나 그와 나 사이의 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애증이라는 감정은 부드러움과 거친 감정의 공존이라는 복잡해서 위험한 감정이라 쉽게 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이어오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그러한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나 혼자라도 하지 않으면 아예 흐려져 버릴 것이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어질 수도, 끊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버거웠다. 그런 무게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끊어질 듯 늘어져버린 부자연스러운 ‘연결 관계’를 나는 연애랍시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더더욱 슬프고 우울하게 했다.
그는 여전히 내 앞에 있다. 그러나 그의 주의는 나에게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주의가 분산돼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주변 사물에 주의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주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앉아있는 것은 나에게 주의를 기울일 만큼의 애정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의무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와 나의 관계라서 완전히 나와 그 사이의 공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를 봐달라고 외치지 않는다. 다만 한탄한다. 나를 보지 않는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공기가 나를 슬프게 하고, 그로 인한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한탄한다. 그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분명 나의 무의식은 알고 있겠으나 의식이 깨닫지 못한, 그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찾고 있었다. 무의식이 자각한 '그 말'을 나의 의식으로 옮겨오기 위해, 나의 모든 감각은 곤두선 상태다.
그러는 사이에, 커피는 식어간다. 커피의 표면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사라지는 것으로 나는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내 감정의 흐름도 변하여, 나는 '내 앞에 있는 그'에게 두었던 모든 주의를 나에게로 거두어 들였다. '그'라는 과거의 존재와, 그가 원하고 있을 '그 말'이 무엇인가에 관한 관심만이 현재의 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서, 나는 다른 것을 볼 여유가 없다. 식어버린 커피만이 인지된다. 무의식은 끊임없이 흐르고, 의식은 정지하였다. 커피는 식었으며, 나의 의식은 그 식은 커피로 옮겨가서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식어버렸다.
식어버림으로써 비로소 내가 된 내가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나의 시선을 느낄 법도 한데, 그가 나를 돌아보지 않음은 그가 의도적으로 나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꽤 오랜 시간을 특별한 대화 없이, 아니, 대화가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시선을 외면한 채 마주 앉은 그와 나를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인지하고 있을까. '연인'사이임을 파악할 수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연인'으로서의 과정에서 어디쯤에 와있는 지에 관한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와 나를 한 번쯤 흘끗 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연인'으로서의 과정의 끝에 그와 내가 놓여있음을 알고 있으리라.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분명 그라는 불완전한 나의 연인은 언젠가는 버려야만 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그와의 긴 대화를 원치 않는다. 애정이 없는 대화라면, 최소한의 호감도 존재하지 않는 대화는 가식이며, 위선이다. 그것은 모두를 괴롭게 만든다. 가식과 위선이 ‘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감정으로 이어지고, 이어져야만 하는 대화가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억지로 꾸며낸 웃음을 본 모든 이가 그것이 억지웃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은밀하고 어두운 추악한 감정이나 사건을 캐내고자 하지만 그러기에는 감정이 부족하여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상태가 괴로운 감정을 만든다. 좋게 꾸며내기 위한 말은 길어져야만 하지만, 그것은 그와 나에게 있어 분명 성가셔서 괴로운 일일 것이다. 지금 그가 여기에 앉아있는 것은 지금의 그에게 있어 부수적인 존재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가 완전한 '이방인'이 아니었기에 그러한 것이다. 그런 차가운 사실도 나를 괴롭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의, 그리고 지금의 나의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면서도 간결하게,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어로 표현 된 그 간결한 문장이 지금 나의 심정의 아주 극소한 부분을 그가 알 수 있는 형태로 표현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문장'에 관한 사유를 하고 있다. 생각이 길어지는 만큼,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말이 없는 시간도 길어지지만 나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아닌 나에게. 그것은 '사유'이다. 나 자신과의 대화. 그러나 그가 개입된 상태에서의 '나'는 스스로의 존재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킨 대화를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화를 하기보다는 문장을 떠올려라. 그러는 편이 지금은 가장 적절하다. 문장에서 대화로 ‘사유한 것’을 이어라. 적절하지 못한 것을 끊어내기 위한 적절함을 지금의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한다. 끊어내라, 끊어내라. 가장 적절한 말로 그의 뇌리에 쏘아 박히자. 그러나 언젠가는 잊도록. 나를 위하여, 너를 위하여.
이런 똑같은 생각들의 의미 없는 반복을, 아니,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그와 나의 관계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생각들을, 그런 류의 생각의 흐름 속에서 회복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속되는 의미의 흐름을 끊기 위해 너를 바라본다. 그 순간에, 너도 나를 바라본다. 나는 너에게 나의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너의 그 빌어먹을 쓸쓸한 눈빛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너에게 말을 할 수도, 너의 눈을 똑바로 볼 수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 이 짧은 순간에 나 스스로 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억지였던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내가 나 스스로의 한계를 지어버린단 말인가? 왜 나를 비하하는가. 자기 불만족과 자기 비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함을 자각하라.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여 잠시 멈춰서있을지언정 스스로를 비하하지는 말자. 자기 비하를 밥 먹듯이 하고,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주제에 어떻게 모든 것을 완전히 뒤로 하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말해야 너의 뇌리에 강렬하게, 그러나 담백하게 남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로 주저하고 있는 나 자체가 지금은 문제가 된다. 그저 나는, 그에게 남아있는 미련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전제로, 그를 고려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 나의 의지로 일어서서 떠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미련이 전혀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전제로 따르지만.
나는 너에게 성가신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랬을까? 너의 본질까지 꿰뚫고 들어가기를 바라지도, 그것을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어도, 그래도 나는 너에게 성가신 존재였을까? 나는 바로 그것을 너에게 묻고자 한다. 그러나 물을 수 없다. 나는 온전히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스스로 답을 내려야만 한다.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나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을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는 것, 그것으로 좋다. 그러나 후회 없는 결정이라는 것은 언어로서는 간단한 것일 지라도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어려운 것이라, 나는 결정하는 것을 주저한다.
멋진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다. 낭만적인,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신파조의, 그런 말들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깔끔하게 '안녕‘이라고만 말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그 ’안녕‘이라는 말을 입을 통한 언어로 표출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과정이, 과정이, 과정이, 과정이. 영영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그 문제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왔다. 무의식에서 고개를 세운 채 똬리를 틀고 있던 과정의 문제는 현재로 이어졌고, 그것은 결정과 이어진 상태로 뒤엉켰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내가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고 있음에도 일어나려 하지 않는 그에게서 어딘가 나와 닮아있다는 듯한 그를 보았다. 이런 생각은 그를 놓아야 하는 나의 이성의 판단에 방해가 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닮아있다. 사랑에서 시작된 변화가 만든, ‘그에의 닮음’, 그 자체가 내가 돼버려서 나의 닮음의 객체인 그가 나를 닮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 ‘닮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알 수 없었어도 그와 나의 닮아있음을 자각한 지금, 나는 지금 그가 나에게 이별을 먼저 , 그리고 갑작스레 고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그가 나의 말을 기다려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다. 굳이 ‘돈’이라는, 그러니까,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라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추상적인 형태로, 분명 언어로는 정의가 되지만 아무튼 그런 형태로 감정에 대한 위자료를 지불할 수 있다면 그가 나에게 위자료를 지불할 의무가 존재하기를. 그러나 감정으로써의 위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해도, 볼 수 없는 의무라면 그것은 의무가 아닌 것이 된다. 그저 그 ‘이별’에 침을 뱉고 돌아서면 그것으로 무난한 것, 그런 것이 이별이다. 이 세상에 흔하고 흔한 이별. 만남만큼, 아니, 그 이상이든, 그 이하이든, 아무튼 그런 정도로 많지만 그것과는 감정의 흐름의 차이와 폭의 차이가 존재하는 그런 것. 그렇다면 지금의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이 공기의 무게는 분명 이별이다. 미지근했던 만남. 온도의 변화 없이 항상 비슷한 정도로 미지근하고 씁쓸했던 연애. 그리고 닮아버린 쓸쓸함. 굳이 서로 사랑하지 않아도 닮을 수가 있음을 깨닫자, 식어버린 커피의 씁쓸함은 강렬한 느낌으로 내 혀에 닿았다.
이별이다. 그렇게 내 머리는 말하고 있다. 동시에, 담배연기를 타고 비인 공간으로 뿌옇게 올라가는 나의 마음도 그렇게 말한다. 이별의 그 순간에 모든 감정의 흐름이 정지하고, 그 흐름의 물결이 탁하지 않다면, 아니, 진정한 의미는 파악할 수가 없으므로 탁해야만 한다는 것은 의미의 문제일 뿐이고, 미련의 감정만으로 판단하기에 감정이 탁하지 않고 맑다면, 어떠한 미련도 없어서 정말로 깨끗하게 갈라져서 또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고 흘러갈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편안하겠으나 애초에 편안한 이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그와 나의 이별 역시 편안할 수 없으리라. 편안한 이별은 완전하지 못한 연애를 했다는 증거이다. 사랑으로 인해 느끼는 행복, 기쁨, 슬픔, 분노, 좌절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했거나 잊어버렸다면, 그것은 이별하는 이들에게 불완전한 편안함을 준다. 연애(戀愛)라는 것은 ‘그러한 사랑’을 한다는 것. ‘그러한 사랑’이라는 것은 당연시 되는 연애, 상대가 ‘그’이건 ‘그녀’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 그런 것에서 따스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그런 연애. 뜨겁지는 않아도 그렇게 따듯한 연애를 연애라 한다면 편안한 이별이라는 것은 그 연애에 존재할 수가 없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편안한 이별에 눈물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눈물이라는 것은 불편할 때에, 불편하다기 보다는 행복하지 못할 때, 그럴 때 흘려야 한다. 행복에 겨워 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지 못한 상태를 지나왔어야만 그렇게 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도, 불행함에 절망하여 흘리는 눈물도 모두 어느 정도의 가라앉은 감정을 동반한 상태로 흘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고 복잡한 모든 감정의 결정체인 눈물은, 그런 감정들을 밖으로 드러내는 눈물이라는 것은 편안한 상태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가 말했던 사랑이,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지금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행복하다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하다면 불행할 수도 있다.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함을 나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면 이별은 감정으로도, 언어로도 성립될 수가 없다. 감정이 끝나지 하여, 말뿐인 이별을 하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완전한 이별이 가능해 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언어를 인식하였는가. 그렇다면 너는 이제 가라. 아마도 너에게 있어, 네가 듣기를 원하는 나의 언어를 인식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으리라.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또 그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네가 해야만 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 그것으로 좋다. 내가 너의 얼굴에 물을 끼얹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만약에 정말로 그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너는 손으로든 냅킨으로든, 그 물을 대충 닦아내고 나가면 되는 것이다. 어떠한 말도 필요 없다. 미안하다는 말이나 변명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친절한 말을 그 때의 나는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눈물 흘린다면, 그 눈물을 그치게 하려 하지 마라. 그저 너는 돌아서서 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나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너에 대한 집착인지 알 수는 없어도 만약 나의 사랑도 사랑이었다면, 그 사랑도 네가 내 곁에 없음이 지속될 때, 그게 언제가 되건 그 때에는 끝날 것이므로. 어느 한 쪽의 절실한 감정의 뜨거움만으로는 연애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음을 너로 인해 나는 알았다. 그것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가라. 너는 너 자신으로 돌아가라.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가리라.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 결국 나는 나로써 존재해야만 하므로. 너의 부재(不在)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다. 사랑 같지 않은 사랑도, 너의 입으로 사랑이라고 말했으나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이었더라도 그렇게 언어로 정의되었던 사랑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나의 의지로 그것을 놓았던 것일지라도 ‘갑자기’사라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두려움도, 슬픔도, 우울도, 그 모든 어두운 감정들은 언젠가는 씻겨 가리라. 어차피 너와 나는 같은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른 물줄기였던 것이다. 그저 가까이에서 흘렀기 때문에, 나는 단지 네가 흐르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옴에 너와 내가 닿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너는 너였고, 나는 나였다. 이 사실을 왜 나는 잊고 있었던 걸까. 왜 나는 너를 사랑했던 걸까. 왜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어째서 그런 사랑을 사랑이라 믿음과 동시에 나를 잊었는가. 그러나 잊었던 것을 다시 찾았다면 나는 다시 흘러가던 길로 흘러가면 되고, 너는 너의 길을 따라 흘러가면 된다. 언젠가 너라는 물줄기와 나라는 물줄기가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것의 과정도, 결과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너는 너라는 물줄기임을, 나는 나라는 물줄기임을 인정하고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만날 줄기는 그게 언제가 되던 만나게 되어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만나지 않아도 그것으로 괜찮은 것이다. ‘나’라는 물줄기가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므로.
다시 돌아와, 나는 너의 사랑을 사랑이라 믿었던 나를 탓하지 않겠다. 그것은 나를 또다시 잊는 일이며, 나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그렇다 해서 그 ‘애정 없는 사랑’을 사랑이라 했던 너를 탓하지도 않겠다. 그것이 사랑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결국은 닿지 않았던, 그렇지 못했던 너와 나였으므로 나는 너와 나, 그 누구도 탓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너는 이제 가라. 그리고 나에게는, 능동적인 의미로. 스스로 선 그 상태로 너를 놓으라고 말하고, 그리고 놓으리라.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바라본다. 너도 나를 바라본다. 뿌연 담배연기가 너와 나 사이에 오고가는 시선을 일시적으로 차단한다. 그리고 지나간다. 바람이 들어올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곳에도 공기는 흐르는지 담배연기가 서서히 걷힌다. 바람이 지나가나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그에게 ‘안녕’을 말한다. 그렇게 말한 나를 그가 응시한다. 그는 나에게 왜냐고 묻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너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요한데, 나의 눈동자도 그렇게 고요할는지. 눈물은 눈가에 고여 주변을 흐리게 하지도, 흐르지도 않아서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또렷하게 내 눈에 담는다. 완전한 이별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별의 말을 꺼냈다면, 내가 이렇게 너를 내 눈에 담을 수 있었을까. 이별 후에 닥쳐오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 이별한 이들은 추억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기억을 필요로 한다. 나도 이별을 했고, 곧 너의 실체와 멀어지리라. 기억, 추억, 그 모든 것들을 위해서, 나의 삶의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나는 너의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내 눈에, 내 머리에, 내 가슴에 남겨두고, 그리고 언젠가는 너를 나의 어딘가에 묻어놓으리라. 그것을 다시 꺼내어 볼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삶에 있어서 결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단순하지 않으며, 인간의 삶 역시 단순할 수가 없어서 무(無)의 상태가 되지 못하고 불확실함을 안은 상태로 존재한다. 결과라는 것은 한 인간의 삶에서 언젠가는 존재하게 될 테지만 알 수 없고, 그 결과라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한, 궁극의 존재이다. 잠재적인 모든 것들이 폭발한, 모든 것이라 말하여도 좋을 극단적인 것들이 추상적 실체가 된 것이겠지만 잠재적 존재로서 잠재되어있던 것 중 무언가가 예상치 못한 어느 순간에 터져 나와 존재가 된 것이 결과라는 것. 그 순간은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고, 모든 것은 ’언젠가‘라는 말로 합리화가 될 수도 있으며 끝날 수도 있다. 그것은 영영 알 수 없는 것이다. 너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 너와 내가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너와 내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글쎄, 일단은 ‘언젠가’라는 말로 그것을 덮어두도록 하자.
곧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했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는 내 앞에 푸른 지폐를 내려놓으려 했으나, 나는 그것을 그에게 다시 되밀었다. 그는 그것을 그의 푸른색 줄무늬 셔츠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 공간을 떠났다. 그는 떠났다. 그리고 곧, 나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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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 이맘때쯤 되면 항상 듣는 노래, 이용씨의 '10월의 마지막 밤'. 지난 10월을 돌이켜보니 지나온 또 다른 과거도 떠오르고, 또 여러 날들을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여러분들의 10월은 어떠셨는지. 그리고 어떤 11월을 보내고 싶으신지요. 굳이 댓글을 달지 않으시더라도, 그냥 떠나보내지 마시고 노래를 핑계로 한 번 쯤은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행복하고 의미있는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시기를, 그리고, 아름다운 11월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이건.....몇번 더 정독할 필요가 있겠어요.....많은 생각이 들고..또 많은걸 느끼게 하네요... 근데 조금 수정해주심 안될까요? 모니터로 읽다보니까 눈이 금방 피곤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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