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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화두'의 고불 조주선사
조주종심(趙州從諶, 778∼897) 스님의 속성은 학씨이며, 산동성(山東省) 임치현(臨淄縣) 출신이다.
스님은 어려서 고향의 용흥사에서 출가하였으며,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나, 경전과 계율의 탐구에 뜻을 두지 않고 여러 총림을 행각하며 선사의 길을 걷다가 안휘성 귀지현 남전산의 남전스님 문하에 입문하여 법을 이었다.
80세 때부터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에 머물러 호를 조주라 하였으며,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고 시주를 권하는 일이 없어 고불(古佛)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897년 120세로 입적하였으며, 제자들에게 사리를 줍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스님은 특히 화두를 많이 남겨 후대 선승들의 수행 과제가 되었는데, <벽암록>에 전하는 100개의 화두 중 12개가 스님의 것으로, 특히 무자화두(無字話頭)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가 유명하다.
한 학인이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없다."
학인이 다시 물었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개에게는 어찌하여 없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은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또 한 학인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집집마다 그 문전에는 장안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질문한 스님에 의하면 개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의 전통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고 한다.
그것은 개도 불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학인의 질문은 교학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님의 대답이 범상하지 않다.
스님은 한번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다른 한번은 "집집마다 그 문전에는 장안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긍정형식의 표현을 사용하여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스님이 '있다'와 '없다'라는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대답에서 노리는 것은 언어외적인 것이다.
질문한 학인은 전해 듣거나 스스로 습득한 관념을 의식의 배경에 두고 질문한다.
그는 진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닫혀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은 질문한 승려를 뒤흔들고자 한다.
즉 스님이 '없다' 라는 언명을 통해 노리는 것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의 양단에 대한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으로서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질문하는 학인의 문자에 대한 집착을 파괴하는 기능을 가진 '없다'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있다'라는 표현도 불성이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역시 죽은 말이 된다.
질문하는 승려는 유•무와 중생•부처 등의 관념에 얽매여 있고, 스님은 이것을 깨기 위하여 질문자의 고집스러운 일변을 전제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 하나가 모두 화두의 기능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답변하고 있는 것이 된다.
즉 스님의 답변은 학인의 의문에 대하여 예상했던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해답의 실마리마저 끊어버림으로써, 질문자에게 명백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의심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언어를 본분의 작용을 어떤 상황에서나 열어 보이는 목적에 응용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불교는 조사선(祖師禪)의 특징이다.
즉 언어문자에 대한 조사선의 입장은 언어문자를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속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님의 유(有)•무(無)는 답이 하나의 정해진 해답으로 굳어지는 것을 방비한 장치가 된다.
즉 의심의 뭉치를 고의로 만들어서 공부의 틀을 만들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스님이 '있다'와 '없다' 라는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대답에서 노리는 것은 언어외적인 것으로서, 질문한 학인에게 의단(疑團)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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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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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https://youtu.be/TYYtKKG52ss
첫댓글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