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ngering legacy of Korean massacre
사라지지 않는 한국 대량학살의 유산 | |||||||
![]()
사반세기(25년)전 한국인들은 그들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In May 1980, hundreds of civilians were massacred by soldiers in the south-western city of Kwangju after rising up against military rule. 1980년 5월 군부통치에 반대하여 항거하던 남서부도시 광주에서 군인들에 의해 수백명의 일반시민이 대량 학살되었습니다.
Although it was brutally put down, the Kwangju Uprising is now seen by many as a pivotal moment in the South Korean struggle for democracy in the long period of dictatorship following the Korean war. 비록 광주봉기는 야만적으로 꺾였지만 이는 한국전쟁이후 오랜기간 동안의 독재정권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대한 투쟁의 중추적인 시기로써 보여집니다.
And some contend the uprising had important ramifications which are still being felt now, both inside Korea and beyond its borders. 그리고 한국내부와 국경을 초월해서도 어떤 투쟁과 봉기는 매우 중요한 가지처럼 여전히 느껴지고 있습니다.
There is a sombre monument and museum dedicated to the massacre in Kwangju, and the anniversary of the beginning of the siege on 18 May is now a public holiday in Korea. 광주에서 대량학살 된 이들에게 바치는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 기념일이 공휴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Batons and bayonets 진압봉과 대검
The protests in Kwangju in the spring of 1980 were not unusual. 1980년 봄 광주의 항거는 별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The country was being swept by a tide of demonstrations, mainly by students, in the wake of the assassination of the dictator Park Chung Hee and the military coup which brought General Chun Doo-hwan to power in his place. 독재자 박정희의 암살과 군부의 일격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전두환 장군으로 인해 나라는 학생주도의 시위의 물결에 휩쓸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공공연하게 자행된 한국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대응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The paratroops charged crowds with batons and bayonets, stripped students and other citizens down to their underwear in the streets before beating them, and fired indiscriminately into crowds. 공수부대들은 진압봉과 대검으로 학생들과 다른 시민들을 두들겨 패기전에 속옷바람으로 발가 벗겼고,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며 군중들을 밀어붙였습니다.
This brutality drew outraged ordinary citizens into the struggle, creating a mass movement of resistance which forced the military to retreat from the city for five days, leaving the city in full control of the residents. 이런 야만성은 보통의 시민들까지 난폭하게 만들며 대규모 저항운동을 야기하여 그들이 스스로 온전히 통제하게 된 5일간 군대를 도시에서 퇴각하게 만들었습니다.
The military retook the city on 27 May, crushing the citizens' resistance in an overwhelming show of force. 군부는 압도적인 힘으로 시민군을 궤멸시키며 5월 27일 도시를 다시 찾게되었습니다.
The final toll of those who lost their lives is still unknown, as it is believed the military dumped bodies in mass graves or lakes. Estimates today range from 500 to 2,000. 이때 목숨을 잃은 최종 희생자수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고 군부가 무덤이나 호수에 대규모로 내버렸다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평가하는 희생자의 범위는 500~2000명입니다.
그 뒤 이야기는 친구들중에 살아남아 별로 없고 어쩌고 이런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하 기사 생략~~~~ 풀 기사를 확인하시고 싶으신 분은 www. bbc.co.uk에서 기사 검색하시면 됩니다.
============================================================================================== 다음 기사.
Wednesday, 17 May, 2000, 11:44 GMT 12:44 UK Koreans mourn Kwangju massacre
한국인들이 광주 대량학살을 애도하다
![]() Hundreds were killed
수백명이 살해되었다. By Caroline Gluck in Kwangju 광주에서 캐럴라인 글럭 기자 Hundreds of families in South Korea have joined ceremonies in the city of Kwangju, in memory of relatives gunned down by government troops during a pro-democracy rally in 1980. 대한민국의 수백의 가족들은 민주화가 되기 이전 1980년 벌어졌던 정부 군대의 총탄에 쓰러진 자들의 유족들이 그들을 기리기 위해 광주에 모여 기념행사를 가졌다.
The government says more than 200 people were killed in what became known as the Kwangju uprising, which began on 18 May 1980. 정부 발표에 의하면 1980년 5월 18일 시작된 광주 봉기로 2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The families say the figure was far higher as scores of people went missing and today their fate is still unknown. 유족들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생사도 모른체 행방불명되었다고 말한다.
The Kwangju uprising was a pivotal moment in South Korea's struggle for democracy. 광주봉기는 대한민국 민주화 투쟁의 중추적인 시기이다.
Protests against military rule were held across the country but Kwangju, in the south-west, was the army's chosen battleground. 군대의 통치에 항의하는 자들이 나라 전역에 이어졌다. 그러나 남서부에 위치한 광주는 군부들이 선택한 전투장소였다.
It was the home province of the prominent dissident, Kim Dae-Jung, today South Korea's president. 그곳은 당시 가장 탁월한 반체제인사인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의 고향 전라도였다.
Protests 항거
What started off as a largely student-led protest eventually became city-wide as residents rose up against the army's brutality, many arming themselves. 대규모 학생이 이끄는 항거가 결국 도시 전역의 거주자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은 무장한 군대의 야만성때문이었다.
The uprising was eventually crushed by troops, among them members of the elite special forces. 봉기는 마침내 정예 특수부대인 군대와 충돌하게 되었다.
The military-led government justified its action by calling the protesters mob rioters and North Korean Communist sympathisers. 군대가 이끄는 정부는 그것이 일어나게 된 것은 폭도들의 폭동과 북한 공산당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하 김대중 구속과 전두환 구속이야기등이 이어집니다.
이하 기사 생략~~~~ 풀 기사를 확인하시고 싶으신 분은 www. bbc.co.uk에서 기사 검색하시면 됩니다. |
첫댓글 이준형님,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역사학도는 글을 읽었을까요?
편향된 기사일뿐 외국기자가 멀 안다고 우리국민들도 5.18에 대해서 잘 모르거늘
5.18 모르는 능금아 이번 대학 수능들어가면 잘 배워라.고등학교에서 못배운것 많이 배울수있단다.박정희의 17년 독재정치 유신정권 전두환 5공등 많이 배우고 깨닫기를.외국 기자가 뭘 안다고 무시하지 마시길.그들은 정보가 많기에 울 한국사람보다도 더 정확한 눈과 증거.,정보를 가지고 있단다
BBC를 신뢰한다는 역사학도를 위해 제시한 뉴스일 뿐입니다. 님 말대로 우리 국민들중 극히 일부분이 5.18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님같은 분이요.
미개인들 눈에는 첫번째 사진 군인이 공수부대원으로 보이는가요? 광주시민들 눈은 어떤 눈이기에 광주향토사단 96연대 병력 복장도 알아보지 못하는가요? 도대체 광주시민들이 AF 기자에게 뭐라고 사기친 것입니까? 광주향토사단 96연대 소속 광주군인이 공수부대라고 외국 기자들에게 사기친 것입니까? 광주향토사단은 김대중의 사람,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지휘하는 부대라는 사실을 광주사람들은 알고 사기친 것입니까? 모르고 사기친 것입니까?
미개인인 역사학도의 눈에는 기사 내용은 보이지도 않나요? BBC도 사기꾼들의 농간에 놀아난다면 역사학도 니가 한 말에 모순이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글을 쓴지 10일이 지난후에 댓글을 단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요? 지금에서야 처음 이글을 봤다는 개소리는 삼가하시길. 행여나 내가 당신이 댓글을 단지 모르고 지나칠까봐?
문제의 저 사진의 출처는 AF통신입니다. 이준형님 눈에는 AF통신이 BBC로 보이는가요?
그리고 유럽에서는 비무장 시위도 어떻게 진압하는지를 http://gall.dcinside.com/list.php?id=news&no=705618&page=1 에서 보시고, 광주사태 때 총기무장한 시민군을 이준형님이라면 어떤 방법으로 진압하였을 것인지 대안을 말해 주시겠습니까? 만약 님이 당시 광주경찰서장이었거나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대안이 있었는지 말해 주세요.
미친척도 가지가지 하는구나. 기사를 쳐 보라니까 자꾸 제일 상단의 사진 한장을 문제 삼고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구나. 사진의 출처는 니 말대로 AF통신이라고 치자(사실 AP통신이다만) 기사를 쓴 것은 BBC 방송국의 배키 브랜포드 기자라고 분명히 나와 있지 않니? 니가 이해력이 심하게 떨어지니 내 다시 너를 위해 통신사에 대한 강의를 해주마. 우리나라에는 연합통신이라는 종합뉴스통신사가 있단다. 이 연합통신의 뉴스자료는 우리나라 각 언론매체에 팔리고 그것을 가다듬어 각 언론매체의 뉴스보도로 나오게 된단다. 알겠니? 조선일보 신문 뉴스 전체를 조선일보 기자가 전부 취재할 수 없으니 통신사의 뉴스자료를 이용한단다.
BBC방송국의 배키 브랜포드 기자가 기사를 작성할 때 그 기사에 첨부할 사진을 AP통신사에서 배포한 사진 자료에서 따온 것이란 말이다. 왜냐면 5.18당시 BBC 특파원이 광주에 없었기 때문이지. 이해되니? 멍청한 너를 위해 다시 말한다만 AP통신의 사진 한장을 자료로 삼았다 하여 BBC방송국 배키 브랜포드 기자의 기사가 BBC의 기사가 아닌 AP통신의 기사로 둔갑할 수는 없단 말이다. 참고로 AP통신사는 미국의 통신사로서 미국의 UPI, 영국의 로이터, 프랑스의 AFP와 더불어 세계 4대 통신사란다. 무식한 너를 위해 왜 내가 너의 과외교사가 되어야 하는지는 정말 의문이다. 공부하거라.
또한 살포시 논의의 핵심을 총기무장한 시민군에 맞서 계엄군이 어떻게 대처했어야 했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빗겨가려고 무진장 애쓴다만 내가 이미 내 글에서 설명했듯이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앞 발포 이전까지는 시민군은 총기를 무장하지 않았다. 내 글을 얼마나 쳐 안봤으면 이런 헛소리를 아직까지 주구장창 떠들어대는 것인지 참 한심하구나. 역사학도야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우리 진실하게 살자.
저는 저 사진의 출처는 AF통신이라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 BBC방송국의 배키 브랜포드 기자가 AF통신 사진을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사진 설명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 군인의 정체성이며, 저 군인은 공수부대가 아니라, 광주향토사단 96연대 소속 군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진 설명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니? 사진 밑에 있는 설명이 넌 안보이니? 배키 브랜포드가 저 사진의 군인을 공수부대원(paratroops)이라고 주장했니? 단지 그냥 soldier(군인)라고 써 놓은게 안보여? 사진 설명에 대체 무슨 오류가 있다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또한 사진의 출처는 AP라고 주구장창 설명을 해줬더니 AF는 어디 있는 통신사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사 내용을 쳐 읽고 기사가 잘못되었단 개수작을 해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