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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대구 도심 주택가 사제총기 난사 사건
15일 대구에서 여대생에게 사제총을 발사한
범인으로부터 경찰이 압수한 사제총들과 칼.
30대 남자가 대낮에 주택가에서 사제 권
총을 난사,여대생1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5일 오전 11시 38분쯤 대구시
남구 대명동 한 주택가 골목길에서 갑자기
총성 6발이 연이어 울렸다. 곧이어 112로
“총소리와 여성 비명이 들렸다”는 신고가
접수됐고, 3분쯤 뒤 경찰 순찰차 다섯 대가
잇따라 현장에 도착했다. 여대생김모(21)
씨가 길가에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
크리고 있었고, 그 뒤로 석모(39)씨가경찰
을 향해 권총을 겨누며 나타났다.
경찰10여명이 석씨 앞뒤로 달려들어 제압,
수갑을 채우려 했으나 석씨는 경찰관 허리
에 있는 권총을 뺏으려고 하고 가방 속에
갖고 있던 흉기를 꺼내 드는 등 거세게 저항
했다.경찰이
</b> 석씨의 목 부위를 전기충격기
로 쏘는 등 10여분 격투 끝에 석씨를 붙잡
았다. 이 과정에서 남부경찰서 소속 박모
(47) 경위와 김모(56) 경위가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여대생 김씨는 “등굣길에 갑자기 총소리가
나 뒤돌아봤더니 ‘뭘 보느냐’고 외치며 총
두 발을 발사했다”며 “턱 부위를 맞아 찰
과상을 입고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고 말
했다.
석씨가 범행에 이용한 총기는 길이 25㎝
크기의 ‘38구경 리볼버’ 모양 플라스틱
장난감을 개조한 사제 권총이었다. 플라스
틱 총알이 나가게 돼 있는 총기를 지름 0.5
㎝ 길이 1㎝가량의 납 탄두가 발사되도록
개조했다.납 탄두 뒤에 화약을 붙여 화력을
강화했고, 납탄 9발을 장전할 수 있는 탄창
도 개조했다.
석씨가 메고 있던 손가방에선 나무를 깎아
만든 또 다른 사제 총기 1정과 25㎝ 길이 칼도 발견됐다.경찰관계자는“문구점에서</b>
</b>
</b></b> 1만~
2만원정도에 살 수 있는 장난감 총의
실린더(회전식 탄창)를 개조해 납탄을발사
할 수 있도록 개조했는데,조잡하게 만들어
전문적 총기범죄를 계획한 것 같지는않다”
며 “피해자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고, 뚜렷
한 범행 동기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
다.
석씨는 2011년 아내와 이혼한 뒤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살고 있으며, 직업 없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됐다. 석씨의 누나(48)는 경찰에서“(동생
은) 약 3년 전부터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2015년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123억원 포니정 재단에 기부
▶2015년‘쇼 연출 대부’ 진필홍 전 KBS 예능국장 별세
▶2012년'광개토대왕 비문 日 변조설' 이진희 교수 별세
▶2012년日 '서민의 영웅' 미에노 前 일본은행 총재 별세
▶2010년해군 링스(Lynx)헬기 추락
2010년 4월 15일 오후 8시58분쯤 전라남도 진도 동남방 14.5㎞ 지점 추자도 근해에서 초계 비행을 하던 해군 3함대사령부 소속 링스(Lynx) 헬기가 추락, 권모 대위가 사망하고 다른 탑승자 3명이 실종됐다.
군과 해경은 사고 직후 고속정 2척과 해경 경비함 8척을 사고 해역에 보내 수색하던 중 권 대위의 시신을 발견했다. 군 관계자에 따르면 사고 헬기는 당시 통상적인 해상초계임무를 수행 중이었으며 11년 된 신형으로 계기비행이 가능하고 당일 날씨도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링스 헬기는 수상함정에 탑재, 대잠수함작전 또는 대수상 용도로 운영하는 기종으로 우리 해군은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 등에서 운용하고 있다. 1998년 6월 한국 영해에서 유자망에 걸려 좌초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에 대한 예인작전 등에 참가했고, 2009년 5월 소말리아 해역에 파견된 문무대왕함에 탑재, 해적 퇴치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천안함이 침몰한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47분에는 백령도에 급파돼, 당시 속초함이 '새떼'를 향해 76㎜ 함포 130여발을 쏘고 있을 때 사고 해역에서 해저를 탐색했다. 당시 링스헬기 역할을 두고 잠수함 의심 물체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링스헬기(Lynx Helicopter)
1971년 영국 웨스트랜드사(社)에서 잠수함과 잠수정을 공격하기 위해 개발한 대잠용 헬기다. ‘디핑(dipping) 소나’를 통해 바다 속을 수색하며 대잠용 어뢰를 발사해 ‘잠수함 킬러’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 해군은 1990년대 두 차례에 걸쳐 링스헬기를 도입해 현재 24기를 운용 중이다.
▶2009년이베이, G마켓 인수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이베이(eBay)가 국내 1위 오픈마켓인 G마켓을 인수했다. 이베이는 지난 2009년 4월 15일 저녁 미국에서 열린 이사회를 통해 G마켓 인수안건을 의결한 뒤 곧바로 국내 한 호텔에서 G마켓을 인수하기로 인터파크와 계약을 맺었다.
이번 거래 대상에는 G마켓에 대한 인터파크 보유지분 29.01%와 이기형 인터파크 회장의 보유지분 5.20% 등 총 34.21%가 포함됐다. 주당 인수가격은 미화 24달러로 총 거래금액은 4억1천300만달러(약 5천500억원)에 달해 국내 인터넷기업의 해외 매각 사상 최대 규모다.
이베이는 인터파크와 이 회장 지분 외에 주식 공개매수를 통해 추가 지분 확보에 나설 방침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이베이가 지난 2001년 인수한 옥션과 G마켓의 총 거래액은 7조원 가량에 이르러 오픈마켓 시장의 90%, 전자상거래 시장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초대형 ’공룡’이 탄생하게 됐다.
이베이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오픈마켓 모델로 평가받는 G마켓과 옥션을 교두보로 삼아 아시아 태평양 지역 공략에 나설 방침이다. 또 G마켓과 옥션은 이베이의 해외수출 지원시스템을 통해 국내 중소 판매업자들이 별도의 허브페이지를 구축해 해외 판매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G마켓과 옥션은 별도 사이트로 운영될 예정으로, 옥션 박주만 사장이 두 회사의 국내 경영을 총괄하고 G마켓 구영배 사장은 해외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두 회사가 선택과 집중을 통해 각각 장점을 가진 카테고리에 투자를 늘리고 판매업체들을 증가시킨다면, 오픈마켓 시장이 확대되고 소비자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내 오픈마켓의 사실상 독점화돼 이에 대한 폐해가 나오고, 경쟁 약화로 가격 할인 혜택이 줄어들어 소비자 후생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자아내고 있다.
이베이는 2008년 9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옥션과 G마켓의 기업결합을 승인받은 뒤 지난해 말부터 인터파크와 G마켓 지분 인수 협상을 진행했었다.
▶2005년노무현 대통령 수교후 터키 첫 방문
▶2004년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두번째로 통과
▶2004년박종호 최다경기 연속 안타 아시아 신기록 수립
2004년 4월 15일 대구구장서 벌어진 삼성증권배 2004 프로야구 LG전에서 1회말 무사 3루에서 삼성의 박종호가 깨끗한 중전안타를 만들어내자, 대구 관중들은 대기록을 세운 ‘새 식구’ 박종호에게 기립 박수를 보내며 격려했다. 1979년 일본의 다카하시 요시히코(히로시마 카프)가 세운 33경기 연속 안타의 아시아 기록을 깨트리는 순간이었다. 대 기록의 주인공 박종호는 1루 베이스를 밟고 헬멧을 벗어 관중의 환호에 답했다. 이어 1루 관중석을 향해 ‘팬 사랑, 야구 사랑’이라고 씌어진 언더 셔츠를 보여주는 세러머니를 했다.
박종호의 34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138년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도 통산 13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다. 1980년 이후에 세워진 것 중에는 1987년 폴 몰리터(밀워키)의 39경기, 2002년 루이스 카스티오(플로리다)의 35경기에 이어 단독 3위.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은 시즌 최다 홈런 기록보다 더 값진 것으로 평가된다. 조 디마지오가 1941년에 세운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사이 영의 통산 최다승(511승) 기록과 함께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인정받는다.
연속 경기 안타의 진가는 꾸준함에 있다. 통산 기록이나 시즌 최다 기록은 몰아치기가 가능하지만 연속 기록은 단 한 경기라도 부진하면 가차없이 깨진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실함과 철저한 자기관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매일 경기가 펼쳐지는 야구와 가장 어울리는, 가장 야구다운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박종호의 연속경기안타 기록은 수원구장에서 열린 삼성증권배 2004 프로야구 현대전에서 5타수 무안타에 그쳐 39경기에서 마감됐다.
▶2004년‘요술공주 새리’ 작가 요코야마 미쓰테루 별세
요술공주 새리’ 작가 요코야마 미쓰테루 (横 山 光輝)일본 도쿄도 도쿄 도시마 구 에서 사망( 1934년 6월 18일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스마 구에서 출생 ~ ) 일본 효고 현 고베 시 출신의 만화가이다.
대표작은 《철인 28호》, 《이가의 가게마루》, 《요술공주 샐리》, 《바벨 2세》,《삼국지》 등등. 긴 세월에 걸쳐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였으며, 테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더불어 현대 일본 만화의 기초를 닦은 거장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2004년제17대 총선, 16년 만에 여대야소 등장
▶2003년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한국인 범죄자
일본에 첫 신병인도
▶2003년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아부 압바스 체포
▶2002년중국 여객기 김해서 추락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22분쯤 에어 차이나(AIR CHINA·중국국제항공공사) 소속 CA-129편 보잉 767-200 여객기가 김해국제공항에서 북쪽으로 4.5km 떨어진 경남 김해시 지내동 동원아파트 뒤편 신어산 기슭의 돗대산 정상 부근에 추락했다.
사고 항공기엔 한국인 136명과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19명 등 승객 155명과 승무원 11명 등 모두 166명이 타고 있었으나, 이들 중 119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됐으며 38명이 생존한 것으로 집계됐다. 생존자 38명은 전체 탑승객의 23.5%로 항공사고 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다.
이날의 사고는 조종사인 우신루 기장의 조종미숙으로 밝혀졌다. 기장 우신루는 사고 직전 김해공항 상공에서 처음 `서클링`(circling·방향선회)을 해본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우신루 기장은 통상 1.7마일(3.14km)에서 서클링을 해야 함에도 더 먼거리에서 방향을 선회하다 돗대산을 완전히 피하지 못해 충돌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0년산불로 강원도 고성군-삼척시-강릉시-동해시와 경북 울진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
▶1999년대한항공 화물기,
중국 상해 홍차오공항 인근에서 추락
▶1999년프로야구선수 LG김용수, 국내 첫 100승-200세이브 대기록 달성
LG 김용수가 국내 프로야구서 첫 200세이브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일본에도 200세이브 이상은 사사키(요코하마)뿐이고, 메이저리그에도 23명에 불과한 기록이다.
1999년 4월 15일 인천에서 열린 현대와의 경기, 8대5로 앞선 9회말에 등판해 1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아 세이브를 땄다. 김용수는 첫 타자 박경완을 유격수 땅볼로 잡은 뒤 권준헌을 삼진, 박진만을 외야플라이로 아웃시키는 등 단 7개의 투구로 대기록을 세웠다. 1985년 6월12일 동대문 OB전서 첫 세이브를 기록한 후 꼭 200세이브째였다.
동대문중 1학년때 야구를 시작한 김용수는 `자기 관리`의 대명사로 1985년 프로입단 후 최우수구원투수 3차례, 한국시리즈 MVP에 2차례 뽑혔다. 38세이던 1998년 최고령다승왕(18승)에 올랐다. 이날 첫 200세이브 고지에 오른 김용수(39)는 14년간 117승 200세이브, 64차례 구원승을 합해 264세이브포인트(SP)를 기록했다.
▶1998년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 사망
2백여만명을 학살한 ‘킬링필드’의 주범이자 크메르 루주 지도자였던 폴 포트가 1998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폴 포트는 1928년 5월 25일 프놈펜 북부에서 90여 마일 떨어진 캄퐁톰 (Kampong Thom) 주 프랙 스바우브(Prek Sbauv) 마을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살로수 사였으나, 공산혁명 이후 1976년에 ‘민주 캄푸치아’국 선포와 함께 폴 포트로 개명했다.
‘킬링필드’란 1975∼1979년 미증유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캄보디아를 지칭하는 말로 1984년 미 할리우드가 제작한 같은 이름의 영화를 통해 참상이 알려지면서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됐다. 폴 포트는 이상적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론놀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군인 등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2백여만명이 살육됐다. ‘국민개조’ 명분 아래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닥치는 대로 살해됐다. 킬링필드의 처참한 현장으로 유명한 프놈펜 외곽 중엑이란 마을에서 6천여평 면적 1백여개 구덩이에서 9천여개의 해골이 발굴됐고 프놈펜 남동쪽 25km 살라 담나크라는 마을의 한 사범학교 잔해더미에서는 2천여구의 해골이 발견됐다.
▶1997년메카 순례자 캠프서 대형 화재 발생
▶1994년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서명
▶1992년수혈로 AIDS감염된 20대 자살
▶1991년한국-투르크메니스탄, 통상경제협력협정 체결
▶1991년기초의회 개원-지방자치제 30년 만에 부활
▶1991년기초자치단체의회 개원
전국 2백60개 시-군-구의회가 15일 일제히 원을 구성,4년 임기의 활동에 들어갔다.
기초자치단체인 시-군-구의회는 이날오전 개원임시회를 각각 열어 임기 2년인 의장과 부의장 1인씩을 선출한 뒤 오후에는 현판식과 개원식을 가졌다.
이로써 지난 61년 5 16 으로 중단됐던 지방자치시대는 30년만에 재가동,본격적인 풀뿌리 민주주의 의 시행기에 들어갔다.
이날 선출된 시-군-구의회 의장들의 정당별 배경을 보면 민자당출신이 호남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우세를 보여 50%선,신민당 20%,무소속이 30%선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중 서울지역은 민자당 및 친여 무소속이 22개 구의회 의장을 모두 차지했으며,호남의 전북지역에서는 전체 19개 의회중 7개 지역에서 민자 또는 친여인사가 의장에 선출됐다.
이날 의장선출 과정에서,서울 중랑구와 전주시 등에서는 의사진행 방해와 고함이 터지는 등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1991년도서상품권제도 시작
▶1990년 그레타 가르보 사망 -
에이드리언의 첫번째 뮤즈, 그레타 가르보
가르보 [Garbo, Greta, 1905.9.18~1990.4.15]
본명은 그레타 루이자 구스타프손(Greta Louisa Gustafsson). 스웨덴 스톡홀름 출생. 1922년 백화점 점원이었다가 영화계에 데뷔, 1923년 《예스타 베를링의 전설 The Story of Gosta Berling》의 주연으로 뽑혔다. 1925년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 MGM의 인기스타로 오랫동안 은막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우수(憂愁)를 머금은 듯한 미모와 어딘지 불행한 면모가 엿보이는 쓸쓸한 분위기는 그녀 자신까지도 폐쇄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으며, 1928년 연인인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의 죽음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36세 때 연예계에서 은퇴, 뉴욕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작으로 《육체와 악마 Flesh and the Devil》(1927) 《안나 크리스티 Anna Christie》(1930) 등이 있으며, 유성영화시대 이후의 대표 주연작으로 《마타하리 Mata Hari》(1931) 《그랜드 호텔 Grand Hotel》(1932) 《크리스티나 여왕 Queen Christina》(1933)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935) 《춘희(椿姬) Camille》(1936) 《니노치카 Ninotchka》(1939) 등이 있다.
“혼자 있고 싶어요(I want to be alone).”
여신(女神)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그녀는 고독과 은둔의 여배우이기도 하다. 영화 ‘그랜드호텔’(1932년)에서 했던 이 유명한 대사는 자신의 실제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스웨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가르보는 10대 초반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발소 면도 보조, 백화점 점원 등에 이어 모자 모델을 하면서 드디어 연예계로 나온다.
1920년대 미국으로 진출해 27편의 영화를 찍는 대스타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가르보, 대전 후는 메릴린 먼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신비감을 자아내는 미모로 할리우드를 사로잡았다. 북유럽 신화의 여신을 연상시키는 그의 얼굴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인간 얼굴의 한 원형”이라고 했다.
배우지 못했지만 연기력은 천부적이었다. “수줍어하던 어린 처녀가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는 순간 탁월한 본능과 카리스마로 지성을 뛰어넘는 천재성을 발휘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은막을 휘어잡던 그녀는 인기가 정점에 이른 1941년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36세. 한창 여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나이였다.
“할리우드는 나의 인생을 낭비한 현장이다. 돈과 명성과 욕심이 소용돌이치는 인생 막장이었다.”
이후 거의 50년을 독신으로 미국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수도하듯 보냈다. 꽃과 채소를 길렀고 가끔 편한 옷차림으로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채 시내를 산책했을 뿐 파티나 공식적인 자리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55년 아카데미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도 그랬다. 배우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무대 뒤에서 혼자 책읽기를 즐겼다고 한다. 촬영이 없을 때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집에서 혼자 지냈고 언론과의 접촉도 내켜 하지 않았다.
“나는 말이 아니라 오직 배역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자들을 피한다.”
‘여신’은 1990년 4월 15일 하늘로 돌아갔다. 은퇴할 때 “늙어가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런 고민을 안 해도 될 곳으로 간 것이다.
▶1990년평화방송(PBC) 개국
▶1989년영국 힐즈버러 축구장서 축구팬 난동
▶1989년호요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사망
▶1988년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 제네바에서 체
▶1986년미국, 리비아에 테러보복 폭격
1986년 4월 15일 오전 2시 1백50여대의 미공군기들이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공격했다. 단일 폭격으로는 제2차대전 이후 최대규모였다. 폭격으로 카다피의 양녀를 비롯, 1백명 이상의 리비아인들이 사망했다. 미군기의 리비아 공습은 리비아를 국제테러의 배후로 단정, 여기에 대한 응징이었다. 미국의 리비아 공습 후 한동안 카다피가 모습을 감춰, 카다피의 건강악화 내지 실각설이 나돌았었다.
미국의 리비아 공습은 정당성을 두고 국제 사회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때나마 국제정세를 크게 냉각시켜 제2차 미-소 정상회담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리비아 폭격에도 테러는 계속돼 폭격 수일후 레바논에서 인질로 잡혀있던 미국인 1명과 영국인 3명이 보복 살해됐고, 런던과 파리, 빈에서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85년남아프리카공화국 잡혼금지법 철폐
▶1983년도쿄 디즈니랜드 개원
▶1982년교회산업선교회,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에 성명 발표
▶1982년이스라엘, 이집트에 시나이 철수 후 평화보장 명문화 요구
▶1981년워싱턴포스트지, `지미의 세계` 기사가 허위기사라고 보도
▶1980년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사망
사르트르 [Sartre, Jean-Paul, 1905.6.21~1980.4.15]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1980년 4월 15일 사망했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시시콜콜 간섭하고 참여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행동하는 양심의 전형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저지른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 침공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판을 할 정도로 자립적 지성의 면모를 보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범죄 심사를 위해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창안한 국제 법정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에도 마오이스트계열의 기관지인 `인민의 기치`를 손에 들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사르트르였다.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해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사르트르는 2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인도주의적 의료활동을 펼친 오르간 연주자 슈바이처가 그의 외당숙이 된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3부터 4년간 독일에 유학했다. 유학기간 중 접한 후설의 현상학을 독자적으로 수용해 펴낸 책이 `존재와 무`이다.
1964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지만 `부르조아들의 상`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고,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 역시, `부르조아적 결혼`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르트르와 평생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 보부아르는 이날 2만5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장례식에서 세상을 떠난 사르트르에게 장미 한송이를 건넸다. 두 사람은 현재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나란히 묻혀있다.
▶1979년전(前) 수도여고 교사(고상문씨)
노르웨이에서 납북
▶1978년상공부, 대폭 수입자유화 조치 발표
▶1977년금수산 의사당(주석궁) 준공
북한 김일성의 관저로 사용되어 흔히 `주석궁`이라 불리우는 북한의 `금수산 의사당`이 1977년 4월 15일 김일성의 65회 생일을 맞아 준공됐다. 유럽식 궁전을 본딴 4-5층 건물로, 지하 200m 깊이에는 유사시에 대비해 평양지하철과 연결된 전용 지하철이 건설되어 있다.
총 부지 면적은 350만입방미터. 김일성 사후에는 "김일성 수령을 금수산의사당 내에 영생의 모습으로 모셔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개칭하고 김일성 1주기인 1995년 개관식을 가졌다.
금수산 기념궁전은 정면 벽에 김일성 초상화를 배치하고 1층 홀에 입상을 마련해 놓았으며 지상에 김일성 시신을 안치했다. 또 궁전앞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하는 폭 415m, 길이 216m의 광장을 조성, 경비만에도 500여명의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
▶1970년호남고속도로 기공
▶1969년미국 정보기 EC-121 동해 상공서
북한 대공포에 피격 추락. 31명 사상
▶1969년공화당, 양순직 등 항명의원 5명 제명
▶1967년YMCA(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회관 완공
▶1966년북유럽 일대 폭설
▶1966년한국은행, 적립식 정기예금제 실시
▶1964년시리아군 반란
▶1964년그리스-터키 키프러스섬에서 총격전
▶1962년유럽공동시장 설치
▶1961년한국-포르투갈 국교 수립
▶1959년덜레스 미국 국무부장관 사임
▶1959년세계탁구대회 소녀부서 조경자 우승
▶1958년제1회 아프리카 독립제국회의
가나 수도 아구라서 개최
▶1958년제4차 한일회담 개최
▶1954년일본-필리핀 배상예비협정 조인
▶1953년제2차 한일회담 개최
▶1951년전국에 전염병 만연
▶ 1949년4월15일,무적 해병대 창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1949년 오늘, 경남 진해의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됐다. 해군 출신 장병 38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독립부대였다. 사기는 충천했지만 장비는 형편없었다. 소총은 모두 일본식이었고 교육용으로 M1소총 1정이 있을 정도였다. 훈련도 일본군과 미군 방식이 혼합된 ‘국적불명’이었다. 광복절 기념식에 모습을 드러내 신고식을 마쳤다.
빈약하던 해병대는 6·25전쟁중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작전 등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이 공로로 휴전 직후인 1954년 여단으로, 1955년 상륙사단으로 증편됐고 인원이 증강되면서 교육단, 보급정비단 등이 새로 편성됐다.
베트남전은 ‘귀신잡는 해병’의 진면목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1965년 10월 한국군 전투부대의 선진으로 캄란만에 상륙한 이래 투이호아, 추라이, 호이안지구 등 수많은 전투에서 ‘무적 해병’의 용맹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해병대는 1973년 10월 개편계획에 따라 전투부대는 해군에 통합 운영되고 사령부를 비롯한 교육행정지원 부대는 해체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1987년 11월 해군에 해병대사령부가 다시 창설됨으로써 원래의 전력을 다시 찾았다. 극기(克己)의 상징인 해병정신을 배우려는 기업과 민간인들이 2000년대 들어 부쩍 늘었다.
팔각모와 빨간 이름표의 해병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금녀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여성 해병 장교와 여 분대장이 탄생했다. 21세기 새로운 해병상을 구현하기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군가 공모에 나서기도 했다. 산뜻하고 국민과 더욱 친근해진 해병상이 기다려진다.
▶1943년미국에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연구소 개소(소장 오펜하이머)
▶1919년제암리 학살 사건
1982년 제암리 주민들이 일제에 의해 학살되어
매장된 유해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일본 헌병 30여 명이 들이닥쳤다. 발안장터 만세 사건때 시위대를 심하게 다룬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왔다고 밝히 이들은 마을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모두 제암리 교회에 소집했다.
발안장터 만세사건은 3.1운동의 기운이 이곳에까지 퍼져 3월 31일과 4월 5일 발안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발안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경찰이 이를 가혹하게 진압한 사건이다.
교회에 모인 21명의 명단을 일일이 확인한 일본군은 곧 밖으로 나가 문을 폐쇄하고 지붕에 석유룰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을 피해 빠져나온 사람들은 일본군의 총탄세례를 받아야했고 남편을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부녀자 2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일본군은 민가 32가구를 불태워 초토화시킨 뒤 인근 고주리 주민 6명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 만행으로 사람, 가축, 곡식 등이 타는 냄새가 사방 10km까지 펴져나갔다고 한다. 당시의 한 선교사 일기에는 제암리 학살 이외에도 화성군 일대에서만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고, 5개 교회에서 비슷한 만행이 자행돼 326채의 집이 불타고 1,6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39명이 살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ㆍ일본군 화성 주민 감금 집단 학살
‘마침내 음력 3월16일 오후 1시경 일경들은 돌연 부락을 습격하여 청년 21명과 여인 2명, 도합 23명을 무기로 위협하여 예배당에 감금하고 출입문을 폐쇄한 뒤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은 두렁바위를 사를 듯 하늘에 뻗쳤고, 순국열사의 기막힌 통곡성은 아득히 구천으로 사라진 채 예배당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1959년 월탄 박종화가 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탑 비문’ 중에서)
1919년 4월15일, 일본군은 경기 화성시 제암리 제암리교회에서 지역주민들을 감금하고 집단 학살했다.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의 불길이 번져나가던 시기였다.
제암리 주민들은 그해 3월30일 발안 장날을 이용해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천도교 지도자들이 주도해 시작된 만세운동은 800여명의 군중을 끌어들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총칼을 들고 매질을 하는 등 무력으로 사태를 진압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후에도 장날이면 만세를 외쳤고,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4월15일, 당시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헌병과 함께 제암리에 나타났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며 제암리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유인했다. 무차별 학살의 시작이었다. 주민들이 교회에 모이자 헌병들은 밖에서 출입문을 봉쇄한 뒤 사격을 가했고, 이후에는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헌병들은 마을의 모든 민가에 불을 지르고 숨어있거나 도망나온 주민도 살해했다.
일본 측은 사건 은폐를 노렸지만 한국에서 3·1운동을 돕고 있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에 의해 그 진실이 세상에 알려진다. 스코필드는 당시 참혹한 현장을 ‘떨리는 손’으로 촬영해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3·1운동 견문록 격인 <끌 수 없는 불꽃>을 발행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의 한글 이름이 그 유명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는 ‘3·1운동의 제34인’으로 불리며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2007년에는 당시 일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일기가 일본 아사히신문에 공개됐다. 그는 “사실을 사실로 처리하면 보다 간단하지만 학살·방화를 자인하게 돼 제국의 입장은 더욱 불이익”하기 때문에 “간부와 협의해서 저항해서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회의를 끝냈다”고 적었다
▶1912년북한 김일성 출생
▶1885년 영국 극동함대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우리나라 항구중에 '포트 해밀턴'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1885년 4월 15일 영국 동양함대 소속전함을 타고 온 영국 군인들이 거문도에 무단 상륙,
점령 함으로써 '부동항(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을 확보하기위해 사력을 다하던
러시아 견제성공!
영국군은 병영과포대구축은 물론 섬 주위에 수뢰를 설치하고 항만출입구에 방어시설을 만드는 등 거문도를 자기네 해군기지로 삼았다.
영국이 뒤늦게 조선측에 밝힌 강점이유는 '예방차원의 선점 점령'(preventive,pre-emptive occupation)이란 궁색하다 못해 해괴한 명분이었다. 조선 정부의 철수 요구를 무시한 채 이후 약 2년간 강점 주둔하던 영국군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1887년 2월 27일 철수한다.
고종의 친정이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쇄국을 푼 조선은 1883년 영국과도 수교를 했지만 거문도사건 당시 영국은 조선을 무시하고 청나라만 상대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다 못해 러시아측의 손을 내밀 정도로 위신이 말이 아닌 형편이었다.(아관파천)
'급박한 상황에 따른 임시조치'란 핑계만대는 영국을 상대로 조선은 무력동원 따위는 엄두도 못 내고 연간 5천파운드(현재가치 24만1550파운드.한화 40억1000만원)
조차대금을 지불하겠다는 영국의 제의도 거절을 한다. 중간 협상자인 중국이 그 돈을 받기를 권했지만 러시아쪽 눈치도 봐야 하는데다 또 그랬다가 영원히 거문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거문도항을 '포트해밀턴'이라고 부르고 기록했다, 그런데 그게 점령후에
명명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30년 전부터 그렇게 불러왔다는 것이다. (재영 칼럼니스트 권석하씨의 주간조선 2015년 6월 15일 기사 참고 해 보면)
영국은 강점에 나서기 30년 전에 이미 거문도에 무단상륙해 상세한 조사를 했던 걸로 나온다. 그리고는 '조지 해밀턴' 당시 해군성장관의 이름을 따 거문도를 해밀턴 이라 명명하고 유사시 점령계획까지 세워
뒀을만큼 약소국의 주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영국은 거문도점령 후 러시아전함 출현을 제외한 평상시엔
기지와 전함에 국기를 게양하지 않는 등 조선과 주변국에 신경을 되도록 거슬리지 않으려는 노련함을 보인다. 또 영국군은 거문도 주민들에게 점령군의 위세를 보이지 않았다. 막사와 병원등을 짓기 위해 동원된 주민들에겐 임금(처음엔 식량)을 지급하고 사용토지에 대해서는 대여료를 주었다.
뿐만아니라, 대포 소리에 고기가 도망가 안잡힌다며 주민들이 보상을 요구하자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기꺼이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들은 부녀자가 지나갈 땐
뒤 돌아서고 우물물을 마시고 물 값으로 은화를 주고 갔다고 한다.
심지어 술에 취해 주막 주모에게 키스했던 수병이 부대에 잡혀가 여러번 바다에 내던져지는 벌을 받은 것까지 목격 됐으니 영국이 전 세계 자신의 식민지 경영에 얼마나 통달한 나라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영국군 내부적으로는 천연두나 콜레라 전염 위험성같은 위생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또는 생길지도 모를 말썽이나 소요를 피하기 위해 주민과의 교류를 엄격히 금지시킨 거였다. 그들은 주민들을 결코 손님으로 초대하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기록에 나온다.
▶1452년 이탈리아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출생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이탈리아 화가,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 피렌체 공화국 빈치에서 출생 (~1519년 5월 2일 프랑스 클 루 에서 사망)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으로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식물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밀라노 대공의 후원으로 17년간 밀라노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등 대작을 그렸다. 또한 회화, 건축, 기계학학, 해부학을 넘나드는 방대한 '회화학'을 집필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많이 남겼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