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사찰] 28 진표율사의 철저한 참회와 실천도량 김제 금산사
“대장부! 계를 구하기 위해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미륵성불경>에 “부처님의 입멸 후 56억7000만년이 지나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 8만세가 되면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부처를 이루고 세 차례의 법회를 열어 96억, 94억, 92억의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했다. 이러한 미륵신앙은 우리나라에서는 원효, 진표스님을 통해 발전됐다.
원효는 <미륵상생경종요>에서 “도솔천에 상생코자 하는 사람은 먼저 항상 열 가지 착한 일을 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계율을 지키며, 미륵의 명호를 불러 죄를 참회하고 미륵보살을 관하라. 자신의 십선공덕을 믿고 불탑을 청소하고 향과 꽃을 공양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참회와 실천을 제일 덕목으로 여긴 사찰이 금산사이다.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를 대표하는 전각으로 국보다. 밖에서 보면 3층 팔작지붕인데 안에는 통층이다. 1층은 ‘자비로운 어머니’란 뜻으로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 진표율사 부사의방 3년 기도…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표율사는 김제 출생으로 11살 때 30여 마리의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두었는데 다음 해 봄 버드나무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보고, 잘못을 뉘우치며 12살 때 모악산 금산사로 출가했다. 진표율사는 27살 때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3년간 기도하였으나, 수기를 받지 못하자 망신참회(亡身懺悔)를 하니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리때를 전해 주었다.
율사가 더욱 치열히 정진하니 미륵보살은 이마를 만져주면서 “대장부로다. 계를 구하기 위해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하며, 186개 간자(簡子)와 더불어 2개의 간자를 더 주었는데,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뼈인데, 제8은 첫 깨달음으로 성불을 나타낸 것이고, 제9는 원래의 깨달음이니 종자(種子)이다. 다음 생에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 했다. 지장보살은 수기를 주고 계본을 전해주었다. 임인년(762) 4월27일에 율사는 마정수기(摩頂授記)와 교법(敎法)을 받고는 두 보살에게 예배를 드린 다음 부사의방에서 내려왔다.
진표율사는 점찰교법(占察敎法)으로 과거에 지은 죄업의 참회로 업장을 소멸하면 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백제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 금산사를 중창했다. 율사는 갑진년(764) 6월9일부터 미륵장육금상(彌勒丈六金像)을 주성하기 시작하여 병오년(766) 5월1일에 금당에 모시고 금당 남쪽 벽에 미륵보살이 내려와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린 후 21일 동안 점찰도량을 열어 고통에 빠져 있는 대중들을 교화했다.
미륵전의 미륵 장육상.
➲ 금산사 최고 전성기…
금산사 최고의 전성기는 혜덕왕사 소현에 의해서인데, 혜덕왕사는 법천사 지광국사의 제자로 11살 때 출가하여 문종 33년(1079)에 금산사 주지가 되어 진표율사의 중건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신앙을 선양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금산사는 수문 대사가 선조 34년(1601)부터 인조 13년(1635)까지 35년에 걸쳐 지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뇌묵 처영대사는 의승군을 1000명을 이끌고 1593년 행주대첩을 비롯한 혁혁한 공을 세워 훗날 정조대왕은 휴정, 유정, 뇌묵 처영대사를 구국 삼화상으로 추존했다. 백곡 처능선사는 현종 2년(1661)에 죽음을 각오하고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疎)’를 올려 불교를 지켰다. 환성 지안선사는 최고의 강백으로 1724년에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1400여 명이 운집했는데 이때 지안선사를 역도의 우두머리로 모함하여, 1729년 유배지 제주도에 도착해서 일주일 만에 순교했다.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 진표율사가 3년간 기도하고도 수기를 받지 못하자 망신참회(亡身懺悔)를 하니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리때를 전해 주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 금산사 대표하는 전각
국보 62호 미륵전은 금산사를 대표하는 전각으로 높이 19m, 측면 길이15.5m로 밖에서 보면 3층 팔작지붕인데 안에는 통층이다. 1층은 미륵은 뱃속에 있을 때도 그의 어머니를 자비롭게 해 특별히 ‘자비로운 어머니’란 뜻으로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수 아래에서 세 차례의 법회를 나타낸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용화세계 미륵불이 계시기에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전각 안에는 여원인과 시무외인을 한 높이 약12m의 미륵부처님과 약 9m의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원래 미륵불만 모셨는데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자 수문대사가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다. 1935년 화재로 미륵불이 소실되자 1938년에 조각가 김복진이 석고에 도금하여 모셨고, 협시보살은 수문대사 당시의 모습이다. 지하에는 진표율사 당시의 미륵불 연화대가 남아 있다.
미륵전 포벽에는 스님이 기생의 등에 시를 쓰는 특이한 그림이 있다. 당나라 벼슬아치 퇴지 한유가 불교를 얕잡아 보고 기생 홍련을 보내 태전선사를 파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홍련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태전선사가 그의 등에 시를 써주어 한유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十年不下鷲融峯(십년동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고서)/ 觀色觀空色卽空(색과 공을 관하니 색이 곧 공이라)/ 如何曹溪一適水(어찌 조계의 한 방울 물이 흘러서)/ 肯墮紅蓮一葉中(한 잎 홍련에 떨어짐이 옳겠는가)”
방등계단. 보물이다.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보리를 증득하려는 사람에게 수계하기 때문에 방등계단이라 했다.
➲ 특별한 방등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은 특별하다. 방등계단의 ‘방등’은 대승경전을, ‘계단’은 수계의식을 하는 장소이다.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보리를 증득하려는 사람에게 수계하기 때문에 방등계단이라 했다. <대방등다라니경>에 “지극한 마음으로 육근으로 지은 죄를 드러내어 고백하고 참회하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세존사리탑 주위를 120번 돌며 다라니를 지송한 후 자리에 앉아 참선을 하면 수명 연장과 현세의 이익을 얻는다”고 했다.
보물 26호인 방등계단은 총 높이 4.2m, 보주형 사리탑 높이 1.2m, 1단의 폭이 12.5m로 중앙에 아홉 마리 용이 사리를 지키고 있어 특이하다.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계단주변에는 사천왕, 천인 등이 사리탑을 외호, 공양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방등계단 옆 보물 25호 고려시대 오층석탑(불탑)은 괴임돌이 있는 상·하 2단의 기단위에 체감이 좋은 5층 탑신을 올렸다. 불탑에는 과거불인 정광여래의 사리 4과, 석가여래 사리 3과와 1492년에 중수한 기록, 소형 형상불이 발견됐다.
또한 1635년에 지은 보물 827호 대장전에는 1644년에 조성한 석가모니, 가섭, 아난 삼존불을 모셨다. 둥근 얼굴, 가늘게 뜬 눈, 입가의 미소 등 친근감이 간다. 특히 타오르는 불꽃 속에 넝쿨로 이어진 연꽃이 두광과 신광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화려하다.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화중생련종불괴(火中生蓮終不壞)’라는 말이 있다. ‘삼계가 불타는 집이어도 부처님의 말씀은 불꽃 속에 핀 연꽃과 같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광배에 표현했다. 금산사는 예나 지금이나 중생들의 아픔을 미륵신앙으로 감싸주는 귀의처로 미래의 희망을 약속한 사찰이다.
미륵전 벽화 속의 태전선사와 기생 홍련. 홍련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태전선사가 그의 등에 시를 써주어 한유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내용이 전해오고 있다.
[불교신문36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