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돈대(甲串墩臺)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길 18
좌강돈대에서 북쪽으로 염하 해변을 따라 약 1.5km 거리에 강화도의 관문인 강화대교와 인접한 곳에 갑곶돈대가 있다.
이곳을 ‘갑곶’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불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고려 고종 19년)부터 1270년(고려 원종 11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곽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치첩)은 40개였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으며,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인 치성이다. 갑곶돈대는 조선 인조 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년)에 48개의 돈대를 축조할 당시 갑곶나루에 만들었는데, 이때는 ‘갑구지돈대’라고 불렀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梁憲洙)가 이끈 부대에 패해 물러났다. 패한 뒤 약탈한 수많은 문화재를 갖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1875년(고종 12년)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됐다. 이때 갑곶돈대,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 등 세 포대와 함께 제물진(濟物鎭)의 관할에 속했다.
1876년에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이곳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갑곶돈대 입장요금 : 900원]
강화 역사관
갑곶돈대 근방에 있는 강화 역사관은 강화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4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강화 지역에서 출토된 총 169점의 유물을 전시해 놓았고 야외에는 조선시대의 대포와 갑곶돈대를 비롯해 비석군이 전시되어 있다.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제1전시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팔만대장경의 제작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제2전시실과 몽고 침입에서부터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국난 극복사를 설명한 제3전시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부터 한일합방, 3·1운동이 펼쳐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제4전시실이 있다.
전시관 왼편의 갑곶리 탱자나무는 40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데 강화도가 탱자나무 서식의 북방 한계선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강화역사관 옆의 갑곶은 고종 19년(1232년)부터 원종 11년(1270년)까지 고려의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몽고와 줄기차게 싸울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도 이곳에서 프랑스와 전투가 벌어졌는데 강화도 동종을 탈취해 가려던 프랑스군을 이곳에서 크게 물리쳤다 한다. 그때 사용했던 화포인 홍이포도 전시되어 있다.
갑곶돈대(甲串墩臺)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