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마태오 25,1-13
자기 등이 꺼지지 않게 태워야만 살 수 있는 인간
오늘은 등불에 필요한 기름이 충분하여 혼인 잔치,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현명한 처녀들과
기름이 부족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미련한 처녀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의 불, 곧 사랑의 의지가 타오르는 이들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등불의 의미는 봉헌이다.
나를 태우는 것.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기 위해.
나의 봉헌이 그리스도께 합당하기 위해 어때야 하는가가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일단 사람은 자기를 봉헌하는 삶, 자기를 불태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부터 알아야겠습니다.
나에게 불을 붙여 준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태우는 삶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한 사업가가 김창옥 교수의 강의 CD를 내고 싶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장님, 표정이 제가 한마디만 하면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시네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 남자 사장이 그 자리에서 진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방금 함께 들어왔던 여자 실장은 자기 아내이고, 아내에게 회사를 맡기기 위해 나와서 일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자녀들 교육보험도 다 들어놓고, 자신은 지금 자살을 준비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막내였는데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이 가난했는데, 게다가 어머니가 중풍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는데 이미 결혼한 누나들의 집에 돌아가며 1년씩 얹혀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이 “왜 냄새나는 할머니가 우리랑 살아야 해?”라고 하며
자신의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니 조카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고 자신도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기숙사와 장학금을 대 주는 곳에 합격하여 나중에는 원양어선을 타서 돈도 어느 정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실만하게 성장했는데,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중풍 걸린 어머니가 창피하고 떠나고 싶었던 과거의 자기 모습이 너무도 마음이 아파 그다음부터는 어머니에게 하지 못한 효도를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 주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고 수많은 사기를 당하여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분의 삶은 어머니에게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었고 어머니가 안 되니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할 수 없으니 죽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에서 주인공은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한강에서 뛰어내렸는데 떠내려간 곳이 밤섬이었습니다.
밤섬은 자아를 상징합니다.
자기 자아에 갇혀서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싶은 꿈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마치 불경에 나오는 칡넝쿨에 매달려 떨어지는 꿀이나 맛보며 고통을 잊는 미친 코끼리에게 쫓기던 나그네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김 씨는 한 여자가 보내는 신호에 응답하게 되고 조금씩 자기 섬에서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관계가 사람을 자아의 지옥으로부터 구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와에게 선악과를 봉헌하라고 한 것입니다.
봉헌은 자기를 태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위해 십분의 일도 태울 수 없다면 세상에서 그 심장에 불을 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불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쪼개놓은 제물들에게 등불이 나타나 그 제물을 태운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위해 외아들까지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맛과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체조배와 미사, 하.사.시., 7기도와 같은 것들로 그 불을 다시 지피려 합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지옥이고 나를 사랑한 이를 위해 나를 태우는 삶이 행복입니다.
이것을 알고 규칙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되살리려고 하는 예배를 올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수많은 미디안과 아말렉 군사들 앞에서 300명의 자기 군사에게 준 것이 나팔과 항아리에 든 횟불이었습니다.
이 등불은 항아리가 깨질 때 손에 들리게 됩니다.
주님의 등불은 나에게서 자아의 항아리를 깨뜨립니다.
그렇더라도 그 횟불이 지속적으로 타려면 계속 기름을 보충해주어야 합니다.
오하이오주 해밀턴에 사는 남편 하버트 말리코트(99)와 아내 준 네이피어(100)는
80년간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매일 자기 전에 뽀뽀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는 일이 있더라도 각자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여 삭힙니다.
뽀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삭혀야 했고 또 키스하고 나면 그런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두 부부가 매일을 연애하듯이 살게 된 방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규칙적으로 주님을 묵상하고 성체를 영한다면 결코 우리 안의 등불은 꺼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25,1-13
이 하루는 주님께서 아직 우리에 대한 자비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표시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는 말씀 가운데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언젠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의 날이겠지요.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 뵙는 은혜로운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그분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날,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심판과 단죄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목숨 걸었던 대상들, 넉넉한 은행 잔고, 탄탄한 주식들, 멋지게 쌓아 올린 지상 장막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슬픔의 날도 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의 그 날과 그 시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 삶의 많은 날들이 베틀의 북에 남아 있는 실 사라지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리가 주님 대전으로 나아가는 날, 결국 우리 각자의 종말, 즉 개인의 죽음도 그 날과 그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을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것이지만 내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하루 새로운 시간은 주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아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매일 매일 펼쳐지는 하루하루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이 하루를 어떻게 하면 보다 알차게, 복음적으로, 주님과 이웃과 공동선을 위해 잘 사용할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강론>
(2024. 8. 30. 금)(마태 25,1-13)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13).”
1) 여기서 ‘어리석다. 슬기롭다.’ 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기름을 미리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들이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신랑이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하는 말,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
이 말씀의 바로 앞에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새겨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과 주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세속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사람들도 모두 ‘어리석은 처녀들’에 포함됩니다.>
2) ‘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라는 말은, 인간들의 생각보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질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이고,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고 표현됩니다(마태 24,50).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갑자기
재림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종말과 재림의 날과 시간은 인간들이 미리 계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이비 종교에서 종말의 날짜를 자기들 마음대로
계산해서 예고하고, 그래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일들이 자주 생기는데,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도 “종말과 재림이 언제인지 미리 아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아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일일까?
만일에 주님께서 종말의 날과 당신의 재림 날을 미리 예고하신다면, 잘 준비하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사람도 조금은 있겠지만, 아마도 인간 세상은 굉장히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은 인생을 포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 날이 되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에서 쾌락에 빠져들 것이고, 그리고 그 예고 자체를 아예 무시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떻든 종말과 재림은, 판공성사 날짜를 미리 공지해서 준비하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회개는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고, ‘깨어 있는 일’도 평소에, 즉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평소에(지금) 하지 않고 갑자기 하는 회개는, 또는 억지로 하는 회개는 ‘진정성 없는’ 회개이고, 그런 회개는 회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이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문을 닫아버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비유는 비유일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최후’의 심판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문을 닫아버려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