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글을 보았다.
아랫처럼 댓글 달았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의 글감으로 삼고 싶기에 여기에 퍼 옮겼다.
1)
너무 섬뜩하군요.
중한테 곡식으로 시주한 게 아니고, 쇠똥을 퍼 주었다는 논리도 납득하기 어렵고...
며느리는 쌀 한 바가지를 퍼서 시주했고...
중은 다음날 주술을 부려서 마을 모두가 물에 잠기게 했군요.
부자 영감이 혼자 잘못했는데도 마을사람 모두가 익사했군요. 심지어는 여자의 남편조차도...
그렇게 신통방통한 재주가 있으면 구태여 동냥질을 했을까요?
답답합니다.
하나의 야설, 전설이라고는 하나...
제가 너무 늙었나 봅니다.
그 고을사람 모두는 왜 죽었을까요?
조선 제2대왕 정종(1398 ~1400년) 때라면 불과 코앞인 620년 전인데...
고향사랑이 굉장합니다.
존경합니다.
2)
고창군 아산면 바로 위가 부안면이군요.
인촌 김성수, 수당 김인수 형제
일제시대 김성수는 일본에 900마지기 땅, 비행기를 헌납해서 친일파로 대접을 받고...
동아일보, 고려대학교을 세운 자랑스러운 인물?
그만큼 어느 특정인이 재산을 움켜쥐었다는 뜻이군요.
대신에 많은 사람들은 굶주리고, 비굴하게도 부자한테 굽신거려야 했고...
2018년 2월 인촌 김성수의 건국훈장 서훈이 취소되고...
답답합니다.
21세기인 지금도... 빈부의 격차로...
국가정책이 보다 평등화했으면요.
생각하게 하는 전설, 야사이군요.
1.
오늘은 2020. 2. 13. 목요일.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로 명칭 바꿈) 뉴스로 전 세계가 벌벌 떤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전염병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서 지금껏 잘 대응하고 있기에 확진자는 늘어나도 사망자는 한 명도 없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나는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고 있기에 면역력이 무척이나 약하다. 입에 마스크를 쓰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제한하기에 날마다 아파트 안에서 갇혀서 지낸다. 할일이 없기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뉴스를 보고, 개인카페에서 남의 글을 읽는다. 뉴스와 남의 글에서 정말로 많은 정보를 얻는다. 남의 글에 댓글 달면서 내 생각을 남한테 보인다.
위 댓글도 그렇다.
나는 이제는 나이가 많다. 눈이 어둡고, 귀도 어둡고, 몸도 굼뜨다.
활동영역이 좁아졌기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양은 더욱 늘었다. 그만큼 고집도 세어졌다.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기에 '왜 그럴까'하는 의문은 자꾸만 늘어난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게 아니라서 때로는 미움이나 받는다.
내 성격 탓일 게다.
어렷을 적에는 100년 전, 200년 전, 500년 전, 2000년 전의 역사, 우리나라 역사가 엄청나게 오래된 줄로만 여겼다. 단군할아버지 왕검이 나라를 세운 지 5000년 역사.
최근사로부터 과거로 돌아간다. 이씨조선, 고려, 통일신라, 삼국시대, 한사군시대, 고조선... 엄청나게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어린시절에는 역사뿐만 아니라 이야기책에도 심취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 속의 야사, 전설 등이 정말로 가짜, 허구라는 인식이 자꾸만 짙어졌고, 사고의 영역이 넓고 깊고 강할수록 남의 말을 별로 믿지 않는 세월에 와 있다.
과거 내가 어린시절에 들었던 귀신 무당들의 이야기, 친구 따라서 가 본 교회, 장례식장에 본 중들의 행사, 어른들이 지내는 처상행렬, 시향과 제사, 라디오, TV, 영화에서 보는 내용들이 자꾸만 시시해졌다. 가짜, 속임수라는 인식이 자리매김을 했기에.
신뢰성이 자꾸만 줄어든다.
요즘 인터넷뉴스를 보면 정말로 가짜들의 세상이다. 과장하고, 숨기고, 감추고, 왜곡하고, 자기한테 유리한 것만 과대포장해서 흘려보내고...
믿는 자가 더 어리석고, 믿는 자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세상으로 변질되어 갔다.
1.
생각을 뒤짚고 싶다.
내 책상 바로 곁에는 둥근 세계지도인 지구의가 있다.
남북의 위치를 거꾸로 뒤짚어서 남극이 위쪽으로 향하게 하고, 때로는 수평을 수직으로, 수직을 수평으로 위치를 바꿔서 지구의를 내려다본다. 전혀 이질적인 남극과 북극모형이다.
지금껏 내가 알았던 것, 믿었던 것들이 과연 정확할까?라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요즘 강원도에서는 겨울축제가 열린다.
지난해 연말부터 이상기온으로 지구 전체의 기온이 따뜻해져서 우리나라에도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언 경우가 매우 드물다.
겨울축제는 날씨가 추워야, 눈이 폭설해야, 얼음이 잔뜩 얼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의 날씨는 겨울답지 않았다.
겨울축제가 무엇일까? 눈이 내려서 썰매 타는 놀이일까?
본질은 강물을 막아서 얼음이 두껍게 얼려야 한다. 강물 속에는 육지에서 양식한 물고기(산천어, 송어, 빙어 등)을 넣어서 얼음낚시를 한다.
며칠 전 환경부장관은 겨울축제인 물고기 낚시는 동물학대이라는 뜻으로 발표했다.
강원도 화천산천어축제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홍보대사인 소설가 이외수 씨는 이를 맹비난했다. 동물학대가 아니라는 뜻으로.
나는 겨울축제에 나간 적도 없고, 앞으로도 가고 싶지 않다. 얼음 위에서 얼음을 지치며 노는 거야 좋지만 물속에 가둬둔 물고기를 잡아서 죽인다는 놀이에는 고개를 흔들며, 사람이 아닌 물고기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고 싶다.
<감성마을> 촌장, 소설가 외수는 '물고기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라는 시각을 지녔다.
과연 그러할까?
낚시바늘에 꿰여서 공중으로 낚아챘는데도 통증을 못느낀다는 물고기는 어떤 종류이냐? 모든 물고기인가?
'통증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언제 물고기한테 물어 보았어? 물고기가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던가?
물고기의 크기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으로부터 대왕고래처럼 30 ~ 40m 길이와 몸무게 어마어마하게 무거웁다. 이런 물고기는 통증,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할까?
물고기의 통증을 사람이 어떻게 아느냐고?
사람이 만든 어떤 기계, 약물측정으로 남의 고통 통증을 알까?
물고기가 통증을 못 느낀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 황당하다.
살생축제를 해서 돈벌이에 급급한 자들이나 하는 억지이며, 궤변이다.
나한테 물으면 나는 이런 자들한테 이렇게 말할 게다.
'너희들은 그 어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너희들의 몸뚱이는 통증을 느낄 그 어떤 신경조차도 갖지 않았다.'
그런 자들을 실험하면 증명이 될 게다. 실험하는 방법은 숱하게 많을 터. 그들은 물고기처럼 전혀 통증을 못 느낄 게다.
물고기가 통증을 느낀다는 것을 간단하게 실험할 수 있다.
아주 뜨거운 물속에 물고기를 갑자기 넣었을 때 물고기가 하등의 몸부림 없이 유유히, 느슨하게 헤엄치면서 놀까?
그 어떤 동물도 펄펄 끓은 뜨거움 물속에 풍덩 내던지면 기겁을 할 게다.
잔인한 인간만 빼놓고는 그 어떤 동물은 다 고통을 느낄 게다.
내가 말하는 요지는 간단하다.
남의 처지에서 생각을 뒤짚고, 바꿔 보자는 뜻이다.
이런 글은 시, 소설, 희곡 등과는 거리가 먼 생활글이다. 나는 이런 산문글을 더 선호한다. 생각을 뒤짚어 볼 수 있기에.
나는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어떤 통증을 느낀다고 여긴다.
다만 내가 식물의 통증이 얼마만큼, 어떤 것인지를 전혀 짐작도 못하지만 식물은 하나뿐인 자기 몸이기에 인간이 상상도 못할 어떤 고통과 통증을 느낄 것이라고 짐작한다. 아쉽다면 내가 이를 증명하지 못한다. 나는 식물이 아닌 동물이기에.
이런 생각으로 나는 식물을 기르거나 식물을 먹을 때에도 늘 이들한테 미안해 한다.
나도 때로는 남의 생명을 죽인다. 내 판단에 의해서 어떤 동물, 어떤 식물은 철저하게 죽인다.
예컨대 뱀이다. 나보다 몸집이 훨씬 컸던 쌍둥이 동생의 발등을 물어서 불과 20시간만에 죽은 동생이 있었다. 나는 뱀을 보면 어떻게 해서던지 뱀을 잡아서 죽이려고 한다. 뱀이 느끼는 통증, 고통.. 이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다.
뱀 이외에도 징그럽고 무서운 동물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동물뿐망 아니라 식물도 죽인다.
시골에서 텃밭 농사를 지을 때 지겨운 잡초를 보게 된다.
예초기와 낫으로 마구 베어냈고, 삽과 쇠스랑으로 풀뿌리를 뽑아내서 죽였다.
잡초도 어떤 통증을 느낄 것이나 나는 이들의 통증을 전적으로 무시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식물은 씨(씨앗) 한 톨이라도 소중히 여긴다.
내가 음식물을 먹을 때에는 음식물을 담았던 그릇을 개가 햝아먹는 것처럼 깨끗이 먹는다.
식물도 하나뿐인 생명이기에. 나는 남의 몸뚱이를 먹어야 하기 먹이가 된 그들한테 미안해 하면서 고마워한다.
나중에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