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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떨어져 산속의 어둠이 적막을 펼쳐들고 숨 가쁘게 달려들자 그녀는 몸을 털고 일어나더니 슬그머니 삼신부(三神府)를 열고 어둠을 이불삼아 그림자처럼 산의 정심으로 잦아들었다. 그러면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다름 아닌 국풍파(國風派) 마지막 전인 낭주(娘姝)였다.
국풍파는 이 나라의 뿌리정신으로 단군조선의 수두제전[蘇塗祭典)으로부터 연맹왕국시대의 영고·동맹·무천·소도로 이어져 고구려시대에는 선배제도(先輩制度)가 되었고 신라에서는 선배제도를 모방 발전시킨 화랑제도로 연결된 바가 있다. 이런 사상은 고려 중기까지 이어져왔으나 서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국풍파의 대표적인 인물 묘청(妙淸)과 개경을 중심으로 실세를 장악하고 있던 유학파(儒學派)의 우두머리 김부식의 충돌이 일었을 때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으로써 나라의 기운이 유학(儒學)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묘청과 김부식의 충돌을 일종의 정치사변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지만 기실 그 사건은 낭가(娘家)와 유파(儒派)의 대립이었으며 독립사상과 사대사상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민족의 이념을 짚고 가야한다.
우리민족의 근본사상은 독특하여 자연환경과 밀접하다. 어느 민족이나 사상의 밑바탕에는 근본(根本)이 있어 그것이 믿음으로 나타나는 원형인 것인데 우리나라의 최초사상의 바탕은 무속(巫俗)이었다. 우리의 민속신앙의 근본정신은 이 세상이 어떤 신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이 아니고 우주가 스스로 열려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스스로 있어 자율적으로 운행하는 가운데 사람 또한 자연스럽게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은 천지창조라는 말 이전에 천지개벽이라는 말을 써왔고 그래서 있는 현상 그대로를 /스스로 그러하니 또한 그러하리라/라는 원래사상에 충실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을 숭배하고 나무나 바위 물 등 자연 안에 있으나 사람의 힘으로 이해하기 석연치 않은 것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우리 본래의 민속신앙은 그 원형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경전이라는 물건이 있을 까닭이 없고 그 원형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인간 존재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지성스런 마음이라는 참됨의 싹을 길러내면 흡족했던 것이다. 나머지는 그 마음의 생김새를 따라 /있고/가 되기도 하고 /없고/가 되기도 했다. 그것이 생멸의 법칙이었다.
눈에 보이는 몸, 손으로 만져지는 몸, 살았다가 죽어서 없어지는 몸의 유한성은
/없고/가 된다. 즉 궁극적으로 주검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육체에 깃들었던 혼은 몸이 죽을 때 왔던 곳으로 돌아가 영생하거나 잠시 대기하다가 또 다른 몸에 다시 깃들기 때문에 영원성이며 이것은 /있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그 왔던 곳은 어디였을까? 그곳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는 곳이다. 그곳은 불가에서 말하는 절대 공(空)의 개념인 극락이기도 하고 기독신앙이 말하는 천국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무속에서 굿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현실계의 시간으로부터 일체를 차단하여 격리시키는 일이다. 우주가 팽창을 시작하여 질서가 나타나기 이전인 본래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 무공간 무시간 속에 있는 사자의 혼을 데리고 돌아와 살아있던 현시를 재연시키는 제의(祭儀)가 굿인 것이다.
그런 풍습과 사상이 주변국의 끊임없는 간섭과 정치적 간섭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를 지금까지 또렷하게 지켜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고 그 원동력은 우리의 언어와 문자와 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며 그 문화 가운데는 산신도니 풍류도니 하는 독특한 풍습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를 총괄하여 국풍파 이념인 현묘지도라고 했다.
국풍파의 이념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부터 발전해 공간으로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심적 활동상태가 곧 국풍파의 낭가사상인 주체이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조에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하자 낭가의 후손들이 국풍쇠망의 울분을 숨긴 채 심마니로 혹은 사냥꾼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거나 그도 아니면 무리지어 화전부락을 만들고 혹은 떼를 지어 적굴을 만들어 양상군자가 되기도 했고 그 짓거리도 못하는 아낙들은 무당이 되어 어느 고을의 당골네 노릇으로 연명하며 숨어 살았다.
그렇게 살면서도 그들은 늘 세상의 변화에 민감해야했다. 200여년 저쪽 왜란을 겪으면서부터 그들은 이미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문명이라는 것이 사람의 정서를 도륙하는 난국을 예감하고 그에 대한 준비로 낭가사상을 심적으로 승화시켜 사람의 풍습 속에 심는 방법을 심구(深究)해 오고 있었다. 그 방법을 구체화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낭주가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며 하늘의 운행과 땅의 기운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신령스런 땅의 기운을 키울만한 지세를 살피고 다닌 지 이미 이십여 년이다.
열일곱 꽃다운 처녀 몸으로 시작한 그녀의 수임행로가 이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평지풍파를 겪으며 여자 나이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으니 그 고초가 오직했으랴만 오직 한 가지 올곧은 목적의 수행자가 되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어 지이다, 그렇게 되어 지이다/를 숙명처럼 외우며 이어온 비장한 목숨이다.
이튿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한 초산 월조봉 경계 아래 상거 백여리. 영산기맥의 누런 자락이 흘러내려 오뚝하게 뭉친 방등산 건너편 펑퍼짐하게 주저앉은 모양성 풀밭으로 여인네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모여들고 있었다. 화전놀이를 나온 여인들이었다. 일 년 열두 달 삼백예순날이 남정네들의 날이라면 삼월 가운데 하루 날을 잡아 화전놀이를 즐기는 단 하루를 여인네들의 날로 정해 이날만은 화전놀이하는 근방에는 남정네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세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전놀이라는 것이 꽃잎으로 전을 부쳐 먹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전놀이에 나오는 여인네들은 대게가 가임여성이고 가임여성 가운데서도 자식이 절실한 여인네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화전놀이에 나선 여인들은 반상의 구별 없이 누구나 속옷을 입지 않고 겉치마만 입는 관계로 남정네들이 그 자리를 피해주는 아량을 보이는 것인데 이는 여인들이 지기(地氣)를 받아들여 득남을 준비한다는 뜻이 포함된 놀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철 이른 들판에 무슨 꽃잎이 그리 흔하게 있어 화전놀이겠는가 마는 그녀들은 딱히 꽃잎만을 찾는 건 아니었다. 치마 속에서 양 무릎을 세우고 가랑이를 넓힐 수 있는 만큼 벌리고 앉아 이른 봄 새로 돋은 풀잎 가운데서 실하게 보이는 것들을 찾는 것인데 끝이 뾰족한 이파리는 오장을 다스리고 동그스름한 잎은 육보를 다스리는데 좋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어서였다.
여인네들은 그런 앉음새로 화전붙일 것들을 찾으면서 은연중에 지표를 뚫고 치솟는 봄의 지기를 음문(陰門)으로 한껏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딱히 생산을 준비하기 위한 일만이 아니라 여체에서 발병하는 잡다한 질마(疾魔)를 다스리는 치료법이기도 했던 것이니 의술이 허술하고 약품이 빈약하던 그 시대의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건강요법이요 치유법인 것이다.
해가 중참 어름에서 시작된 화전놀이가 유시 가까워서야 갈무리되면 화전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들의 보자기 속에는 화전 몇 조각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여인들은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보임으로서 하루 행사를 인정받게 되는 물증이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뉘엿거리고 여인들이 주섬주섬 행장을 수습하고 있을 무렵 그중에서도 나이 꼴이 가장 덜 잡힌 아낙 하나가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둔치아래쪽 몇 그루 나란히 선 복숭아나무 뒤로 슬쩍 돌아갔다. 돌아간 그녀는 이제 시늉뿐인 도화(桃花) 몽아리를 몇 웅큼 잽싸게 훑어 담더니 이내 무리에 합류한다.
그 여인, 약방 댁이라 불리는 그 여인은 모양(牟陽: 고창의 옛 이름)에서 관약방을 하는 신광흡의 처로 성은 김씨요 본관은 경주였다. 바로 동리 신재효를 낳게 되는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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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소비자, 대설, 동지, 성탄의 12월*^^**^^* 만복 축원과 함께*^^*더욱 건강 다복하시길 축원하며*^^**^^*<> 고창 고창 고창*^^*고맙습니다반갑습니다*^^*만사형통의 축원과 함께"고창" <고수고창공음대산무장부안상하성내성송신림심원아산해리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