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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이 명동성당 앞에 도착한 무렵은 오후 3시 30분경 이었다. 명동성당 입구 오른쪽에는 "너희들은 자랑스런 노동자의 아들딸이다"라는 조그만 현수막과 음향기기들이 놓여 있었고 스피커를 통해 민중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찾던 민중가수 박준씨는 문화노동자 연영석씨와 함께 공연장 옆에 세워진 박준씨의 차량 옆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오후 3시 30분이 된 그제서야 점심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 얼굴을 알고 지내던 두 민중가수는 우리를 보고 반갑게 맞이한다. 가벼운 인사후 서둘러 식사를 마친 박준씨는 쉴 새도 없이 이어질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음향을 점검하고 거리 공연에 들어간다. 첫 번째 노래는 '행복의 나라로'라는 곡이었다. 의외였다. 투쟁현장에서 누구보다 노동가요를 열정적이고 강한 목소리로 노동자, 민중들을 하나로 모아내고 선동하던 모습을 익히 알던 사람들에게 박준씨가 부르는 잔잔한 포크송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노동현장이나 철거민들의 집회에서 들었던 민중가요를 부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은 편견이었던 것이다.
그 공연장은 화려한 무대는 없지만 정말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화창한 봄날 명동성당 주변은 박준씨의 공연이 시작되자 갑자기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경쾌해 진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바로 앞에는 "나눔함"이라고 쓰여진 작은 모금함이 있다. 노래가 진행되는 도중 한 아주머니가 조그만 아이를 데리고 가다 수줍게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돈을 넣고 얼른 지나간다. 바로 이어지는 목소리 "감사합니다". 박준씨는 노래의 멜로디에 맞춰 돈을 넣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이 말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노래는 더 경쾌해진다.
첫 번째 노래가 끝나자 "해고 산재 노동자들의 아이들도 똑같은 미래와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노래합니다. 10원 짜리 100원 짜리 나눌 수 있다면 그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라는 공연의 취지가 나오고 한 학생이 물끄러미 공연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찾아 넣고는 환하게 웃고 돌아선다.
이렇게 해고, 산재 노동자들의 아이들이 미래를 꿈 꿀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금은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 낮 12시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명동성당앞 거리공연은 작년 10월 14일 부터 시작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공연에는 가수 박준씨 뿐만 아니라 오전 11시부터 연영석씨가 함께 나와 공연을 준비하고 번갈아가면서 한다. 저녁 무렵에는 노래공장, 지민주, 서기상씨등 문화 일꾼들이 함께 한다.
박준씨의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연영석씨는 거리공연의 분위기를 전했다. 연영석씨는 "집회에서 노래 부르는 거랑은 많이 다르다"며 "여기서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참 편하다"고 말한다. 그의 얼굴에도 즐거움이 가득 차 있다. 이어 "모금함에 돈을 넣는 형태도 참 다양해요"라며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이 마음도 아름답다"고 전했다. 모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은 참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액수를 많이 넣으면서 보라는 듯이 넣는 사람,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해진 천원짜리를 쑥스럽게 넣는 사람 등등. "어떤 할머니는 노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시다가 돈 이 만원을 주시고는 음료수를 한 다발 사온 적도 있어요. 이 곳에서 청소하시는 분들도 점심때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건너편에 앉아 담배 피우시다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르면 매우 좋아하시기도 하죠" 명동성당 앞 조그만 공연은 그 주변 사람들에겐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공연은 단한 번 폭우가 쏟아질 때 중간에 멈춘 것을 빼고는 웬만한 눈비가 와도 그냥 진행된다.
모금이 시작된 계기
박준씨가 이 모금을 시작한 것은 2001년 대우자동자 정리해고 분쇄 투쟁 당시 있었던 4월10일 경찰폭력으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다치고 나서부터다. "재작년 대우 동지들이 4월10일 경찰 폭력 사태를 겪고 나서 그 동지들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해고 이후 가정이 깨져나가고 아이들 학원도 끊고. 당사자들의 고통도 있지만 아내나 어린아이들이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할 틀이 없었습니다. 철거지역 아이들은 공부방도 있고 나름대로 아이들을 위한 동지들도 있고 아이들 문제를 힘든 사람들끼리 나누고 있습니다. 노동판이든 민중운동 판이든 장학 사업을 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틀을 만들기 위해 재단을 하나 만들어 보자는 작은 생각을 용기를 내어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첫 모금은 2001년 10월 운송하역노조 페덱스 지부 파업출정식 자리에서 시작했다. 해고자 자녀를 위해 당장 보이는 것은 없지만 미래를 위해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모금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언뜻 생각해 보면 같은 노동자들이 산재, 해고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같은 입장에서 한푼 두 푼 모으는 게 쉬울 것 같아 보이지만 그가 다니는 현장은 언제나 치열하게 눈앞의 싸움을 앞두고 있는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2002년부터 계속 현장에서 모금을 했는데 현장에서 버거워 했습니다. 현장에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큰 단사든 작은 단사든 모금통을 돌리고 투쟁 기금 모아야 하는데 또 모금함을 돌리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집행부에서는 당장 투쟁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 모금함을 돌려야 하는데 취지는 이해하지만 산재 해고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위한 재단 사업이 당장 절실한 문제로다가 오지 않는 것이다. "10원이든 100원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누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노동현장과 노동운동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되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변 동지애마저 깨져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현장에서 박준씨가 노래를 부르면서 직접 이야기하고 모금함을 돌릴 수도 있지만 주최측에서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알리고 뜻을 함께 공유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 가급적이면 직접 나서지는 않으려 한다.
나눔의 원칙 : "나눌수 있어 좋지 않수!"
그가 모금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것은 산재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장학 재단이다. 노래 일꾼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그의 "나눔"의 철학이 담겨 있다. 철학이라기 보다는 삶의 원칙이라고나 할까. 그 나눔은 그냥 돕는 차원을 넘는다. "돕는 다는 거, 자선, 위한다는 것도 좋지만 돕는다는 차원을 넘고 싶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역량을 나눌 수만 있다면 나누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도와주는 것은 그들이 늘상 도움받는 대상이 되는 것 같아요. 처지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고 현 상황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공연하는 연영석씨 역시 같은 마음이다. "돈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사회복지가 잘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죠. 투쟁해야 할 문제인데. 대부분은 우리 공연을 그냥 좋게만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알려내고 같은 노동자에게 이런 일이 있다는 것과 모두의 문제임을 알려내려는 뜻도 큽니다" 그들의 거리 공연에는 단순히 돈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들이 현장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연대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나눔"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명동성당 앞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 자리를 고수하는 것은 적을 여기에 두고 더 알려 내려는 생각입니다. 1-2년만에 끝날 것도 아니고 재단이 생겨도 계속 공연은 해나갈 것입니다. 세상과 가깝고 노동 현장의 일도 알리고 기층 민중들의 내용도 알릴 수 있는 자리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곳은 민중들의 투쟁을 알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리잡은 공연으로 인해 해고 산재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박준씨는 "그런 설명도 해주고, 공연하면서 이런 내용을 지나는 사람에게 하게되면 들을 사람은 듣고 나눌 사람은 나누는 손길대로 의미가 있습니다"며 알리는 일의 중요성 또한 강조한다.
거리공연은 오래 지속된다
박준씨는 명동성당 거리공연의 터줏대감이다. 지난 85년도부터 심장병아이와 인연이 되어 그 약속으로 시작해 2000년도까지 심장병과 불치병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거리공연을 해온 이력이 있다. 그래서 거리공연에는 인이 박혀 있다고 표현했다. "요령이 늘었다기보다는 늘 카톨릭 신앙을 가지고 내 신앙 안에서 예수가 보여주신 삶을 본받을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산다"며 "이 자리에서 항상 감사하고 단 한 명이라도 나누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박준씨는 99년도에 노래 공장 창단 멤버인 부인 박은영씨를 통해 작곡가 김호철씨를( 현 노동의 소리 대표)만나 쉽지 않은 약속을 하고(그의 표현에 의하면), 지하철 파업이 있던 99년 당시 민주노총 심재걸 문화국장의 민주노총 노동가요 공식음반 작업 제안을 받고서 노동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음반에는 "세상을 멈춰라"와 행진곡 풍으로 바꿔서 편곡한 "약속은 지킨다", "깃발가" 등이 담겨 있었다. 당시 꽃다지의 "약속은 지킨다"를 리바이벌 하면서 과연 1인가수가 그 노래를 소화 할 수 있는지 참 버거웠다고 한다. 그는 이때부터 노래를 무기삼아 각종 투쟁 현장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가끔 노래가 세상을 바꿀수 있느냐는 질문에 "확신한다"고 말한다. "같이 뭉쳐서 바꿔 나갈 수 있는 게 노래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 동안 현장과 거리 공연을 통해 모은 금액은 2001년 1300만원, 2002년 1100만원, 2003년은 800만원 정도이다. 하지만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5억원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10월경에는 큰 문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현재는 이 문화제에 대해 여러 형태로 고민하고 있지만 문화일꾼들이 모여 산재 가족들과 해고 가족들을 초대하고 "속이 후련하네" 할만한 공연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이 문화제를 통해 문예의 힘을 알려내고 재단 사업도 선포할 생각이다.
후기
이날 인터뷰는 괘 긴 시간을 생각했지만 박준씨가 민주노총 서울본부 미조직 비정규특위 발족식에 잠깐 다녀와야 한다며 기타 하나를 메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헌헐증도 모아서 갖다 주시면 피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혈액대로 쓰여진다"는 말을 넣어 달라며 "나눌 수 있어 좋지 않수"라며 웃는다. 기타하나를 메고 민주노총 서울본부로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이 넉넉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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