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김낙중선생이 궁금하시면,검색어로 클릭하세요~??
사회적 갈등의 원인과 그 해결의 길을 찾아서 (1) 김 낙 중 (2010.4.4)
[1]사회적 갈등이란?
우리들의 이 모임은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우리들은 지금 ‘평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마음을 모아 즉 “지성( �t)의 마음”으로 어떤 주제에 관해서 열심히 생각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간절히 염원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한데 모여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상태에 있거나 “평화”를 위협받는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토론의 주제를 “사회적 갈등, 그 원인과 그 해결의 길을 찾아서”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떤 사회적 갈등이 있고, 또 그것이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는 지금도 전쟁연습이 진행되고, 사람들은 패가 갈리어 무서운 살상무기를 손에 쥐고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평화”를 깨트리는 “사회적 갈등”에는 과연 어떤 것이 있습니까?
첫째, 한일, 한중, 한미, 북미, 미중 등 국제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둘째, 우리 민족 내부의 남북 간 갈등이 있습니다.
셋째, 우리 남한 사회 내부의 정당간, 지역간, 종교간, 남녀간, 보수와 진보간, 연령계층간, 재산계급간, 갈등 등 헤아릴 수 없이 여러 가지 많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와 같은 사회적 갈등들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모두 논의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들 갈등은 모두 사람들의 “욕망 충돌”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사람은 저마다 욕심이 있고, 사람들의 그 욕심이 충돌할 때 서로 사이에 “사회적 갈등”이 생긴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갈등을 말할 때, 우리는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욕심을 버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모든 욕심을 버린다면 사회적 갈등은 생기질 않을 것이며, 그 해결책 또한 필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고 부처가 될 수도 없거니와 또 나는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참된 삶의 길”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삶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삶의 요구하대로 살려는 ‘욕심’이 없이는 삶은 불가능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나는 일요일마다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 가서 스님들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성불하여 부처가 되기 위한 길, 즉 스님이 되어 수도하는 길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 교회로 나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원한 것은 사람이 모든 욕심을 버리고 “해탈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엇이 ‘참된 삶의 길’인가? 하는 ‘길(=�찾기’ 즉 구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참된 삶의 길’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우리가 더불어 사는 ‘겨레’ 안에 제기되고 있는 문제로서의 남북 갈등 및 남한 사회 내부의 갈등문제를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2] 남북 갈등의 역사적 배경
내 나이 금년에 80입니다. 20세가 되던 1950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우리 민족의 분단 상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더불어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고민하며 살아 왔습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 민족은 약한 소수민족의 처지였기 때문에, 주변에 강대국이 나타나서 침략해오면 늘 고난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이점은 이스라엘 민족과 우리 민족이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남쪽의 ‘이지프트’에 끌려가서 노예가 되기도 하고, 동쪽의 ‘바비로니아’에 잡혀가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하고, 북쪽 아시리아 침략을 받기도 하다가 드디어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이 때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이스라엘 백성 속에 태어나서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수천년 전부터 한나라,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에 시달리며 살다가 드디어는 영국, 미국 등 해양세력의 묵인을 받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일본의 패전 이후 세계최강의 미국에 의하여 남북분단이 되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배경으로 남북간 골육상잔의 전쟁을 치렀으며, 60년이 넘어도 아직 싸움이 계속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강대한 주변 외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남북 갈등에 대한 ‘외인론’입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면, 약육강식의 세계사 속에서 어쩌다 우리는 약소민족이라는 사실이 죄라면 첫째가는 죄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강대국에 의하여 분단된 국가는 한반도 뿐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베트남, 독일, 코리아,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민족들은 모두 통일을 이루었는데, 유독 우리 민족만은 왜 그렇지 못했을까? 조용히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스트리아는 중도적인 ‘사회민주당’이 정부를 세우고 분단 10년 만에 미·소 냉전의 와중에서도 주변 강대국 간에 중립을 지키겠다며 소위 ‘오스트리아’ 식으로 통일을 이루었고, 베트남은 프랑스나 미국에 비하면 약소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체 민족 구성원들이 똘똘 뭉쳐서 자연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면서 무력항쟁으로 프랑스, 미국 등 강대한 외세를 물리치고 약 30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 후 약 20년간은 조용히 서독 내부의 사회적 통합에 힘을 쏟고, 그 다음으로는 1966년부터 동방정책을 시작하여 과거 동독을 인정할 수 없다던 ‘할슈타인원칙’을 폐기하고, 1972년에는 “동서독기본조약”을 체결한 다음, 그 후 20여 년간 꾸준히 진정성을 가지고 성실하게 동서독 화해를 위해 노력하여 분단 45년 만에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이룩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민족만은 전범국가도 아니면서, 외세에 의해 분단된 채, 좌우로 갈리어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남북 정권 당국 간에는 1972년의 ‘7.4남부공동성명’으로 시작하여, 1992년에는 ‘동서독기본조약’을 본 따서 만든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고, 2000년 ‘6.15공동선언’, 2006년 ‘7.4남북공동선언’등 쌍방 국가 원수 간의 약속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모두 휴지가 된 채 분단 65년, 전쟁 발발 60년이 지나도록 아직 ‘종전처리’조차도 못한 채, 적대적 군비경쟁을 위하여 막대한 국방비를 소모하면서 싸움질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기원한다면 강대한 제국들을 원망하고 있기보다 스스로 그 원인을 정확히 깨달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왜 ‘오스트리아’나 ‘베트남’ 처럼 안 되는 것일까요? 길을 찾자고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3] 우리 민족 좌우분열의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강대국 미국의 극동전략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좌우로 갈리어 싸움질을 했고, 지금도 그 싸움질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외형상 ‘이데올로기’의 차이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바탕에 우리 민족 구성원들 자신의 경제적 갈등이라는 토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먼저 1945년 8.15 후 왜 우리 민족은 심하게 좌우 양진영으로 분열되었는가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문명 이전 원시시대 우리 선조들의 경제적 갈등 우리들의 논의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사람들의 생활이 비교적 단순했던 원시사회의 경제적 갈등부터 순차로 그 배경을 잠시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의 원시시대 사람들은 다른 동물들의 경우에 보는 바와 같이 ‘가족’ 규모의 집단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사람은 엄마 배에서 태어나서 상당히 오랜 성장기를 지나야 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에, 자녀들은 오랜 동안 그 부모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함께 더불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 한 ‘가족’은 하나의 ‘우리’가 되어 “겨레”(=운명공동체)를 이루고, 이 산 저 들을 돌아다니며 먹이풀과 열매들을 찾고, 또 때로는 자기보다 약한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기도 했겠지요. 그때 원시시대 우리 조상들은 다른 ‘가족’의 사람들과는 큰 갈등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들과 산에서 먼저 먹이를 찾는 ‘가족’이 그 때 그 때 그 먹이를 먼저 먹어 없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깊은 겨울날 어느 ‘가족’은 가을에 뫃아 둔 먹이가 있는데 다른 ‘가족’은 먹이가 없어서 굶주리게 되었다면, 먹이가 없는 ‘가족’ 사람들이 다른 ‘가족’이 준비했던 먹이를 넘보다가 두 ‘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정한 지역에 머물면서 씨를 뿌리고, 짐승을 기르며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도구’가 발달했고, ‘가족’의 규모는 확대되어 ‘씨족’ 또는 ‘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씨족’이나 ‘부족’들 사이에서는 ‘생활영역의 갈등’이 생겼습니다. 한 지역 안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먹어야 할 먹거리가 제한되어 있고, 먹거리를 재배할 토지도 제한되어 있어서, 다른 씨족이나 다른 부족 사람들이 먼저 와서 그것을 먹어치우거나 땅을 차지하면 자기들이 필요한 먹거리가 부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시사회 사람들의 경제적 갈등요인은 주로 생활영역을 둘러싼 “영역다툼”이었습니다.
2)국가 및 신분계급제의 성립과 경제적 갈등
앞에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씨족’ 간 또는 ‘부족’ 간의 갈등 과정에서 ‘무기’가 발달했고, 국가가 발생했습니다. ‘국가’란 물리적 강제력(무기)을 가지고 다른 씨족이나 부족들의 공격을 막고, 또 자기 씨족이나 부족 구성원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강제기구입니다.
그런데 한 부족국가와 이웃한 다른 부족국가 구성원들이 통혼을 하고, 물물교환으로 유무상통하면서 평화롭게 살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서로 다투며 갈등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이때에 사람들의 주된 갈등 요인은 원시시대와 같이 생활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영역다툼”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생산력 향상에 따라 다른 부족들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리기 위한 “노예다툼”도 생긴 것입니다. 사람이 종일 일을 해도 겨우 자기 먹을 만큼 밖에 생산하지 못한다면, 사람을 잡아다 노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루 일을 시키면 그 사람이 먹고 남을만한 경제적 잉여가 생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기 위한 “노예쟁탈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배 부족은 국가의 권력을 계속 독점하기 위해 ‘신분계급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자기 부족만이 왕족, 귀족이 되어 국가 지배권을 계속 장악하고, 정복된 다른 부족을 노예로 삼거나 아니면, 계속 “상민” “천민”으로 삼아, 조세, 노역의 제공, 공물납부를 강요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가 이런 시대였습니다.
3)고려 및 이씨 조선왕조 국가 시대의 경제적 갈등, 민란과 동학농민전쟁
삼국이 통일되어 한 국가가 된 고려시대에 와서는 부족 간 갈등과 차별은 점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신분계급제도는 계속되었지만, 단일한 왕국의 주민으로서 과거제도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다른 부족 출신자도 국가 관리가 되어, 권력의 행사에도 참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요구하는 조세, 노력 동원, 공물 납부 등 ( '· |· ()은 계속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 ‘경제적 갈등’은 주로 신분계급제도의 상속 유지에 의하여 국가 권력을 왕족 양반족이 독점하고, 주로 조세, 노력 동원, 공물 납부 등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는가? 그렇지 못했는가? 하는데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양반 계급의 호족들은 국가에 내야 될 조세, 노력 동원, 공물 납부 등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서, 일반 서민들에게만 부당하게 부담을 지우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왕국 사회에서는 경국대전(��에 “천하막비왕토”(�[2` ?�라고 한바와 같이,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 즉 총유(�)이고 개인적 사유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누구나 어디에 가서라도 노는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을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농사를 지어먹고 사는 농민들의 경작권( �!)은 국가에 의해서 보호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제도가 일직엄치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토지란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동의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자와 가까운 사이에 있는 양반층이 불법적인 토지 사전화(��U)를 하는데서 사유화의 싹이 나왔습니다. ‘��U’란 사적 소유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유지 처럼 어떤 토지를 팔고, 사고, 상속해주고 하면서 경작 농민에게 불법 부당한 소작료 (�')를 받아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잠간 소개해 둘 것은 지금 우리들은 국가나 공공기관에 내는 물질을 ‘조세’( 'z)라고 하는데, 원래는 조( ')와 세(z)는 다른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z)는 나라님의 땅에서 농사를 지어먹고, 농민이 국가 운영에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국가에 바치는 수확물입니다. 그런데 조( ')는 국왕의 명에 따라 공무 일을 하는 관리들에게 국왕이 농민에게 세(z)를 받아서 녹봉을 주는 대신. 국왕이 일정한 땅을 정해주고(이것을 �' 갤�함) 그 관리로 하여금 국왕이 받을 세(z)를 관리가 대신 받아먹을 수 있게 만든 제도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국가의 벼슬을 하면, 국가가 정해준 토지 즉 수조지(�' �에서 녹봉(� 대신으로 도조(�')를 받아먹고, 그 자리를 고만두거나 죽으면 마땅히 수조지(�' �는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조지에서 조를 받아먹어도 그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의 ‘경작권’은 철저히 보호되었습니다. 어떤 관리 양반이 그 땅에서 국가에 내던 세를 대신 ‘조’로 받아먹게 되었어도 농민의 ‘경작권’은 감히 침해할 수 없었습니다. 경국대전에 보면 함부로 경작권을 침해했을 경우에는 곤장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행정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어떤 사람이 벼슬을 고만 뒀거나, 죽었을 경우에 마땅히 그 수조지는 국가에 반납해야 되는 것인데 그것을 반납하지 않고, 그 자손이 ‘조’를 계속 받아먹거나, 또 그 수조지를 다른 사람에게 매도해서 그 토지의 매수자가 ‘조’를 받아먹는 일, 즉 사전화(��U) 하는 풍습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왕국 후기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토지의 매매가 성행하게 되는데 ‘경작권’은 경작권대로 경작 농민들 간에 매매되고, ‘수조권’은 수조권대로 양반들 사이에서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시대에는 사회적 생산력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기 때문에 양반 지배계급은 노예를 시켜서 토지를 개간하고, 노예들의 노동으로 생산을 하는 농장(* .)을 만들어 노예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그 땅을 사전화(��U)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 사람들의 ‘경제적 갈등’은 주로 첫째, 국가 관료지배계급과 피지배 주민들 사이의 불법적인 ‘가렴주구’(苛v z�가 있었고, 둘째, 토지 사전화(��U)에 의한 ‘노예노동 수탈’과 ‘불법적 도조의 수탈’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이에 항거하는 백성들과 양반 사이에 사회적 갈등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전국 도처에서 일어난 민란()이며, 그 종합판이 ‘동학농민전쟁’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신분계급제도는 붕괴 폐지되었습니다.
[4]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의 경제적 갈등, 항일독립운동
조선왕국 말년에 전국 도처에서 ‘민란’이 나고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스스로 수습할 능력이 없는 조선 왕실은 청국군대의 지원을 요청했고, 청국 군인이 출병하자 또 대륙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 군인이 출병을 해서 ‘청일전쟁’을 하고 일본군이 승리하자 조선 주민들의 민란과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의 무력에 의해 평정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조선총동부가 맨 먼저 착수한 사업은 “조선토지조사사업”이었습니다. 1912년 ‘조선토지조사령’을 공포하고, 이어서 조선 ‘부동산등기령’ 등을 발표하여 모든 토지에 대해서 주민들에게 각기 자기 토지를 신고하라고 하라고 공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법을 잘 모르는 주민들이 신고를 누락한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의 토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총독부의 토지가 된 땅은 전국토의 40%를 넘었습니다. 더구나 조선왕국 하에서는 ‘천하막비왕토’였으니, 특정 궁방토(J� 등을 제외한 모든 왕토는 조선총독부 소유의 토지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된 것은 주민들이 “이 땅은 내 땅이오.” 하고 신고를 했는데, 그 토지 중에서 절반 이상의 많은 땅에는 주인이 2명 이상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시대의 수조지(�' �는 경작농민의 경작권과 수조권자의 도조 받을 권리가 2중으로 행사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작자와 수조권자가 각기 “그 땅은 내 땅이요” 하고 신고했던 것입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소유권제도를 마드는 과정에서 이런 토지 소유권 분쟁을 놓고 영리한 식민통치술의 재주를 부렸습니다. 즉 수조권자와 경작권자가 각기 자기 토지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의 전략으로 전조선 각지에서 말께나 하고 글께나 한다는 양반 후예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고, 수조권자를 토지소유자로 인정하고, 경작농민의 경작권은 무시하여 소작인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에서 친일파를 기르는 첫 단추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가지고 있던 조선의 양반 후예들은 일제 총독부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당당한 토지사유권자가 되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조치를 저극 지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토지 사유권을 인정받게 되자, 지주들은 멋대로 경작권을 떼서 소작인을 바꾸기도 하고 소작료를 잘 안내면 차압으로 강제 징수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지주들에게 토지 사유화조치는 매우 유리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니 이들 양반후예 지주들이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따라서 신분계급제도가 폐지된 일제하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갈등은 첫째, 기본적으로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형성된 토지 소유권자가 된 조선총독부와 + 수조권을 가지고 있던 양반 후예 지주들을 한편으로 하고, 자기의 경작권을 소유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 권리도 없는 소작인으로 전락한 경작농민들 사이의 갈등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교환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지주들은 소작료를 받아 취득하게 된 곡물을 팔아 자본가 노릇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 투하로 기업이 설립되자 기업주는 노동자, 사무원 등 종업원을 채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주들은 자본가로 된 반면, 수확물의 절반이라는 가혹한 소작료 때문에 농사를 짓기 어려운 소작농들은 임금노동자가 되어 공장으로 갑니다. 그 결과 과거의 수조권자들은 종업원들을 고용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 즉 자본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둘째의 사회적 갈등은 자본가와 종업원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1940년 토지소유 상황
총경지: 450만정보, 소작지: 260만정보, 총경지의 57.8%가 소작지 일본인지주의 토지: 15.6%, 조선인지주 지주의 토지: 84.4%,였습니다. 그러나 일제하의 미곡생산은 1910년 100백만석 ---->1940년 210백만석으로 증산되고, 조선인구 1910년 :1331만명 ---->1942년 2636만명으로 증가합니다. 또 1942년 직업별인구 2,634만명의 농업1(66.2%),수산업(2.0%) ----= 농림어업(68.2%) 광업(2.1%)공업(5.0%) ----= 광공업(7.1%) 상업(7.3%)교통(1.5%)공무자유업(4.9%)기타(8.9%) 등 ----=서비스업(22.6%) 무직(2.2)%
이에 따라서 과건 봉건시대에는 토지 소유가 주요 생산수단이었던데 비하여, 자본주의가 발달한 일제 식민지시대에는 토지와 자본, 이 두 가지가 모두 주요한 생산수단으로 되었고 농민들의 생활은 토지개량, 수리사업, 비료 사용 등 영농방법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씩 향상됩니다.
그리고 지주들은 192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친일파로 되어 일부는 자본가로 변신했고, 당시 주민의 80% 이상을 차지했던 농민들 중 토지 없는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노동자로 변신하거나 만주 등지로 이주하여 살길을 찾습니다. 즉 토지가 없어 고향을 떠난 농민들과 소작농 그리고 노동자들은 항일 독립운동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 시대 주요한 사회적 갈등”은 첫째, 토지 소유자인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조선인 지주를 한편으로 하고, 이들에 대항하는 편에 경작자인 소작인들과 일부 자작농들 사이의 갈등과, 둘째, 일본인 자본가 및 친일 조선인 자본가와 조선인 노동자들 간의 갈등관계라는 두 가지 형태로 변화했습니다. 요약하면 이 두 가지는 모두 생산수단 소유자와 생산수단 소유에서 소외된 무산자들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농민,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항일운동과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운동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일제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민족 구성원들의 경제적 갈등은 조선총독부 덕택으로 생산수단인 토지 및 자본의 사유자로 된 사람들이 ‘우익’이 되었고, 토지와 자본이라는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소외된 다수 농민, 노동자 그리고 외국에 가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좌익으로 갈라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1930년대 특히 후반부로 오면서 조선 총독부 산하의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한 사람들 속에는 소위 민족주의적 우익인사는 볼 수 없었습니다. 모두 좌익 인사들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제 식민지하 한국에서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제대로 된 민족자본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제 식민지하에서 우리 민족은 좌우 분열의 물질적 토대가 크게 형성된 조건하에서 남에는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하는 미국이, 북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소련이 남북분할 진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5]분단시대 남한 사회의 경제적 갈등
1945년 8.15 일본 제국은 미·영·소·중 등 연합군과의 전쟁에 패하여 항복을 하고 조선에서 물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일제 식민지 시대에 친일파가 되어 일본을 위해 지원병과 징용에 나가라, 일본 군인들을 위해서 정신대(위안부)로 나가라 하며 독려하고 다니던 친일파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갈 수도 없소 쥐구멍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제하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노동자, 농민, 독립투사들은 모두 예 운형 박 헌영 등 지도자들을 따라 건국준비위원회, 남로당 등에 가입해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미·소에 의하여 38선을 경계로 남북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박 헌영 남로당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는 대한임시정부 계통 사람들과 예 운형 등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반대” 등 주장은 배척하고, 미국에서 귀국한 이 승만과 일제시대의 친일 지주,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이 협력해서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쳐 대한민국이라는 자본주의 분단국가 수립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지난 65년간 대한민국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했습니다. 지난 65년간의 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자본” 축적이었습니다. 자본축적의 결과로 과학 기술 문명의 결과를 급격히 생산에 도입하게 되어 사회적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총생산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취업구조도 크게 변화했습니다. 즉 근대화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국민총소득은 1957년 1971억원 -->1980년 3조6672억원-->2001년 543조8746억원 170억& -->1980년 603억$ -->2001년 4,213$
산업별 취업자 구조는 1965년 1984년 농림어업 500만명 (58,6%) --> 391만명 (26.7%) 광공업 88만명 (10.3%) --> 369만명 (25.2%) 기타서비스업 264만명 (30.9%) --> 702만명 (48.0%) 1994년 농림어업 284만명 (14.7%) ----> 2001년 219만명 (10.3%) 광공업273만명 (24,5%) --> 421만명 (19.8%) 기타서비스업(1175만명 (60.8%) -->1,495만명 (69.9%)
이와 같은 자본축적과 산업화를 진행하는데 이 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공로가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제시대의 지주 자본가들 출신인 ‘한민당’의 지지를 받았는데,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미국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미국산 농산물을 ‘다다익선’(KK �.)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한국시장에 팔아서, 한미경제협력위원회(USOM)의 결정에 의해서 국방비도 쓰고, 경제 개발비로도 썼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조선총독부가 갖고 있다 8.15후 ‘귀속재산’이 된 토지와 기업들을 하나씩 하나씩 일제시대의 조선인 지주들에게 불하해 주었습니다. 즉 한국인 자본가들을 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재벌이 된 몇몇 사람들은 이승만의 덕으로 자본축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다음, ‘새마을운동’으로 길 딱고, 지붕 고치며,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든다며 농민들의 얼을 빼놓고, 저농산물가격 정책에 대해서는 농민들의 입을 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특별조치법’ 등으로 강압해서 저임금정책을 강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정부는 기업에는 수출보조금을 지불하고, 특혜융자를 해주면서 수출산업 육성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로 수출의 급격한 성장을 달성했고, 그 후 그것이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미국은 군사 경제적 원조 뿐 아니라 한국의 주요한 상품시장이 되어 주었습니다. 뒤이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은 물론이고, 지금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 까지 수출 위주의 산업육성과 경제성장정책은 끈질기게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로 자본 축적과 새 기술의 도입, 개발 촉진은 ‘과학기술력’에서 세계 7위로 되도록 사회적 생산력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은 수출액 세계 제9위, 그리고 국민소득 세계10위의 선진국이 되었으며, 국방력에서도 현역병 수 세계5위, 국방력 종합 세계8위, 정보력, 교육력 각각 11위의 선진 강국이 되었습니다. 2008년 현재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91.7%로 상승한 소위 수출 강국이 되었습니다. 각종 스포츠나 예술활동에서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것도, 각종과학기술 수준이 높아진 것도 이런 경제성장의 결과로 재벌 기업들이 그들을 후원하고 과학기수인력에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자가용을 굴리고 있습니다. 2009년 말 조사에 의하면 승용차의 77,7%는 혼자서 타고 다니는 자동차인데, 특히 강남에서는 한집에 자동차가 몇 대씩을 굴리고 있어서 강남권에서는 85.7%가 ‘나홀로차’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지금 프랑스 이탤리 등 외국에서 생수 물을 사다먹는 사람들이 2000년 당시에는 1393톤 64만$ 어치였는데, 2009년에는 7391톤 531만$였다고 합니다.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옛날 생각하면 얼마나 잘 살게 된 것입니까? 그리고 이승만을 비롯한 박정희, 전두화, 노태우, 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들이 비록 조봉암, 조용수, 인혁당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이기는 했지만, 경제성장을 촉진해서 이렇게 잘 살게 하는 데는 공로가 있다는 데 이의가 있으십니까? 그리고 이런 남한 정권을 군사 경제 원조와 시장 개방으로 후원하여 이를 뒷받침한 미국의 공로 또한 부인할 수없는 사실 아닙니까? 이것이 일제식민지 시대 일제의 조선총독부 정책에 의하여 형성된 친일 조선인 지주 자본가가 8.15 후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한정권의 역대 대통령들이 그들을 적극 지원한 결과로 그들이 다시 친미 지주 자본가로 변신한 경위임입니다. 자본은 맑스의 주장대로 단순하게 노동력(잉여가치)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고, 그 결과 보다 많은 재화를 산출하게 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이윤을 획득하고 또 자본가가 아닌 근로자들에게도 먹을 몫이 생깁니다. 즉 자본이란 발달된 기계와 기술을 연구 개발하게 하고, 그것은 생산성을 향상시켜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로 절약하게 합니다. 노동시간은 짧아지고 과실은 많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사회주의 국가였던 러시아, 동구, 중국, 심지어 북조선까지도 지금은 어떻게 하면 외국의 자본을 더 많이 유치할까 서로 경쟁을 있는 것 아닙니까? 자본축적은 과학기술문명의 원동력입니다. 그 과학 기술을 생산에 적용해서 땀을 조금 흘리고 적은 시간 일을 해도 많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현재 남한 사회에서는 해마다 자살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2008년 현재 자살자수가 인구 10만명당 26%인 12,858명에 이르렀고, 특히 2,30대의 청년 자살율이 최근에 급증했다고 합니다. 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9년10월22일 발표한 바에 의하면 국가 행복지수는 O.E.C.D 30개 국가 중 종합순위에서 25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경제가 발달한 세상이 됐는데도 무엇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높은 자살율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6] 경제적 갈등 해소의 길을 찾아서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고도성장 결과로 현재 한국사회는 생산수단인 토지 및 자본이라는 자산 소유관계에서 지극히 불평등한 양극화가 성립했다는 사실입니다. 2005년 현재 한국의 토지는 전국민의 1%에 불과한 돈 많은 부자들이 전국 토지의 51.5%를 소유하고 있으며, 5% 미만의 부자들이 82.7%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주주택을 제외한 부동산 자산은 상위 10%의 부자들이 84.27%를 소유하고 있으며, 은행 예금 및 채권 증권 등 금융자산은 상위 5%의 부자가 50.1%를, 상위 10%가 66.46%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0년 현재 부익부의 통계는 훨씬 더 진행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재산은 자식에게 상속됩니다. 그래서 조선일보에는 “개천에서 용나던 ‘신화’는 끝”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는데(조선일보,2009.7.22) 사교육비를 많이 들이는 강남권 학생듫이 수능성적이 크게 우수하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일류대학은 대부분 그들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그리고 수능성적 최상위권 학생중 40% 가량이 재수생이고, 사교육 때문에 우리나라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취침시간은 스위스의 어린들 보다 1시간 정도가 짧다고 합니다. 치열한 자본주의적 경쟁 속에서 가난한 집 어린이들은 과외도 재수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과거 조선왕국 시대의 신분계급제와는 달리 “소유재산” 정도에 의한 새로운 계급제도가 성립하고, 이것이 대물림 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점은 앞서 말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발표에서 한국의 ‘사회형평성’은 30개 국가 중에서 27위였다는 점에서도 분명합니다. 둘째의 문제는 수출 증대와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자본가들이 운영하는 기업은 ‘이윤’ 추구가 목적입니다. 이윤을 극대화하려면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인건비를 주리기 위해 각종 최신 전자 기술들을 도입해서 고용인원수를 주리고, 종업원들의 임금은 될수록 올리지 말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2009년 11월 현재 사실상의 실업자 수는 330만명이라고 합니다. (경향2010.1.7)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취업비율은 2009년 정규직 48.3%, 비정규직 26.2% 뿐입니다. 애써 등록금 마련해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살 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될까요? 백년전 서구에서는 생산수단인 토지와 자본의 소유관계를 이렇게 불평등한 사유 재산제를 폐지하고 사회적 소유제로 바꾸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와서 사회주의 사상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널리 퍼져서 소련과 동구 제국에서는 실제로 사회주의 혁명을 해서 운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관료주의적 폐단이 나타나 사회적 생산력 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되자 이제는 모두 국유재산제를 다시 사유재산제로 바꾸게 된 게 현실입니다. 다만 독일을 비롯한 구라파 제국에서는 사유재산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육, 의료, 실업문제, 복지문제 등 광범한 범위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여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제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것을 ‘수정자본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 ‘복지사회주의’라고 합니다. 우리도 구라파 나라들의 ‘민주사회주의’ 제도를 도입하자면 소득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서 사회복지사업을 확장해야 되지만, 현재 정부는 노무현대통령이 사회복지비를 좀 늘린 것을 가지고 좌파라고하고, 비즈니스프렌드리라며 종합부동산세를 감면해주는 쪽으로 갔습니다. 여러분 현재 남한 사회사회의 경제적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정치적으로 국회와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어야 또는 대통령이나 국회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질문은 정치를 넘어서 여러분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여러분이 다수당을 차지했다고 치고, 무엇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말씀입니다. 즉 과거 신분계급제도와 달리 새로운 재산계급제도가 생겼고, 우리 자손들은 그 속에 죽지 못해 살게 되었는데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말씀입니다. 저는 자본주의제도의 문제를 해결하자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절대화한 채 그것을 상속하면서고, 사회복지비나 늘리는 제도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국유화를 해서 사회주의를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되, 공동상속에 의하여 부의 세습화를 막아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사회갈등문제는 분명히 절대적 빈곤을 넘은 문명사적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2009년말 현재 남한에 이주하고 있는 외국인수가 117만 명인데, 이들의 대부분은 취업을 위해 외국에서 입국했거나, 아니면 농촌 총각과 결혼을 해서 입국해 있는 경우입니다. 300만 명을 넘는다는 한국인 실업자들이 악착같이 저임금 불사하고, 무슨 일이나 취업을 한다면 외국인 저임금 노동자가 이렇게 많이 들어올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여성들이 농촌에서 일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면, 농촌 처녀가 없어서 결혼을 못하는 총각들이 베트남 처녀를 구해오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인들의 출산율이 1.2명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라는 사실도 절대적 빈곤을 넘어선 한국인들 특히 여성들의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 한국 여성들이 집에서 가족을 위한 애써 음식 만들기를 실어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외식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음식점 수가 인구 1,000명당 12.2개 점포로, 미국 1,000명당 1.8개의 음식점수에 비해 6.8배를 이루는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현재 남한에 실업자가 많다고 하지만, 현재 남한 사회의 경제적 갈등 문제는 절대적 빈곤의 문제는 결코 아니고, 상대적 빈곤의 문제입니다. 내가 매일 아침 집 밖에 나가보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옷가지들을 버릴 수 있습니까? 특히 여성들의 옷이 많더군요. 옷뿐입니까? 장롱, 쏘파, 옷장, 등 갖가지 가구류들이 버려지는데 내가 그것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왜 그것을 버렸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 생산력이 향상되어 살기가 편해지니까 새록새록 유행을 따라 살자니까, 구형은 버리고 최신형으로 바꾸기 위해 버린 것들입니다. 나는 먹을거리가 없어서 남의 밭에서 과일을 따먹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쓸 수 있는 물건을 서슴없이 버리고 새 것을 사들이며 물질을 낭비하는 사람이야 말로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지구촌 밀림에서 나무들은 마구 잘리고, 각종 자연 자원은 고갈해가고, 지구의 온난화, 공기의 오염, 생태계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자연은 결코 인간들의 문명에 의하여 정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생명의 어머니입니다. 나는 현재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북조선을 포함해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모든 가난한 민중들이 저마다 미국 부자들처럼 풍요한 물질을 소모하게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이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북통일 된 우리나라도 남북의 모든 주민들이 강남 부자들처럼 풍부한 물질을 소모하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통일의 길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오늘 남한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경제적 갈등문제는 결코 상대적 빈곤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문명사적 반성을 요구하는 대자연과 문명사회의 갈등문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7] 경제적 갈등과 인간의 욕심
수천년 인류의 문명사는 두 바퀴로 정신없이 굴러왔습니다. 한 바퀴는 자연을 정복대상으로 한 도구의 개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바퀴는 자기가 속하지 않은 다른 인간집단을 정복대상으로 한 무기의 개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서양문명’이라고 하는 ‘지중해문화’는 특히 과학기술의 개발을 통해서 문명사의 수례바퀴를 정신없이 돌려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인류문명은 막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 있는 자에게는 막장이 보일 것이고, 눈 먼 자는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나는 앞에서 한 사회의 경제적 갈등은 “사람들의 욕심”이 충돌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언급한바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이 “욕심을 버리라”고 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기독교로 오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내가 중학생시절에 태고사(조계사)에 열심히 나가다가 “욕심을 버리라”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은 욕심이 있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은 “참된 삶의 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불교를 떠나서, 당시 Y.M.C.A에서 있었던 함석헌 선생님의 ‘무교회주의자’ 강의를 계기로 기독교 교회에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73세가 넘은 2003년 까지 세례를 받지 않고, 그저 교회에 나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2003년 향린교회에서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지금도 기독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향린교회가 ‘이웃 사랑’ ‘형제사랑’을 열심히 강조하는 점은 역지사지( \ ���하는 마음 인( �과 서()를 강조하신 공자님이 뜻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신 말씀이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람들의 ‘욕심을 절제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별로 듣기가 어려웠다는 아쉬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나는 묵자의 “겸애(兼� 절용( ��” 사상이 “참된 삶의 길”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존중합니다. 그런데 내가 성경을 많이 공부하지 못한 까닭인지,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절용( ��”에 관한 가르침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무한한 인간의 욕심을 절용( ��할 줄 모르면 자연은 정복대상으로만 생각되고, 드디어는 자연과 사람은 함께 파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류 문명은 인간의 무한한 욕심을 추구하기 위해 수 천년 동안 ‘도구’의 개발을 추구하는 ‘액새레이터’를 밟으며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욕심을 잡는 절욕( �o)의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는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욕심을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욕심의 ‘브레이크’를 잡을 줄 알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나는 지금도 구약성경의 창세기(3:17-19)에서 사람이 ‘땀’흘려 일하게 된 것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죄악의 결과인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을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지 ‘땀’흘리는 것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고 ‘땀’을 안 흘리려고 온갖 과학기술문명을 개발하여 자연을 정복하려 한 것은 “참된 삶의 길”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중해문화는 인도와 중국 등 동양문화에서 교훈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인도문화, 중국문화, 그리고 지중해문화를 모두 흡수하면서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착한 백성입니다. 나는 우리가 21세기에 이룩해야 할 민족통일은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 아니 모든 생명들이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새 세상을 만드는 세계사적 사명을 다하는 일과 직결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기탄없는 비판을 바랍니다.
긴 시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