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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영남알프스 – 능동산,천황산,재약산
1. (천황산 정상에서 바라본) 운문산과 가지산(오른쪽)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 유안진, 「가을편지」
▶ 산행일시 : 2026년 10월 10일(토), 금요일 출발 무박산행, 맑음
▶ 산행코스 : 배내고개,능동산,능동2봉,영남알프스 하늘정원,샘물상회,천황산,천황재,재약산,사자평,
철구소 갈림길,용주사,철구소,장안사,파래소골,태봉교
▶ 산행거리 : 도상 18.0km
▶ 산행시간 : 8시간 45분(04 : 04 ~ 12 : 49)
▶ 교 통 편 : 다음매일산악회(20명) 버스 이용
▶ 구간별 시간
23 : 40 – 양재역 1번 출구 200m 전 스타벅스 앞
02 : 26 – 칠곡휴게소( ~ 02 : 40)
04 : 04 – 배내고개 주차장, 산행시작
04 : 35 - ┣자 갈림길, 직진은 능동산 0.2km, 오른쪽은 석남터널 3.5km
04 : 40 – 능동산(陵洞山, △983m)
05 : 05 – 능동2봉
05 : 54 – 얼음골 케이블카 하늘정원, 1,041m봉, 휴식( ~ 06 : 34)
06 : 47 – 천황재 갈림길, 샘물상회
07 : 35 – 천황산(天皇山, 1,189m), 휴식( ~ 07 : 58)
08 : 22 – 천황재
08 : 54 – 재약산(載藥山, 1,108m)
09 : 32 – 임도, 사자평
10 : 03 – ┣자 죽전마을 갈림길
10 : 30 - ┫자 철구소 갈림길, 왼쪽 철구소 쪽으로 감
11 : 12 – 용주사
11 : 19 – 철구소
12 : 07 – 장안사
12 : 13 - 파래소골, 휴식( ~ 12 : 35)
12 : 49 – 태봉교, 산행종료, 버스 출발(14 : 00)
16 : 15 – 옥천휴게소( ~ 16 : 30)
18 : 15 – 양재역
2. 산행지도
오늘 산행 들머리인 배내고개로 가는 도중 한밤중에 칠곡휴게소를 들렀다. 물론 서울을 출발한 지 2시간 30분이 넘
었으니 용변을 보시라는 배려에서다. 남자화장실 벽면에 여러 수준 높은 글들이 적혀 있다. 굵고 힘찬 글씨다. 엷은
졸음이 확 깬다. 뮤지컬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들이다. 세 개만 골랐다.
If I’m the Phantom
it’s your hate that made me so.
If I’m to be save,
it’s because your love redeems me.
― Musical(Phantom of the Opera)
아무런 해설이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에 나오는 대사다.
“만약 내가 유령이라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신들의 증오입니다.
만약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사랑이 나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이 대사는 뮤지컬 대사가 아니라, 1925년 무성영화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에
서 론 체니(Lon Chaney)가 연기한 팬텀이 크리스틴에게 한 스크립트 대사라고 한다.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 Musical(See What I Wanna See)
이 대사는 뮤지컬 《돈키호테(Man of La Mancha)》에 나온다. 출전으로 Musical(See What I Wanna See)라
고 적혀 있는 것은 착오이다. 소설 《돈키호테》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주인공 돈키호테
(세르반테스)가 외치는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이다.
원어는 “Too much sanity may be madness — and maddest of all: to see life as it is, and not as it
should be!”이다.
Musical(See What I Wanna See, 2005)은 미국인인 마이클 존 라키우사(Michael John LaChiusa, 1962 ~ )가
작사, 작곡한 전혀 다른 현대 뮤지컬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라쇼몽 등)을 바탕으로 ‘진실이란 무엇인가’
를 다루는 다소 어둡고 심오한 작품이다.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
러시아의 세계적인 연출가이자 배우, 예술 이론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
1863~1938)가 남긴 유명한 격언이다.
원문은 “There are no small parts, only small actors.”이다. 위의 번역이 통용된다.
3. 영남알프스 하늘정원에서 바라본 여명, 오른쪽은 간월산과 신불산, 능선 너머는 문수산
4. 영남알프스 하늘정원에서 바라본 여명, 일출의 절정이다
6. 멀리 왼쪽은 청도 화악산
7. 아래는 산내면
오늘 산행은 영남알프스 7좌를 세 팀으로 나누어서 한다.
A팀은 운문산과 가지산을, B팀은 간월산과 신불산, 영축산을, C팀은 천황산과 재약산을 간다. 그런데 A팀은 아무
도 가지 않는다. C팀은 20명 중 나 혼자다. B팀은 19명이다. 그렇다고 내가 B팀에 붙을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천황산을 가려고 하는 이유는 전에 두 번 이맘때쯤 천황산 오르는 등로 주변에서 보았던 물매화를 다시 보기 위해서
다. 더하여 천황산과 재약산에서 첩첩 산의 조망이 그립고, 사자평의 풀꽃 길을 걷고 싶어서다.
배내고개. 해발 792m이다. 준령이다. 배내고개의 ‘배내’는 이 고개 남쪽에 있는 이천 마을의 ‘梨川’을 우리말로 옮
긴 것이다. 배내고개 너른 주차장이 휑하다. 우리 버스뿐이다. 모르긴 해도 오늘밤 한계령은 인산인해일 것이다.
다음매일산악회만 버스 여섯 대에 등산객들을 꼭꼭 채워서 갔다. 버스에 내려 하늘 한 번 우러른다. 별들이 초롱초
롱 빛난다. 내 여태 밤하늘이 저러한 줄 모르고 살고 있다니 한심한 생각이 든다.
헤드램프 밝히고 능동산을 향한다. 여기 오는 버스 안에서 우서대장님은 내 산행코스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은
하지 않았다. 나더러 가보셨죠? 하고 끝이었다. 배내고개에서 능동산을 오르기는 처음이다. 주차장을 지나 산자락
에 붙자 첫발자국부터 가파르게 오른다. 목재계단 길이다. 목재계단이 길기도 하다. 배내고개에서 능동산까지 거리
가 이정표에는 1.1km이다. 가다보면 다른 이정표에는 1.7km로 나오기도 한다. 맨땅인 흙길은 0.1km나 될까.
줄곧 오르막이 거의 목재계단이다.
적막하기 산중이다. 단체산행에서 나 혼자 밤에 먼 데 산길을 가는 건 또 처음이다. 오붓하다. 이따금 어둠속 풀숲에
서 새가 푸드덕하고 날아간다. 아마 내 발걸음소리에 잠을 깬 모양이다. 미안하다. 스틱 짚는 소리 죽이고 살금살금
걷는다. 하늘 가린 숲길이기도 하여 고개 들어도 내내 별을 볼 수 없다. 무료하여 고개 돌려 풀숲을 헤드램프로 비추
어보면 흐드러지게 벚꽃처럼 꽃을 피운 나무가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싸리나무 잎사귀다. 불빛이 반사되어 그렇
게 보인다.
산행시작한 지 30분 정도 걸려 ┣자 갈림길에 올라선다. 오른쪽 계단 내리막은 낙동정맥 가지산으로 간다. 능동산
0.2km. 한 피치 가파르고 오르면 능동산 정상이다. 공터 커다란 돌탑 옆에 오석의 정상 표지석이 있다. 삼각점은
‘언양 312, 1982 재설’이다. 2017.8,23,자 월간산에 따르면 능동산(陵洞山) 산 이름은 모양새가 마치 큰 왕릉과 같
이 둥글넓적하고 펑퍼짐하여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또한 능동산을 한자대로 풀어 본다면 ‘큰 무덤’이라기
보다는 ‘큰 언덕’처럼 산의 긴 능선에서 비롯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천황산에서 바라보면 과연 그러하다.
능동산 정상은 전에도 그랬듯이 사방에 울창한 나무숲이 둘러 아무런 조망이 없다. 곧장 서진하여 내린다. 뚝뚝 떨
어진다. 도중에 길을 잘 살폈더라면 능선 길을 좀 더 갔을 텐데, 계단이 나오고 의심 없이 내렸더니 쇠점골 약수터
다. 약수터 표지판에 쓰인 글을 얼핏 보고 임도에 내려선다. 다음은 약수터 표지판에 쓰인 글이다.
쇠점골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는 길손이여!
사랑하나 풀어 던진 약수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
(…)
8. 아래는 산내면
9. 물매화
12. 왼쪽이 운문산
13. 멀리 가운데가 화악산
14. 아래는 산내면
15. 가지산, 그 앞은 백운산
16. 왼쪽부터 억산, 억산, 범봉, 운문산
임도는 잔자갈이 깔렸다. 도리어 걷기에 불편하다. 길섶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만발하였다. 이들은 아무도 보지
않을 밤에도 화사하게 피었다. 임도를 계속 따라가도 되지만 따분하여 오른쪽 능선을 가자 하고 그리로 가는 길이
있는지 살핀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능선 야트막한 안부를 지나고 오른쪽 능선 진입로에 뭇 산행표지기가 안내한
다. 곧 숲속 오르막이다. 고개 돌려 좌우사면을 훑어보면 헤드램프 불빛 닿는 데마다 길로 보이니 아무쪼록 자세 바
르게 하고 일로 직등한다.
능동2봉. 아담한 오석의 정상 표지석이 있다. 평평한 주변은 키 넘는 억새밭이다. 억새는 이제 꽃이 피기 시작했다.
억새 숲을 헤쳐 나아간다. 얼마 안 가 억새 숲 벗어나고 완만한 긴 내리막이다. 다시 임도다. 이번에는 상당한 거리
를 임도로 간다. 임도가 능선으로 났다. 임도를 야광등이 안내한다. 야광등이랬자 헤드램프 비추면 빛이 나는 반짝
이 종이이다. 임도가 능선을 돌아오를 무렵 능선으로 난 길이 있을까 헤드램프 앞세우고 두리번거린다.
왼쪽의 토끼봉(1,017m) 갈림길을 지나고 임도는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한 번은 오른쪽 사면에 잘난 길이 보이기에
냉큼 따랐더니 잘 다듬은 무덤이 나오고 그 위쪽은 잡목 숲이 우거졌다. 되돌아간다. 얼음골 케이블카 종점으로
가는 등로가 지도에는 분명해도 실지는 흐릿하다. 반갑다. 이내 케이블카 종점에 올라선다. 여기부터가 ‘영남알프스
하늘정원’이다. 케이블카 종점 광장에 놓인 수십 개의 탁자가 썰렁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차다.
일출은 아직 멀었다. 하늘정원의 중심인 1,041m봉을 향한다. 데크계단 길이다. 그 중간에 바람막이 사면을 등진
간이 전망대가 있다. 배낭 벗어놓고 휴식한다. 오늘 일출시간은 06시 30분경이다. 지금시간 06시다. 그때까지 기다
릴 요량이다. 아침밥 대용인 인절미를 안주로 탁주 독작하며 한기를 달랜다. 배내봉 너머가 부상(扶桑)이다. 동녘은
붉은 기운이 점점 진해진다. 그러나 일출시간이 지나도 구름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는다. 글렀다.
1,041m봉을 오른다. 산정 정원이다. 산내면을 둘러싼 준봉들을 관람한다. 멀리는 청도 화악산과 남산, 그 앞으로
구만산, 억산, 범봉, 운문산,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건너편이 정각산, 미륵봉, 정승봉 등등이다. 천황산을 향한다.
데크계단이 아니어도 길 좋다. 내 나름으로 오늘 산행의 첫 번째 미션인 물매화를 볼 수 있을, 그 위수지역에 들어섰
다고 판단하고 등로 주변의 풀숲을 샅샅이 훑어본다. 여기저기서 환한 얼굴을 내미는 구절초와 쑥부쟁이에게는
미안스럽기 짝이 없다.
천황재 임도 갈림길인 개활지에 내려선다. 예전에 샘물상회가 이 근처인데 방향표시판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던가
저기던가, 작년과 재작년에 물매화를 보았던 장소가 오락가락한다. 내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만 지고 말았을
까? 천황재 쪽으로도 가본다. 아, 딱 한 개체가 등로 옆 풀숲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매화는 대개
군락으로 자란다고 하니 더 있지 않을까 싶어 주변 풀숲을 몇 번이나 훑었으나 더는 보이지 않는다.
물매화(Parnassia palustris L.). 숙근성 여러해살이풀이다. 산록 양지쪽 습지에서 자란다. 부식질이 많은 점질양
토에서 잘 자란다. 고산식물로 충분한 햇빛을 필요로 하며, 노지에서 월동 생육한다. 고온은 싫어한다.
물매화의 속명 파르나시아(Parnassia)는 그리스 신화의 파르나소산(2,457m)에서 유래했는데, 파르나소스산은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과 예술의 신 아폴론과 학문 · 예술을 관장하는 뮤즈(Muses)들이 살던 신성한 산이라고 한다.
1세기 고대 그리스의 의사이자 박물학자인 디오스코리데스(Pedanius Dioscorides)가 이 산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약초를 고대 그리스어로 ‘파르나소스의 풀(Agrostis en Parnasso)’이라고 기록한 것에서 비롯한다. 종소명 팔루스
트리스(palustris)는 ‘습지에서 자라는’ 뜻의 라틴어 paluster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말 물매화는 산기슭의 습지, 물가 등지에서 자라는 매화를 닮은 풀이라는 의미이다. 일본명 우메바치소우(ウメ
バチソウ, 梅鉢草)는 일본의 전통 문양인 우메바치(梅鉢) 문양을 닮은 풀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영어명
은 Marsh grass-of-parnassus이다. 직역하면 ‘파르나소스산의 늪지 풀’이라는 뜻이다.
17. 멀리 가운데는 운문산, 일렁이는 억새도 보기 좋았다
18. 멀리 가운데는 능동산, 그 앞은 능동2봉, 그 앞은 하늘정원, 그 오른쪽은 토끼봉
19. 가지산
20. 신불산, 오른쪽은 영축산
21. 천황산 정상 표지석
22. 멀리 왼쪽 도시는 밀양, 앞 왼쪽은 상투봉, 중간 가운데는 정각산
23. 앞 왼쪽은 향로산 연봉, 멀리 가운데는 금오산, 그 오른쪽은 천태산, 그 오른쪽은 만어산
24. 향로산, 그 앞은 사자바위
숲속 길을 오른다. 완만한 돌길을 조금 지나면 야자매트 깐 길이다. 누군가 ‘형제나무’라고 쓴 돌을 세워놓은 6지
반송으로 자란 소나무를 지난다. 숲속 길 오르기 심심하여 이웃한 능선을 오른 인적을 발견하고 쫓아간다. 일대 경
점인 암봉이다. 산내면을 두른 뭇 산들은 아침 햇빛이 천황산에 가려 어둡게 보인다. 되돌아 내려 등로에 들고 억새
숲길을 오른다. 아침 첫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일렁이는 억새 숲이 눈부시다.
천황산. 오늘은 내가 1착이다. 물론 내내 혼자였다. 그런데 두런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여러 명의 등산객들이
나타난다. 야영객들이다. 그들에게 오늘 일출은 별로 아름답지 않았지요? 라고 묻자, 그렇다고 한다. 내가 아까 본
일출과 똑같았다. 천황산 정상에 서면 사방 조망이 거침이 없다. 후련하다. 밀양과 청도 쪽의 산을 안내도와 대조하
여 짚어본다. 향로산, 금오산, 천태산, 구천산, 필봉, 만어산, 상투봉, 정각산, 용암봉, 구천산, 화악산 등등. 그런데
명색이 산꾼임을 자처하는 나로서 아직 가보지 않은 산이 태반이라서 부끄럽다. 젊었을 때는 저기를 다 올라야지
하고 희망에 부풀었는데…….
야영객들에게 혹시 물매화를 보셨느냐고 물었다. 어느 분은 모르는 꽃인데요 하고, 어느 분은 샘물상회 근처에서
본 적이 있다며 지금은 졌을 거라고 한다. 어제 오늘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재약산을 향한다. 계단 길이다. 천황산
정상 바로 아래 사자바위에 들러 방금 전에 본 첩첩 산을 더 가까이서 본다. 계단 길 1km 내려 천황재다. 키 큰 억새
평원이다. 여기서도 야영객들이 진을 치고 있다. 곧장 재약산을 향한다. 가파른 오르막 1km이다.
눈이 조금도 심심하지 않다. 기화이초를 볼 수 있을까 해서 주변 풀숲을 스크린 하며 간다. 바윗길도 지난다. ┫자
주암마을 갈림길 지나고 재약산 정상이다. 뾰쪽한 암봉이다. 산악인 김형수는 그의 『韓國400山行記』에서 천황산
을 재약산이라고 하고, 재약산을 촛대봉이라 하고 있다. 재약산(載藥山)은 이 산에 희귀한 약초가 많아서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정상 바로 아래 데크전망대 겸 쉼터가 있다. ‘야영금지’라는 표지판이 야영하시라는 말로
읽힌다.
배내골 건너 간월산과 신불산, 영축산은 해일처럼 밀려드는 운해를 막느라 무척 애쓴다. 이제 사자평을 향한다.
거기까지 1.5km이다. 그중 0.9km는 데크계단 내리막이이고 데크계단 끝나면 임도 0.6km이다. 데크계단 내리막
이 하늘 가린 숲속이라 아무 볼 것이 없다. 오랜 시간 긴 거리를 규칙적으로 발을 내딛으니 평지 걷기가 어색할 지경
이다. 죽전 마을에서 온다는 일단의 등산객들과 마주친다. 이 계단을 다 오르시려면 대단히 수고롭겠습니다 라고
수인사 건넨다. 그들을 보니 내 발걸음이 한결 편하다.
자갈길 임도로 내리고 사자평에 이르러서는 임도를 벗어나 데크로드로 올랐다가 야자매트를 깐 산책로를 간다. 꽃
길이다. 개쓴풀을 본다. 처음 보는 풀꽃이다. 개쓴풀(Swertia diluta var. tosaensis (Makino) H.Hara)은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 취약종이다. 속명 스웨르티아(Swertia)는 17세기 초 활약한 네덜란드의 정원사이자 식물 세밀화가
인 에마누엘 스웨르트(Emanuel Sweert, 1552~1612)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도 한 개채뿐이다.
이어 용담을 흔하게 본다. 그리고 온통 쑥부쟁이 세상이다.
사자평 가장자리 ┣자 갈림길과 만난다. 직진은 천황산(3.4km)으로 가고, 오른쪽은 죽전마을(2.3km)로 간다. 천황
산 쪽을 기웃거리다 마지못해 죽전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데크로드를 이슥하니 간다. 사면을 길게 돌고 828m
봉을 내린 능선 안부다. 전에 모르고 지나쳤던 ┫자 갈림길이 눈에 띈다. 죽전마을은 직진하여 능선을 더 가야 하지
만 왼쪽은 철구소 가는 길로 곧장 내리막이다. 철구소를 경유하여 죽전마을 가자면 먼 길을 돌아가는 셈이 된다.
25. 맨 앞은 상투봉, 천황산에서 서쪽 조망
26. 멀리 가운데 오른쪽은 청도 화악산, 중간 왼쪽은 정각산, 그 오른쪽 앞은 구천산
27. 운해가 해일처럼 몰려와 영축산을 삼키고 있다
28. 왼쪽은 신불산
29. 가지산
30. 멀리 가운데 도시는 밀양
31. 재약산 가는 길에 뒤돌아본 천황산
32. 재약산 정상 표지석
철구소가 생소하거니와 산행마감 14시까지는 시간이 넉넉하여 철구소 쪽으로 간다. 가파른 내리막이라 갈지자 어
지럽게 그리면서 내린다. 마른 계류를 건너갔다가 건너오고 산허리를 돌고 돈다. 너덜지대를 지나기도 한다. 오르막
못지않게 비지땀을 쏟는다. 마침내 단장천 오른쪽 임도에 내려서고야 허리 편다. 산모롱이 돌아 철구소 용주사다.
절집은 오른쪽 사면을 약간 올라야 한다. 배낭 벗어놓고 들른다. 적막한 절이다. 너른 마당 위쪽 돌탑 턱에서 무리지
어 핀 바위솔을 본다. 그 위가 대웅전이다.
이왕 왔으니 대웅전 주련과 바위솔을 담아간다.
주련은 《석문의범(釋門儀範)》에 수록된 입산게(入山揭)의 구절이라고 한다.
世尊當入雪山中 세존께서 옛날 설산에 들어가시어
一坐不知經六年 한 번 앉으매 여섯 해가 흐르는 것도 알지 못하셨네
因見明星云悟道 새벽녘 샛별을 보시고 마침내 도를 깨달으셨네
言詮消息遍三千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의 소식이 온 세상에 두루 가득하네
용주사를 나와 조금 더 내려가면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조망을 두른 절벽 아래 넓고 검푸른 소가 보인다. 대번에
철구소인 줄 알겠다. 출렁다리 건너면 철구소 입구다. 여름 한철 물놀이의 명소인 철구소가 지금은 폐장하였다.
철구소(鐵臼沼)라는 지명은 ‘소의 모양이 마치 절구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한다. 밀양의 호박소, 신불산의 파래소
와 더불어 ‘영남알프스 3대 소’로 꼽힌다고 한다. 철구소 주변이 번화하다. 카페, 음식점, 펜션 등등이 즐비하게 들어
섰다.
철구소를 나오면 배내고개를 오가는 차도다. 차도 왼쪽에는 인도를 별도로 내었다. 택시를 부르거나 군내버스를
기다리기보다는 단장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인도를 따라 내리는 것도 괜찮다. 이천마을에 이어 죽전마을 지나
고, 우리 일행들이 모이기로 하고 버스가 출발하는 태봉교를 100m 정도 남겨두고 단장천을 건너 파래소골로 간다.
농로를 간다. 농로 왼쪽 산자락에 장안사가 있다. 들른다. 아주 작은 절이다.
대웅전 주련은 한글로 썼다. 양쪽 끝 기둥의 주련이 눈길을 끈다.
삼일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요 三日修心千載寶
백년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 티끌이네 百年貪物一朝塵
“삼일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요”는 다른 절에서 보았던(중국 항주에서 공연하는 가무쇼 송성천고정(宋城千古
情)의 슬로건이라고 한다.) 주련 “나에게 하루를 주면 천 년을 돌려주겠다(給我一天還千年)”가 생각난다. 후자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파래골 계류 아담한 소에 다가가 점심밥 먹는다. 인절미와 빵이다. 남은 탁주도 마저 비운다.
물이 워낙 차서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간단히 씻는다.
태봉교. 시간이 많이 남았다. C팀 천황산, 재약산 코스의 공식 산행거리는 15.5km인데. 나는 철구소 쪽으로 돌아왔
고 장안사와 파래소골 초입을 들러 산행거리를 18km로 늘렸어도 그렇다. 버스는 14시 정각에 출발한다. 어째 산행
하다 만 기분이다. 서울 가는 길에 옥천휴게소에 들렀다. 이곳 남자화장실은 옥천 출신인 시인 정지용에 대해 자세
히 소개하고 그의 시 여러 편을 화장실 벽면에 전시하였다. 정지용의 시 ‘호수’는 호수 그림 액자에 써놓았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이문구의 문인기행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열린세상, 1994)에서 ‘박용래’ 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이문구의
구수한 말과 박용래 시인의 결곡한 성미가 재미있어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나는 저녁 어스름에 밀려 온종일 삶던 더위가 그음하려 하자 목척교 옆의 허름한 탁배기집으로 박시인을 불러 모
셨다. 내가 초면인 유씨 ㆍ 이씨를 인사시키자 박시인은 무슨 바람이 불어 옥천같이 빼어난 고장을 다 둘러보게 되
었더냐고 여간 기특해 마지않았다. 이에 힘입었는지 이씨는 시키지도 않은 옥천 지방의 산수(山水)를 자랑삼아 덧
거리하였다. 그러자 박시인은 대번에 이씨를 겨누어보며 ‘산 좋고 물 좋은 것은 어느 두메나 일반인데 시인이 고향
을 쳐들면서 어떻게 물경풍치(物景風致)만을 떠들 수 있는가. 그런 것은 관광객에게 맡기고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고을이 배출한 시인부터 기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바로잡아준 다음,
“내가 옥천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시인 정지용을 낳은 땅이기 때문이요.”
하면 찻잔을 들어 서운한 마음을 가시려고 하였다. 나와 유씨는 숙연히 고개를 숙일 때였다. 물정 모르는 이씨가
“그런 가요? 나는 정지용이 우리게 사람인 줄도 몰랐네…….”
하며 새퉁스런 소리로 두런거렸다. 박시인의 결곡한 성미를 알고 있던 내가 이제 큰일났구나 싶어 민망한 낯을 둘
데 없어 하던 순간이었다. 바람벽에 벼락치는 소리가 터지면서 박시인의 성난 음성이 귓전을 갈겼다.
“야, 이문구. 너 정말 한심하구나. 너는 이런 것밖에 친구가 읎네? 정지용이 제 고향 선배인 줄두 모르는 이런 무녀
리두 시인 명색이라구 하냥 댕기는겨? 이런 것두 사람이라구 마주앉어 술 마시네?”
박시인은 술잔을 벽에 던져 박살내고도 성이 안 풀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뒤미쳐 따라나가
다른 술집으로 모시고 공자왈 맹자왈 앞뒤를 누누이 변명했지만 그의 옹이진 마음은 저녁내 풀어지지 않았다.”
차제에 한번쯤은 고속도로휴게소 남자화장실 순례도 해봄직하다.
33. 향로산
34. 개쓴풀,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이다.
35. 등로까지 나와서 반기는 쑥부쟁이
36. 용담
38. 투구꽃
39. 용주사 바위솔
41. 철구소. 영남알프스 3대 소 중 하나이다.

첫댓글 세상에 그먼 곳에서 혼자다니셨군요. 억새가 만발한 모습이 보고싶네요^^
천황산이 신불산보다 인기가 덜 한가 봅니다.
혼자 가는 것도 오붓하니 좋더군요.
억새는 앞으로가 절정일 것 같습니다.
물매화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립스틱도 바르지 못하고 마중나왔네요.
화장실 벽도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멋진 철학 교실이네요. ㅎ
물매화를 좀 더 찾아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내년에는 미리 수소문하여 계획성 있게 갔다 와야겠습니다.
물매화 자태가 고귀하고 가지산 아래 영남알프스 영봉들이 한껏 가을을 품었습니다.
1무1박3일이면 영남알프스 7좌를 다 오를 수 있는데,
그렇게는 시간이 나지 않아 안타깝기는 합니다.
영남알프스의 억새 군락이 반겨줍니다.
먼 핑계로 안 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림으로나마 반갑게 맞이합니다.
하긴 너무 멉니다.
가고 오는 도로에 까는 시간이 산행시간을 웃도니.
그나마 날이 좋았기 망정이지, 날이 궂으면 억울합니다.
한편, 천황산에서의 산 첩첩 조망이 벌써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