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꽤나 아는 사람들은 별로 깊이 없는 사랑타령이라고 깍아내리지만 요즘 미국 스타들의 등용문인 아메리칸 아이돌을 보라 그곳에는 아직도 카펜터스노래가 살아있다.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이 카펜터스의 명곡들을 새롭게 해석한 음반 <내가 카펜터라면(If I Were A Carpenter)>을 냈을 때 록기고가 로저 캐틀린은 이렇게 썼다. “카펜터스에 대한 그들의 인사는 얼핏 70년대의 값싼 것(schlock)에 대한 희화화이며 또다른 비아냥조의 윙크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어 후배 록 뮤지션들이 듬뿍 경의를 표한 카펜터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카펜터스를 해석하는 데 있어 후배들이 보여준 '놀라운 자유'를 그 음반의 실질적인 성과로 기록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놀라운 것은 얼터너티브 록의 자유 정신이 아니라 카펜터스에 대한 본고장 비평계의 냉랭한 시각이다. 그들을 단칼에 '값싼 것'으로 후려치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그 시절 우리 팝송 팬들뿐 아니라 전세계 음악 청취자들의 가슴을 그토록 촉촉이 적셔준 슈퍼스타에 대한 대접치고는 잔인하기 짝이 없다.
팝 음악 관련 자료를 들추어 봐도 카펜터스에 대한 언급은 매우 간단하다. 70년대의 상업화된 팝 음악 시장을 대변한 인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롤링 스톤>지는 그들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end),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오스몬즈(Osmonds) 등과 함께 '눈물샘 솟게 하는' 'MOR(Middle Of the Road) 팝' 록의 굶주린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존재 정도로 규정하고 있다. 더러 등장하는, 아바(Abba)의 미국판이라는 해석은 그나마 호의적인 듯하지만 그 속에도 빈정거림은 묻어 있기는 매한가지다. 이러한 비평계의 홀대 뒤에는 이윤 동기와 스타 시스템이 지배하는 70년대 팝 시장(언제나 그렇긴 하지만)에 대한 비판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 때문에 단지 '귀에 솔솔 들어오는' 단순하고 편안한 노래를 바라는 사람들은 그러한 비평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평론가들 일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또한 바로 그 카펜터스 음악의 성격이다. 그들은 카펜터스의 음악이 너무 유순하고(bland) 건전하며(woholesome) 깨끗하다(clean-cut)는 점을 싫어한다. 그에 따라 그 음악은 기껏해야 오락일 수밖에 없으며 정신은 온데간데없다는 주장이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얘기라고나 할까. 카펜터스는 그들이 소속한 레코드 회사 A&M에 어느 아티스트보다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었다. 뒤에 경쟁자로 떠오른 캡틴 앤드 테닐(Captain And Tennile)도 그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측은 음악과 관련한 외부의 줄기찬 비판이 찜찜했던지 사무실에 리처드와 카렌 카펜터 남매의 포스터조차 걸기를 주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70년대 말 펑크(Punk)의 폭풍이 휘몰아칠 때 카펜터스에 대한 비판은 극에 달했다. 물론 엘튼 존(Elton Joh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퀸(Queen)을 위시해 펑크 집단의 난도질을 비껴 간 스타들은 없지만 카펜터스 또한 펑크 그룹들의 만만한 표적이었다.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클래시(Clash), 라몬즈(Ramones) 등 펑크 그룹들은 일제히 '고민 많고 일자리 없는 분노와 우리 젊은 세대에게 사랑 이별 타령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하며 카펜터스 등의 팝스타들을 향해 아우성을 쳤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1970년대 데뷔이래 순풍에 돛단 듯 거침없는 히트 항해를 해온 카펜터스가 신기하게도 그 시점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밀리언 셀러 싱글 퍼레이드는 1975년부터 뚝 멈추었고 1977년과 1978년에 발표된 곡들인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랑 노래(All you get from love is a love song)' '콜링 오큐펜츠 오브 인터플래니터리 크래프트(Calling occupants of interplanetary craft)' '달콤한 미소(Sweet sweet smile)'-모두 한 앨범 <패시지스(Passage)>의 수록곡-은 우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인기 차트 성적은 예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부진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카펜터스가 보여준 히트 행진은 가히 경탄할 만했다. 1970년대부터 1975년까지 차트 10위권에 진입한 싱글이 12곡이나 되었고 그중 10곡이 3위 안에 들었다. 넘버 원 싱글은 '네게 가까이(Close to you)' '세상의 꼭대기(Top of the world)' '안녕 우체부 아저씨(Please Mr. Postman)' 등 셋이었다. 3위권 이내의 곡은 또 모조리 밀리언 셀러 싱글이기도 했다.
사실 이같은 성공의 부분이 더욱 주목해야 할 대목일 것이다. 아무리 비평가의 호된 질책이 따랐을 지라도 그러한 폭발적 인기는 당시 대중들의 압도적인 협조가 아니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중의 반응을 먹고사는 팝가수라는 점뿐 아니라 슈퍼스타란 때로 긍정적인 발자취를 남긴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높이 사줄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선율적 감수성'은 최고급이었다. '내게 가까이' '우린 막 시작했어요(We've only just begun)' '슈퍼스타(Superstar)' '솔리테어(Solitaire)'와 같은 곡은 지금 들어도 격조 있는 멜로디의 흥취가 살아 숨쉰다. 물론 리처드 카펜터가 모두 쓴 곡은 아니지만 그가 만든 '세상의 꼭대기' '사랑이여 안녕(Goodbye to love)' '어제여 다시 한번(Yesterday once more)'도 수준이 처지지 않는다. 많은 비판을 받았던 카렌 카펜터의 보컬도 '옛 곡 해설'에 관한 한 알아줄 만한 실력이었다. 레온 러셀(Leon Rusell)의 '슈퍼스타', 비틀스의 '승차권(Ticket to ride)', 루비 앤 더 로맨틱스(Ruby And The Romantics)의 '서로 상처를 주며(Hurting each other)', 마블리츠(Maveletts)의 '안녕 우체부 아저씨' '비치우드(Beachwood 4-5789)' 등은 그녀의 탁월한 목소리의 소화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비평가들도 이 점만은 인정했다. '안녕 우체부 아저씨'를 리메이크해 부른 것도 실상 “카렌의 보이스가 '커버버전'에 능수 능란한 만큼 지나간 곡을 다시 부르는 방식을 자주 이용해야 한다”는 몇몇 비평가들의 충고에 따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적지 않은 뮤지션들과 음악 관계자들도 카펜터스를 존경했다. 그들은 카펜터스가 거물 기타리스트인 토니 펠루소(Tony Peluso)를 '사이드맨'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해 여러 부분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참된 자세를 보여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례로 펑크 록 그룹 소닉 유스(Sonic Youth)는 카펜터스를 존경한 나머지 1990년 발표 앨범 <구(Goo)>에 '카렌을 위한 노래 튜닉(Tunic-song for Karen)'이란 카펜터스에게 바치는 곡을 수록했으며 <내가 카펜터라면> 앨범에서도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유별나게 '슈퍼스타'를 불렀다(이 곡은 앨범에 참여한 록 그룹들이 서로 부르려고 다투어 로비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또한 '시간이 좀 걸릴 거야(It's going to take some time)'을 커버한 밴드 베티 세버트(Bettie Seveert)의 멤버 베렌드 더브는 심지어 자신의 침실에 카렌 카펜터 사당(祠堂)을 설치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앨범은 결코 카펜터스를 향한 조롱이 아니라 직, 간접적으로 영향받은 후배 뮤지션들의 선배에 대한 예우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9년 신시아 깁이 주연한 TV 영화 <카렌 카펜터 스토리>도 만들어지고 히트곡집 앨범 <어제 뿐(Only Yesterday)>이 발매되는 등 카펜터스의 부활은 계속되어 있다.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에 의한 <내가 카펜터라면>으로 그들은 또다시 재평가의 기회를 잡은 상태다. 그러나 찬사가 카펜터스가 아닌 그 앨범에 참여한 후배 록 그룹에 돌아가는 기미가 보여주듯 비평계의 시각은 쉽게 호전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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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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