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독립에 즈음하여 목표로 한 것은 반드시 민주주의는 아니었다─건국 당초부터 있었던 엘리트 대 민중의 구도 / 12/21(토) / 커리어 자폰
※ 본 기사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우노 시게노리)의 발췌입니다.
◇ 순수 민주주의와 공화정
이미 말했듯이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지주나 변호사 같은 지적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상층에 위치한 사람들이었고, 셰이즈의 반란과 같은 움직임에 대해서는 극히 경계적이었습니다. 이 반란은 가난한 농민 중심의 반란으로 독립 전쟁의 퇴역 군인 다니엘 셰이즈를 지도자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빈곤에 시달렸고, 채무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독립의 대의에 힘썼는데 자신들은 왜 이런 채무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런 불만이 그들을 세금과 부채 경감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솔론의 개혁 때 아테나이의 채무 노예 문제를 상기시키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이러한 민중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상층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나중에 언급했듯이 그들은 입법권 확대에 대해 경계적이었는데, 그 한 원인은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입법권이 거대한 힘을 갖는 것에 대한 불안에 있었습니다. 특히 각 주 정부에 의해 개인의 소유권이 침해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보다 강력한 연방정부 수립으로 그들을 뒷받침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입니다. 일례로 앞서 언급한 '더 페데라리스트'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10편에서는 순수 민주정(pure democracy)이 공화정(republic)과 대비되고 있습니다. 저자들(10편을 집필한 매디슨)에 따르면 순수 민주정은 시민이 직접 모여 정부를 운영하는 국가입니다.
이러한 국가에서는 사람들의 공통의 이익이나 감정이 협력과 단결을 만들어내지만, 반면 다수파에 의해 소수파의 이익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고대 도시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격렬한 당파 싸움도 일어나기 쉽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는 불안정하며 개인의 안전이나 재산권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공화정은 대표제를 도입한 정치 체제를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간접 민주주의를 통해 선택된 소수의 시민이 정부를 운영합니다. 그런 시민들은 국가의 진정한 이익, 즉 공공의 이익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순수한 민주정은 소국에 불과하지만 대표제를 도입한 공화정이라면 더 큰 국가에서도 실현 가능합니다. 이렇게 해서 '더 페데라리스트'의 저자들은 순수 민주정이 아니라 공화정이야말로 선택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권했습니다.
참고로 제10편에서는 소국 수준에서는 배제할 수 없는 파벌의 폐해를 연방정부에 의해 완화하는 것을 논하고 있는 점으로도 유명합니다. 인간 사회, 특히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파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소국 수준에서는 치명적이 되는데 반해 강대국, 특히 연방정부 하에서는 일정 정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방마다 유력한 파벌이 다르기 때문에 연방 차원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상쇄하고 결과적으로 공공의 이익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라고 매디슨은 주장합니다. 후대의 다원주의론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논의이지만, 순수 민주정을 부정하고 공화정을 옹호하는 맥락에서의 논의라는 점이 주목됩니다.
고대 로마에서도 언급했지만 공화정(republic)과 민주정(democracy)을 대비적으로 파악하는 전통이 있다면 독립기의 미국은 바로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엘리트)에 의해 공공의 이익을 지향하는 정치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통해 다수의 이익을 지향하는 정치를 대비하는 이분법은 현재 미국의 공화당(Republicans)과 민주당(Democrats)이라는 양대 정당의 명칭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미국의 독립을 지도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 대의제 민주주의가 상식이 되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상으로 삼은 것은 '높은 지성을 가진 유덕한 사람들'에 의한 공화국이었습니다. 인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에는 소극적이며, 이미 지적했듯이 상원의원은 주 의회에 의해 선출하기로 하고, 대통령을 뽑는데 있어서도 직접선거가 아닌 대통령선거인을 통한 간접선거를 채택했습니다(현재는 국민이 선거인을 뽑음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직접선거와 같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면, 미합중국이 그 건국으로부터 '민주주의의 나라'였다고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보가 필요할 것입니다. 확실히 미국 독립을 이끈 것은, 독립 선언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라는 이념이었습니다. 이 이념은 미국 역사를 통해 계속 작동한 드라이빙 포스(구동력)이며, 그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 포섭되게 됩니다.
하지만 건국 시점에는 흑인 노예가 존재하고 여성의 참정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또 '건국의 아버지'들은 인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 확대에 어디까지나 경계적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한 대표제였고, 입법권을 억제하기 위한 복잡한 삼권분립의 구조였습니다.
애초에 건국기 미국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특별히 적극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좋아했던 것은 오히려 공화정이나 공화국을 뜻하는 Republic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 독립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큰 출발점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주저하게 됩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역사를 쫓는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직접 참여를 통한 순수한 민주정은 소규모 사회에만 적합하고, 가능하다고 해도 불안정함을 면치 못한다는 이미지를 확립한 것이 건국의 아버지인 '더 페데라리스트'의 저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 유력한 기원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대표제를 동반한 공화국이 강대국에도 적응 가능한 데다 계파의 폐해를 제거하는 데도 탁월하다는 정치학의 상식을 세운 것도 그들의 영향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대의제 민주주의야말로 근대의 영역 국가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민주주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습니다. (계속됨)
미국 독립 지도자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민주주의가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관으로 간주되는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견한 프랑스 귀족들이 본 것은 중앙정부와는 다른 곳에 있는 일반인들의 의식이었다. (제3회에 이어)
Shigeki Uno
https://news.yahoo.co.jp/articles/10eaef38bcf78ec6beea69a34d01c7845933b183?page=1
米国が独立にあたり目指したのは必ずしも民主主義ではなかった─建国当初からあったエリート対民衆の構図
12/21(土) 12:00配信
クーリエ・ジャポン
米国では建国当初から、エリートと民衆のバランスが重要な課題とされた Photo: Getty Images
※本記事は『民主主義とは何か』(宇野重規)の抜粋です。
【動画】著者の宇野重規による講義「民主主義入門」
純粋民主主義と共和政
すでに述べたように、「建国の父」たちは大地主や、弁護士といった知的職業に就く人々がほとんどでした。彼らは、植民地の上層に位置する人々であり、シェイズの反乱のような動きに対してはきわめて警戒的でした。この反乱は貧しい農民中心の反乱で、独立戦争の退役軍人ダニエル・シェイズを指導者とするものです。彼らは貧困に苦しみ、債務から刑務所に入れられる人も少なくありませんでした。
独立の大義に尽くしたのに、自分たちはなぜこのような債務に苦し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そのような不満が、彼らを税と負債の軽減を求める運動に駆り立てました。それはあたかも、ソロンの改革の際のアテナイにおける債務奴隷問題を思い起こさせる状況でした。
これに対し、フィラデルフィアの憲法制定会議に集まった人々は、このような民衆の急進的な動きに対して脅威を感じる上層階層に属していました。後で触れるように、彼らは立法権の拡大に対して警戒的でしたが、その一因は、貧しい人々の声を背景に、立法権が巨大な力をもつことに対する不安にありました。とくに各州政府によって個人の所有権が侵害されることへの危惧が、より強力な連邦政府の樹立へと彼らを後押ししたのです。
興味深いのは、このような「建国の父」たちが、民主主義に対していかなる態度をとったかです。一例として、前述した『ザ・フェデラリスト』を取り上げてみましょう。この第10篇では、純粋な民主政(pure democracy)が共和政(republic)と対比されています。著者たち(第10篇を執筆したのはマディソン)によれば、純粋な民主政とは、市民が直接集まって政府を運営する国家です。
このような国家では、人々の共通の利益や感情が協力と団結を生み出しますが、反面、多数派によって少数派の利益が犠牲にされることがあります。古代の都市国家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激しい党派争いも起こりがちです。結果として民主主義の国家は不安定であり、個人の安全や財産権を保障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説きます。
これに対し、共和政とは代表制を取り入れた政治体制を意味します。結果として、間接民主主義を通して選ばれた少数の市民が政府を運営します。そのような市民は、国にとっての真の利益、すなわち公共の利益をよく理解しているでしょう。さらに、純粋な民主政は小国にしか向きませんが、代表制を取り入れた共和政ならば、より大きな国家においても実現可能です。このようにして『ザ・フェデラリスト』の著者たちは、純粋民主政ではなく、共和政こそを選ぶべきだと読者に奨めたのです。
ちなみに第10篇では、小国レベルでは排除しきれない派閥の弊害を、連邦政府によって緩和することを論じている点でも有名です。人間社会、とくに自由な社会においてはどうしても派閥が生まれます。これが小国レベルでは致命的になるのに対し、大国、とくに連邦政府の下では一定程度、抑制することが可能です。なぜなら地方ごとに有力な派閥が異なるため、連邦レベルではそれらが相殺し合い、結果として公共の利益に近づくからだとマディソンは主張します。後の多元主義論につながる有名な議論ですが、純粋民主政を否定し、共和政を擁護する文脈における議論であることが注目されます。
古代ローマのところでも触れましたが、共和政(republic)と民主政(democracy)を対比的に捉える伝統があるとすれば、独立期のアメリカは、まさにその典型であるといえるでしょう。少数の人々(=エリート)によって公共の利益を目指す政治と、より多くの人々の政治参加によって多数者の利益を目指す政治を対比する二分法は、現在のアメリカの共和党(Republicans)と民主党(Democrats)という二大政党の名称にまでつながっているといえます。いずれにせよ、アメリカの独立を指導した人々が民主主義的であったかについては、疑問が残ります。
代議制民主主義が「常識」になる
「建国の父」たちが理想としたのは、「高い知性を持つ、有徳な人々」による共和国でした。人民の直接的な政治参加には消極的であり、すでに指摘したように、上院議員は州議会によって選ぶこととし、大統領を選ぶにあたっても、直接選挙ではなく、大統領選挙人を通じた間接選挙を採用しました(現在では、国民が選挙人を選ぶことで、実質的には直接選挙に等しくなっています)。
その意味でいえば、アメリカ合衆国が、その建国から「民主主義の国」であったというには、いくつかの留保が必要でしょう。たしかにアメリカ独立を導いたのは、独立宣言がいうように、「すべての人間は生まれながらにして平等である」という理念でした。この理念は、アメリカの歴史を貫いて作動し続けたドライビング・フォース(駆動力)であり、その過程を通じて、より多くの人々が「人間」に包摂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
とはいえ、建国の時点では、黒人奴隷が存在し、女性の参政権も認め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また、「建国の父」たちは、人民の直接的な政治参加の拡大にはあくまで警戒的でした。そのための代表制であり、立法権を抑制するための複雑な三権分立の仕組みでした。
そもそも、建国期のアメリカにおいて「民主主義」という言葉がとくに積極的に使われ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彼らが好んだのはむしろ、共和政や共和国を意味するRepublicでした。その限りにおいて、アメリカ独立をもって、近代における民主主義の大きな出発点というには、どうしても躊躇してしまうのです。
むしろ、民主主義の歴史を追う本書にとって注目すべきは、直接参加による純粋な民主政は小規模な社会にしか適さないし、可能であるとしても不安定さを免れないというイメージを確立したのが、「建国の父」たる『ザ・フェデラリスト』の著者たち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あるいは少なくとも、その有力な起源の一つ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さらには、代表制を伴う共和国の方が大国にも適応可能な上に、派閥の弊害を除去する点でも優れているという政治学の「常識」を打ち立てたのも、彼らの影響でした。結果として、私たちは、代議制民主主義こそが、近代の領域国家において唯一可能な民主主義であると信じて疑わなくなっているのです。(続く)
米国独立の指導者たちは、必ずしも民主主義を好ましいものと思わなかった。それではなぜ、民主主義が米国の根幹をなす価値観とみなされるのか。米国の民主主義を発見したフランス人貴族が見たのは、中央政府とは異なるところにある一般の人々の意識だった。(第3回に続く)
Shigeki Uno